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교계 비평 분류

성장하지 않은 한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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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8월호>

B.B.평론은 현재 우리나라 신학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설교자들이나 학자들의 글을 매회 한 편씩 선정하여 성경적인 관점으로 논평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호에서 다루어질 주제는 “교회 성장”으로서, 제시되는 자료는 월간 「목회와 신학」(두란노서원) 1993년 7월호에 게재된 「한국교회의 성장평가와 2000년대 비전」이라는 특집 논문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가끔 국내 외의 많은 신학자들에게서 “한국 교회의 눈부실만한 성장”이라는 말을 듣곤한다. 마치 한국 전쟁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 경제와도 같이 이러한 교회 성장의 기적(?)은 세계의 기독교인들을 놀라게 했다. 특별히 1960년대 이후 80년대 후반까지 한국 교회는 급성장했고 많은 학자들이 그 요인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성장한 한국 경제의 이면에 많은 비리와 문제점들이 깔려 있듯이 급성장한 한국 교회의 이면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깔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 성장의 원인들을 각각 연구했으나 그 원인들은 거의 비슷하므로 여기서는 한국선교연구소의 이요한 소장의 “새롭게 본 한국 교회 성장요인 분석”에 제시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 요인은 1. 한국 교회의 지도력과 영적권위, 2. 영적 각성 운동과 신앙적 갱신(부흥회 운동), 3. 인간적 요구 충족과 사람 수의 모임, 4. 긍정적 사고와 성취의욕, 5. 복음 위임의 우선성 확보, 6. 목회 프로그램의 다양성 등인데(pp.54-64), 이밖에도 뜨거운 기도 운동, 말씀 사경회를 통한 영적 지식 등 원인을 들 수 있으나 모두 위에 열거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자,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얼마나 성장해 왔는가? 과연 얼마나 성장했기에 그 원인을 분석하고 좋아하고 있는가? 우선 교회 성장이란 용어부터 집고 넘어가야겠다. “교회 성장”이라고 말을 할땐 누구라도 ‘그것은 외형적 성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그리스도인의 내적, 영적인 성장을 전제로 한다’고 말은 한다. 하지만 그 논리를 보면 전혀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지 않다. 우선 한국 교회를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외형적인 성장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사도행전 2:47을 보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그 교회에 날마다 더해 주시더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들』을 주목해야 하는데, 교회가 확장되는 것은 구원받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 성장의 첫번째 원리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 성장의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2:24-47을 읽지만 막상 47절의 『구원받는 사람』은 지나쳐 버리고, 그 앞에 나와 있는 조건들을 맞추어 나가기에 열을 올린다.
한국 교회의 상황을 보자. 외형적으로는 급속한 성장을 했다. 이러한 급성장한 교회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남한 인구 4천만 중에 4분의 1인 일천만이 기독교인이다. 명목상으로는 일천만 인구가 지역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모두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을 말한다. 그는 지역교회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몸된 무형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나라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필자가 사람들을 만나보고 또 구령하는 사람들의 간증을 듣다보면,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 열 명 중 한 명 정도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일백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을 만나봐도 거듭난 사람은 많지 않다. 교회는 많지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많지 않다. 구원의 복음도 듣지 않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며 윤리강론이나 펼치는 교회는 아무리 교인이 많아도 결코 성장한 교회가 아니다. 4천만 인구 중에 일백만 이하라면 성장이란 용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장했다고 하는 요인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그러한 요인들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한국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크게 기여해온 것은 뿌리깊은 샤마니즘과 불교, 유교적 요소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요한 소장은 “영적 각성 운동과 신앙적 갱신”이라는 소제목 하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당시에 한국 교회 안에 산 기도와 새벽 기도가 탄생되었다는 일은 당시 영적 각성운동의 유형을 이해 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장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있어 많은 사람들이 기도 운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p. 58).
사람들이 산 기도와 새벽 기도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을 때면 의례히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는 마가복음 1:35을 인용한다. 물론 아침 첫 시간에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문제는 그것이 새벽기도모임을 만들라는 명령과는 전혀 관계없는 구절이라는 것이며, 필요이상으로 새벽기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모임”을 만들라고 말을 한 적이 없다. 성경대로 믿는 많은 사람들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나 새벽 기도를 위해 모임을 만들지는 않는다. 많은 교회들은 새벽 기도를 의무적으로 설정해 놓고, 축복의 비결이니 기도응답의 비결이니, 충성의 표시니 하며 강조하며 율법적으로 얽매이게 하여 진리없는 “행위”를 강요한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하는 제사를 받기 원치 않는다( ).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원하신다. 사실 새벽 기도의 유래는 이교도적이다. 서양적으로 보면 바빌론 신비종교인 카톨릭의 미사의 영향이요, 동양적으로는 불교의 새벽 예불의 영향이다. 40일 새벽 기도, 새벽 100일 기도 등의 말은 예배를 말하는가? 예불을 말하는가?
