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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교회사 분류

신약성경의 지역교회를 모델로 삼은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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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4월호>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는 사무엘 아담스(1722- 1803)와 존 로크(1704)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사상을 존 위클리프와 틴데일의 사상에서 빌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위클리프는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독립선언서에는 청교도들의 정치철학이 반영되기도 했다. 독일과 영국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져 신약교회 정치가 국가정치의 모델로 사용되기까지 진정한 공회제도의 틀인 “평등한 권리”와 자유가 존재하는 정부형태가 역사상 등장한 적이 없다.
레오나르드 베이콘은 신약성경의 사도들은 그 어떤 국가교회도 세우지 않았으나, 스크루비와 카트라이트가 영국의 지역교회 정치를 강조한 데서 미국 정부의 참된 형태가 비롯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기업”에 기초한 입헌공화 민주제도는 프랑스 무신론자나 독일의 관념론자나 영국의 이신론자들의 산물은 결코 아니다. 미국의 건국공신들은 성경대로 믿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기초해서 미국을 건설했다.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환경보호론자”, “국제사회주의자”, “녹색당원”, “하나의 세계주의자”, “국제공산당” 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기독교적 원칙에 입각해서 세워진 정부는 군주제, 사회주의, 가난과의 전쟁, 주택계획, 연금, 의료보혐, 임금보장 등과 같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자”는 표어를 내건 복지국가가 아니고, 항상 지방자치 정부였던 것이다.
에드윈 홀은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기독교 사상은 공회제도와 일치한다라고 말했다. 지역교회의 기본원칙은 자발적 연합(강제적인 통합이나 인종혼혈이 아닌), 자발적 모임, 다수결 투표(선거인단에 의한 간접투표가 아닌) 그리고 지도자들은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해 그들의 능력에 따라 선택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유기체를 통치할 도덕적 원칙들에 관해 존 로크는 참된 도덕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신약성경을 읽는 일이라고 고백했다.
로크가 말한 “신약성경”은 다름 아닌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이었던 것이다(현대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의 타락한 사고에서처럼 “원본”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잊지 말라). 로크에 따르면 현대의 그 어떤 철학자나 인정받는 과학자도 미국의 도덕적 원칙을 수립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미국을 떠받쳤던 도덕의 원칙들은 “현대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300년 전에 이미 인쇄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 중의 책이 출판된지 30년도 채 되기 전에(1628년 6월) 영국하원은 권리장전의 원칙들(배심원에 의한 재판, 적법한 소송절차, 승인없는 점령의 배제, 대표권 없는 조세의 거부)을 천명하고 있는 권리청원을 통과시키기 위해 소집되었다. 1689년 12월 16일 청원권과 표현의 자유와 무기의 개인소유권 등이 선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항들은 영국을 교황의 중세 암흑시대로 되돌리려는 두 명의 로마 카톨릭 국왕(찰스 1세와 제임스 2세)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성공회라는 국가교회 제도 하에 있긴 했어도 영국인들은 국가교회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나와있는 공화제도적 요소들을 부정하는 국민정부를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1500년 동안 카톨릭의 그 어떤 성경도 해내지 못한 그 일을 <킹 제임스 성경>은 단지 80년도 안되는 기간에 해냈던 것이다. 즉 영국의 정치를 바로잡는 그 일이 성경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말이다.

알저논 시드니는 국민의 모든 자유는 하나님과 자연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을 편 또다른 수필가였다. 비록 영국 국민들이 존 로크를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꼽는다 할지라도 로크뿐만 아니라 아담스와 시드니도 “자유”란 서로 죽임을 통해 “적자”로서 생존해 온 진화론적 유인원들이 차지할 권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다윈과 헉슬리). 20세기의 작가들은 금세기를 “과격한 세기”라고 종종 부른다. 하나님이나 의로움과 관련없이 무조건적인 자유가 용납되는 곳에서는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들 작가들의 주장은 매우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미국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또 한 사람은 「법의 정신」을 쓴 몽테스키외였다. 이 책에 따르면, 정부의 행정권(대통령)과 사법권(대법원) 그리고 입법권(의회)이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 대의 정부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카톨릭 국가에서처럼) 모든 자유를 상실할 것이다. 사실 모든 카톨릭 지역교회들은 바티칸의 소유이며 그 어느 교회회원들도 세계 어느 곳의 교회건물이나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동시에 카톨릭교도 중 99%가 교황선출을 위한 투표에 참가할 수 없다. 카톨릭 같은 파시스트 독재체제 하에서는 “자유”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제도요, 이 제도는 적어도 1933년까지는 미국에 존속했었다. 이 제도는 몽테스키외의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그는 이신론자였다.

