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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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격자들의 “목회자 윤리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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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2월호>

필자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가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를 발족하기에 앞서 공개한 “한국 교회 목회자 윤리선언문”을 읽어 보았다. 한목협은 최근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를 독립적인 상설기구로 설립하여 목회자들의 윤리적 사명 수행을 돕기로 결정한 바 있는데, 그들이 공개한 선언문에는 ① 교회에서 어떤 직책이나 지위를 얻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거나 돈을 쓰는 일이 없도록 자정(自淨) 노력을 계속할 뿐 아니라 감시 감독의 책임도 다할 것, ② 교회의 불투명하고 독단적인 재정운영이 목회자를 부패시키므로 교회의 재정은 교인들의 감시와 감독을 받을 수 있도록 공개할 것, ③ 목회자는 결혼의 존엄함과 가정의 순결을 지키는 일에 본이 될 것, ④ 목회자로서 검소와 절제의 모범을 보일 것, ⑤ 세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정당을 만들거나 특정 정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일을 삼갈 것, ⑥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고백할 뿐 아니라 기독교 진리의 탁월성을 믿지만, 동시에 타종교들을 존중하며, 그들이 가진 신앙과 종교시설을 폄하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것을 골자로 한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일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판단해 봐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어린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문제가 생기면 밤낮 구호만 외쳐대는 영적 어린 아기와 같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인용한 고린도전서 3:1에는 필자의 의도로 두 가지 표현이 빠져 있다. 첫째는 『형제들아』이고,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들을 향해 두 표현을 인용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의미하고(엡 1:5,6), 다른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가족』(엡 2:19)의 구성원이자, 그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특징”이 그들의 “열매”로 분명히 드러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서는 그 특징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끼리 잘 해보자고 작성한 “목회자 윤리선언문”은 오히려 그들의 현주소를 반영하며 반증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특징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말씀들로 “한국 교회 목회자 윤리선언문”과 그 목회자들을 조명해 보도록 하자.

첫째,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오직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전 15:1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이생에 소망을 두지 않기에 이생, 곧 세상의 일들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고후 4:18). 성도가 현 세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 즉 영원한 생명(요일 2:25)과 영원한 기쁨(사 35:10), 영원한 통치권(단 7:14), 영원한 왕국(벧후 1:11), 영원한 영광(고후 4:17), 영원한 유업(히 9:15), 영원한 집(고후 5:1), 영원한 위로(살후 2:16), 영원한 존귀(딤전 6:16)이다. 이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는 성도가 왜 그 제한선에서 벗어나 형체가 사라져 가는(고전 7:31) 임시적인 세상일들에 관여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일에 관여한다면 그 역시 주님을 미워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관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책망하라.』(엡 5:11)고 명령하신다. 즉 『흑암의 권세』(눅 22:53) 아래 있는 세상일들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회자 윤리선언문에는 “세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정당을 만들거나 특정 정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일을 삼갈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들의 선언뿐 아니라 그간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벌여온 정치색 짙은 일들을 지켜보노라면,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흑암의 일들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생아들인 것이다. 목회자윤리위원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부터는 잘 해보자고 독려하고 있는데, 윤리위원회가 과연 그 일을 추진할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 다음의 말씀을 보라.

둘째,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또 어느 곳에서나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관한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고후 2: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를 나타낸다. 이 『지식의 향기』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요,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향기』이다(고후 2:15,16). 목회자 윤리선언문을 보면, “타종교들을 존중하며, 그들이 가진 신앙과 종교시설을 폄하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는 이들의 발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한국 교회에는 타종교의 종교시설을 파괴하는 헛된 열성을 보인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더러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진리에 무지해서 그랬다손 치더라도, 성경이 『멸망하는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하는 “타종교들과 그들이 가진 신앙”을 “존중하자”는 주장은 대부분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타종교인들을 『멸망하는 사람들』로 대하고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타종교는 “이웃 종교”이다. 그들은 성경을 거슬러 “사망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지옥과 더불어 합의하는” 자들인 것이다(사 28:15).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기독교 진리의 탁월성”을 운운할 때에는 타종교와 비교했을 때 좀 나아보인다는 것이지 타종교를 “마귀의 일”로 규정하는 “복음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고린도후서 2:14에 따르면,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내지 못하는『사망의 향기』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이다. 이 향기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바탕을 둔 성경적 지식이다. 이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롬 1:16)이 내는 『사망의 향기』는 그것을 믿지 않으면 어떤 종교를 가졌어도 모두 “사망”에 매여 “지옥”에 가게 됨을 뜻한다. 사망에 매여 지옥에 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사망에 매이지 않고 부활하신(행 2:24)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뿐이다(히 2:15). 만일 그렇지 못하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를 헛되이 믿는 그들 목사들이 모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혼”을 지옥에서 “속죄제물”로 만드심으로 생겨난 교회에 관한 진리이다. 『주께서 그의 혼을 속죄제물로 만드실 때 그가 자신의 씨를 보리니...』(사 53:10).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혼을 지옥에서 “속죄제물”로 만드심으로 생겨난 주님의 『씨』이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한 시편 22편은 이 『씨』인 교회의 탄생을 예언했다. 『한 씨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리라. 그들이 와서 태어날 한 백성을 위한 그의 의를 선포하리니 이는 그가 이것을 행하셨음이라』(시 22:30,31).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태어난 『한 백성』, 곧『한 씨』가 교회이다. 성경은 죄인들을 대신해 제물이 되신 주님의 속죄제로 교회가 탄생할 것을 예언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드리신 그 『한 번의 속죄제』(히 10:12)를 믿고 죄를 용서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직접 지옥에서 제물로 태워져야 한다. 『그곳[지옥]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모든 사람이 불로 소금치듯함을 받을 것이며,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막 9:48,49). 주님께서 제물로 드려지신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아는 목회자라면 타종교를 존중하자는 지옥의 저주를 절대로 말할 수가 없다. 믿음이 올바로 된 목사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는 법인데 우리는 목사라는 자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있다. 그것도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기독교 윤리주의자들에게서 듣고 있다. 그 십자가의 원수들은 자신들도 구원받지 않은 부패한 인본주의자들이면서 도대체 누구를 계도하고 진리로 인도하겠다고 나선 것인가?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언가 되는 줄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알라(갈 6:3).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마 15:14).