한국 교회가 가장 성장했다고 말하는 60,70년대로 돌아가보자. “심령대부흥회”란 말이 너무나 익숙해 있던 시기이다. 교회마다 북치고 장구치고 소리지르고 귀신 들리는 역사가 바로 부흥회였다. 그 당시는 “욕쟁이 목사”하면 명예롭게(?) 들리던 시대이다. 그 북치고 소리질러 노래하고 통성기도하던 60,70년대의 부흥회는 현대에 와서 경배와 찬양이라는 락(Rock)음악 집회로 바뀌었다. 이것이 성장인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부흥회가 “사경회”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 깨어서 감정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말씀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둘러봐도 개역성경과 네슬 25판과 70인경과 칼빈주의 밖엔 안보인다. 구원이나 겨우 받으면 감사할말한 개역 성경과 더욱 더 혼란에 빠뜨리는 현대 번역본들이 교계를 휩쓸며,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의 신학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한국 교회는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은 했으나 막상 돌아갈 말씀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이전에는 전천년주의적 종말론과 세대주의적 의식이 그나마 깔려 있었는데, 이제 말씀을 연구한다는 미명하에 신신학이 서양에서 밀려왔는데 바로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이다. 더군다나 80년대 이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이 지성인들을 휩쓴 것이다. 이것이 성장인가?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교회의 순결”이다. 『이는 그가 말씀에 의하여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케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나서 점이나 주름진 것이나 또한 그러한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6,27). 교회는 독보리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며, 누룩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마13:25,33). 그러므로 독보리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그것은 성장된 교회가 아니다. 500명 모인 교회에 10명만이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의 인원을 10명으로 보신다. 교회는 순결해야 하며 비진리와 타협해서는 안된다. 국가와 타협해서도 안된다. 중세 교회는 카톨릭이라는 누룩으로 꽉차 있었다. 그들은 국가와 연합했다. 칼빈도 국가와 연계했다.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누룩과 손잡았다.
김성태 교수(총신대)는 “성장의 유형별 분석과 설교적 성장모델”에서 교회성장의 4가지 속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전통적으로 개신교회는 교회의 네 가지 속성을 믿는다. 그것은 교회의 연합을 의미하는 하나됨(Oneness)과 거룩성(Holiness)이요 보편성(Catholicity)과 사도성(Apostolicity)이다... 필자는 이 네 가지 속성에 의거한 교회성장이야 말로 참된 교회 성장이요 선교적 교회 성장이라고 믿는다”(p.78).
이 네 가지 속성에 대한 설명은 그럴듯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용어에서부터 어색함을 발견하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하나이다(엡4:4-6).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수많은 지역교회도 하나일수는 없다. 분명히 그 교회들 가운데는 잘못된 교회가 있는데 “선교”라는 미명하에 그들과 연합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의 순결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그 신부가 순결치 못하다고 상상해보라. 신부인 교회가 신랑인 예수님을 맞을 때 불순물은 다 떨어져 나가고 알곡만 올라가게 된다. 따라서 불순물이 섞여서 성장한 교회는 결코 성장한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보통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로 표현하곤 하는데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것을 카톨릭교회(Catholic Church)라고 부른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로마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주장이고 개신교에서 매주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The Holy Catholic Church)...”에 담겨있는 참뜻이다. 이것이 보편성이라면 참된 교회는 그 보편성에서 분리해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를 이루며...』(고후6:14,15).
이제 진정한 교회 성장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위에서 제시한대로 먼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요, 둘째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이요, 셋째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태로 깨끗이 보존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여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진정한 부흥이 있는 것이며, 이 시대의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것은 결국 복음을 전파해서 교회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역 교회에서의 수적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많는 사람이 수적 증가를 의식해서 많은 전략과 많은 프로그램들을 계발하지만 살아있는 참된 말씀이 없고, 영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성장이 아닌 것이다. 한국 교회는 수적 증가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다. 때로는 부흥회로, 때로는 교회 연합을 통해서 한국 교회는 일어서려고 발버둥 쳐왔다. 그러나 영과 진리가 함께 하지 않고는(요4:23,24) 교회 성장은 불가능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이러한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었고 가짜 요인들만 발견한 것이다. 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60-80년대에는 교회가 이러 이러한 요인으로 성장했는데 이제는 그러한 요소가 쇠퇴함으로 90년대에는 정체된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4천만 국민 중에 백만 이하가 거듭난 성도라면 한국 교회의 성장을 재고되어야 할 것이며 이제는 진정한 교회 성장을 위해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말씀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롬10:10,17).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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