웰만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메이플라워 호의 선상에서 잉태되어”, “국민 정신 안에서 확고해졌고 국민 정부 안에서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개념은 “이단들”이 지니고 있던 성경적 개념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생각을 화란과 영국에 있던 침례교 지역교회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플라워 맹약에는 “다원론적 사회”, “사회보장”, “게이해방”, “여성의 권리”, “공민권” 및 “억압받는 소수민” 등과 같은 내용들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 이 맹약에는 “정부수립”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독교 신앙을 증진시키는 것이지 로마 카톨릭 신앙을 보급시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메이플라워 그룹이 그들의 신앙고백대로 믿고 있었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일을 하지 않는 시민은 먹어서는 안된다는 확신 또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은 필그림파퍼스들이 메이플라워 호에 승선하면서 미국으로 가져온 원칙으로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살후3:10)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 선언 중의 하나이다. 복지단체가 제공하는 자선물은 세계 제 1차 대전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필그림들이 그들의 믿음을 고백했을 때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극단주의자였던 도나티스트 - 왈덴스 - 분리주의자 - 침례교도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들은 종교적 독재를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들의 미국이민 동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동기였던 것이다. 그들은(미국에 이미 와 있던 청교도들에 의해) “브라운파”(침례교도 브라운의 추종자)와 “분리주의자”로 불렸다. 그들이 취한 “지독한” 종교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들 그룹은 메사츄세츠와 코네티컷 주에 있던 청교도들의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638년 퓨리탄(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한 지 20년도 되기 전에 최초의 미국헌법이 쓰여졌다(이것은 “독립기념관”이 유명해지기 100여년 전의 일이다).
1. 모든 시민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워싱턴 D.C.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2. 선출된 대표들이 지역사회를 위한 법률을 제정한다(지방법원 판사들이나 국세청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3. 선거는 어떤 특정인의 선호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투표는 법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당신이 선택한 후보”를 위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4. 국민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여야 한다.

“변화하는 요소들”의 “가이드 라인”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가치 규명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이 문서에는 그 어느 교회나 교회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해야 된다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킹제임스성경>이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최종권위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멋지게 시작한 나라가 오늘날 어찌 “이런 꼴”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킹 제임스 성경>은 미국의 건설자들에게 정치적 헌장이 되었다. 왜냐하면 위에 인용한 “기본 규범들”은 독립을 주도한 대륙의 교회보다 100년이나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코네티컷 규례가 만들어진 배경은 퓨리탄-필그림 교회들의 지역회중 조직이었다. 이 교회조직에는 대주교도, 주교도, 수도승도, 추기경도, 사제도, 수녀도, “교황청대사”도 없었다. 메사츄세츠 주 역시 입스위치의 나타니엘 워드 목사가 작성한 “자유선언문”과 더불어 이 규례를 따랐다. 윌리암펜은 펜실베니아 주를 위해 비슷한 법률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이들 문서를 위해 그 어떤 로마 카톨릭 신자의 정치적, 종교적 충고도 요청된 바 없다. 미국의 자유는 “평등권”, “시민권” 혹은 “카톨릭의 용납” 등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미국의 자유는 <킹 제임스 성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성경적인 헌법을 만들려는 시도 덕분에 정부에 대한 두 가지 사상이 확립되었다. 첫째, 지역교회들과 개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의회가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이다. 국가교회는 이들 문서의 그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이 문서의 작성에는 그 어떤 카톨릭 성서도(ASV, NASV, RSV, NRSV) 참고 하지도 않았다. 문서 작성을 위한 종교 혹은 정치 용어나 도덕적 원칙에 관한 토의에 그 어떤 카톨릭 주교나 사제도 초청된 바 없다.
이 정도이고 보니 미국에 모인 모든 민주적 단체는 고집과 편견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평가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카톨릭 정부 형태는(정치적 정부이건 종교적 조직이건) 자유와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의 잔재가 성공회 사람들이 군주제도 하에서 중앙집권적 정부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버지니아 주에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이 군주제도 하에서 영국 왕은 주교들로 이루어진 국가교회와 “하원”의원으로 이루어진 의회를 통해 통치했던 것이다. 이것은 1578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헌장 이후부터 채택된 성공회 시스템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교회국가제도에 대한 “격렬하고 광신적인” 저항이 미국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미국 헌법에 권리선언을 첨가시킬 것을 끝까지 주장한 사람들은 버지니아 주의 침례교도들이었다.