셋째,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옛 생활의 나쁜 습성을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 새 사람으로 살게 된다. 그러나 목회자 윤리선언문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직책이나 지위를 얻으려고 세상 방식을 따라 선거운동을 하며 금품을 살포한 일, 그들의 교회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일들, 목회자가 교인들의 헌금을 자기 돈인 양 착복하고 횡령한 일, 목회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수많은 성범죄들, 교인들의 헌금으로 호의호식한 일 등을 적절한 표현으로 요약하여, 그들이 실로 속되고, 탐욕스러우며, 음욕으로 가득 차 있고,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죄의 종이라는 면을 스스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 누가 그 목회자들을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볼 것인가? 그들이 하나님께 부름받고 쓰임받는 종들인 것인가? 그들이 보여 온 그 모든 작태들은 그들이 다만 먹고살려고 목회를 하는 생계형 삯꾼들임을 증명할 뿐이다. 세속적이며 육신의 일들을 탐닉하는 옛 성품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거듭나지도 않은 채 교단신학교를 나와 목사 안수를 받고 먹고살기 위해 교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하나님께서 생계형 삯꾼들도 일꾼으로 부르셨는가? 세상에서 할 일이 없어 교회로 기어들어온 한량들도 일꾼으로 부르셨는가? 그런 자칭 주의 종들로 인해 교회가 『강도들의 소굴』(눅 19:46)이요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계 18:2)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목회자윤리위원회가 내놓은 주장 중에는 그들의 믿음이 비성경적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성결을 이루는 일에 마땅히 헌신해야 한다. 동시에 개인적인 결단과 헌신만으로는 이런 과업을 성취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우리 모두가 연약한 동역자들로서 서로 돕고 보호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통감하여...』 보라,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만으로는 현재의 타락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도움은 헛되다.”(시 60:11)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고백이 되어야 할진대, 연약한 육신을 다른 육신이 돕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며 성령 외에 “육신”의 능력을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이 『육신적인 생각』(롬 8:7)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통제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롬 8:13,14). 육신의 더러운 행실을 죽일 수 있는 분은 성령님뿐이시다. 오직 성령님만이 육신과 반목하여 육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게 하실 수 있다(갈 5:17). 그분이 육신과 반목하는 일에 육신의 도움이 왜 필요하겠는가? 성도는 자신의 의지를 주님께 내어드려 주님이 그 일을 하시도록 해야 한다. 영적인 문제는 육신의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그분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일도 스스로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려고 나섰단 말인가? 어찌 그들을 양무리의 본이 되는 목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벧전 5:3) 성령 안에서 개인적인 결단과 헌신을 해도 성결을 이루기 어렵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반드시 그의 구원을 확인해 봐야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한국 교회에는 주님을 순수하게 섬겨 보려 하는 소수의 목회자들이 있을 것이다. 교단신학교들에서 배운 게 없어서 방법을 모를 뿐이지 순수한 믿음과 섬김을 갈구하는 이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잘못된 이들과 함께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흑암에 거하면서 “나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의 권면은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배교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는 것이다(계 3:22). 근본이 잘못되었는데 앞으로 잘 해보자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누가 더러운 것 가운데서 깨끗한 것을 가져올 수 있나이까? 아무도 없나이다』(욥 14:4).
한국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은 주님을 섬기려면 변개된 성경을 버리고 바른 말씀을 깨달아 믿음을 정결케 하라는 것이다. 성경에 무지하면서 열성만 가득한 그들에게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주셨으니, 이제 그 성경으로 진리를 바로 알고 주님을 바로 섬기라는 것이다. 주님께 바르게만 돌아온다면 어찌 아니 기뻐하시겠는가? 바른 말씀으로 순수한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대비한다면 그 일이 어찌 아니 기쁘시겠는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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