우리는 이제까지 정치적인 문제를 간략히 다루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한 국가 전체가 신약성경의 지역교회 정부를 모델로 해서 법률과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투표(행6:2,3), 자발적 기부(행5:4), 기도와 감사(행4:24), 하나님의 뜻을 구함(행1:24), 자발적인 나눔(행4:32),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음(행4:32, 갈3: 26) 그리고 그 어떤 지위의 로마 카톨릭 성직계급에게도 특별한 호의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물론 헌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여러 면에서 이러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또 후일 아브라함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 그리고 케네디 등이 인종적, 사회적 이슈를 사용해서 헌법의 기본정신을 무너뜨려 결국 헌법의 핵심적인 사항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기는 했다(의무적인 소득세, 강제징병, 강제적인 인종통합, 금본위제도의 폐지, 공민권법 등). 하지만 최초의 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초창기 미국인들의 의도는 매우 선한 것이었다. 미국을 건설했던 분들은 일간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가 <킹 제임스 성경>보다 미국을 더 내세우는 그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1700-1800년대에 돈벌이를 위해 만들어낸 신문조각이 “언론”이라는 우상이 되어서 “믿음과 실행에 있어 최종권위”로서 받아들여지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미국에서 언론이 성경을 대체해감에 따라(1860-1960), 공화제는 점차 민주주의로 변질되어 갔고(1860- 1900), 그 후에는 연방 민주주의로(1900- 1933), 결국은 연방 ‘소비에트’로 변절되었다(1933-1990). 이제는 파산당한 카톨릭 ‘공산’국가로 몰락해가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의 모습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는 법이다.

메사추세츠의 존 아담스가 사무엘 아담스와 패트릭 헨리와 함께 대륙의회에 앉게 되었을 때(1774. 9월), 그는 거의 100여 년 동안 주 정부의 모델로 사용되었던 퓨리탄 지역교회 정부의 형태를 생각했다. 패트릭 헨리(1736- 1799)는 침례교 설교자들이 거리에서 설교했다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매질당하는 것을 목격했었다(롤라드, 알비겐스, 왈덴스, 불가리안, 페트로브루시안 및 헨리시안들 역시 동일한 박해를 받았다).
사무엘 아담스는 군주제에 관한 한 이미 좌익 성향을 갖고 있었다. 톰 페인(1737-1809)은 영국으로부터의 분리에 동조했는데 이는 자기가 좌익 혁명투사임을 내보이기 위함이었다(페인은 평생동안 결코 성경을 믿어본 적이 없다).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버지니아의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 작성되었고 여러 주 대표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7월 2일에 열린 대륙의회에서 독립선언문의 배경사상에 대한 선언이 있었는데 그것은 각 주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때 이래로 남부의 여러 주들의 권리선언문이었고 로버트 리, 죠지 윌러스, 제퍼슨 데이비스 및 모든 남부 사람들이 믿었던 바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 이래로(1865) 자유를 누린 주는 하나도 없다. 동시에 그 어떤 주도 독립을 누리지 못했다. 1865년 이래 미국의 주들은 남침례 교단총회에 속한 지역교회들처럼 종속되고 말았다. 연방관료들이 각 주를 소유하고 통제하게 되었던 것이다. BB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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