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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1월호>

암흑시대의 시작 - 두아티라 교회시대
니케아 종교회의(325)로 시작된 퍼가모 교회기간은 교회가 국가와 타협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를 형성하고, 여러 종교회의들을 통하여 로마교회는 성경과 교회 전통 사이에서 최종권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면서 서고트족, 반달족, 고트족 등이 로마 카톨릭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자 로마 카톨릭은 국왕들(클로비스, 마르텔, 피핀, 샤를마뉴)과의 정치적 결탁으로 군사적 보호를 받는 한편,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카톨릭화함으로써 국왕들을 자신의 시녀로 삼고 로마교황은 하나님으로 신격화되어 전 유럽을 종교적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이에 따라 암흑시대의 전반부인 두아티라 기간(500-1000)이 전개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졸작 <하나님의 도성>에서 주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 임하여서 천년을 지속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의 나라는 로마 카톨릭에게 임하였고 이것을 확장하기 위해 그들 교회에 더 많은 권세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에게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수단은 유아세례를 통하여 수많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카톨릭 교회의 양으로 삼는 것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의 탈을 쓴 정치 집단이기 때문에 영국과 유럽을 카톨릭화하는 데 있어서 종교적 호소와 더불어 정치적 공작이 수반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영국과 독일이 로마 카톨릭 국가가 되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고, 두아티라 기간의 콘스탄틴이라 할만한 샤를마뉴를 통해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1000년 간의 암흑시대를 연출한 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이고 사탄적인 모습을 보기로 한다.

군대의 힘으로
영국에는 A.D.200년 이전에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었다. 퍼가모 기간 동안 성 페트릭이나 콜럼바의 선교사역으로 6세기 말에 어거스틴이 영국에 첫 발을 내딛기 전에 이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602년에 어거스틴은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지원과 영국 왕, 프랑스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성경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영국교회의 감독들과 우호적인 “친선” 관계를 맺었다. 서섹스 종교회의에서 그는 대주교가 최종권위이고 유아세례가 성인 그리스도인에게 베푸는 침례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어거스틴보다 성경교리를 더 잘 아는 영국 교회 감독들은 이러한 그의 주장을 거부하였다[그들은 어거스틴 이전에 피라누스(Piranus, 325-430), 세르바누스(Servanus, 450-543), 드로스탄(Drostan, 470-540), 핀바르(Finbar, 490-578)에게서 훈련받았다]. 이러한 거부로 인해 2차 회의에서 곤란에 직면하자 어거스틴은 “경건하고 영적인” 카톨릭 대주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영국인들이 성경적인 기독교를 버리고 카톨릭의 죽 한 그릇을 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색슨족을 보내서 복수하신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경우처럼 독일도 교황의 “대사”인 바니페이스가 등장하기 오래 전에 성 패트릭과 콜럼바의 선교사역으로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었다[더 오래 전에 이레내우스(120-192)의 시대에 이미 구 라틴 성경이 전달되었었다]. 바니페이스는 교황 그레고리 2세의 명령을 받아 독일을 카톨릭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연히 투린지아(Thuringia)와 바바리아(Bavaria)에서 냉대를 받았는데 이 지역들은 콜럼바의 반 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이미 복음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니페이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의 뒤에 군대의 힘이 필요한 것을 깨닫고 722년에 투린지아에서 물러나 카알 마르텔의 군대를 요청한다. 그는 선교사역이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할 때 훨씬 더 효과적이고 영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배운 것이다.

로마 카톨릭 독재자들의 원형 - 사를마뉴
사를마뉴(768-814)는 모든 로마 카톨릭 독재자들[탤리랜드(Talleyrand), 프랑코, 히틀러, 케네디, 카스트로, 바티스타, 알랜드, 교황 레오, 레닌, 무솔리니, 교황 바니페이스, 메테르니히, 나폴레옹 등등]의 위대한 원형이다. 샤를마뉴는 나폴레옹, 교황 어번, 교황 그레고리, 헨리 8세처럼 반(反)교회사의 영역에 속한다. 그는 아무런 성경적 기독교 신앙의 표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를마뉴 생애 최고의 야망은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의 최대 목표는 성경예언(계 11-13장, 19장)을 전복하고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정정치를 세우는 것이었다(칼빈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생애를 통해 50회 이상의 군사 출동을 하여(이중 단 한본도 출애굽기에서 민수기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싸움처럼 하나님이 인도하신 적이 없었다) 롬바르드, 아키타니안즈, 투린지안스, 바라리안즈, 데인즈, 슬라브스, 사라센, 그릭, 색슨 등과 싸웠다. 이것은 국제연합처럼 유럽의 튜튼족과 라틴족을 모두 한데 모아 그와 로마 카톨릭 교황 밑에 두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싸움들이었다.
예를 들면 774년 하드리안 교황이 북이태리 롬바르드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 때문에 위협받고 있을 때, 사를마뉴는 알프스를 넘어와서 그를 도왔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가 781년에 다시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황은 그를 “이태리 왕”으로 임명하였다. 796년에 세번째로 방문했을 때에는 하드리안 교황이 그의 생일 선물로 성 베드로의 무덤 열쇠를 선사했다. 그러나 사실상 베드로의 무덤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교황은 그에게 금면류관을 수여했는데(800) 이 때에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이 사를마뉴 카이사에게 왕관을 수여했다”고 찬미했다. 그 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지도자에게 자기를 “카이사”로 숭배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사를마뉴에게 왕관을 수여한 교황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수여하신 것처럼 떠받들어졌다. 카톨릭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때부터 국가(천국)와 교회(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주의 나라를 확장해 가지만”, 교회가 승리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의 머리인 교황은 하나님으로 인정되는 반면, 국가의 통치자는 단지 카이사에 그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아래 있는 카이사는 정치적 왕국(천국)의 머리이지만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 예속된 것이다.
콘스탄틴 아래서는 교황이 반 카톨릭파들을 죽이도록 군대를 요청하는 형편이었고 기껏 로마의 대주교 정도의 직분이었으나, 사를마뉴 아래서는 교황이 유럽이 모든 반 카톨릭파에 대한 군사 출동을 요구할 수 있었고 게다가 대주교에서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특권을 누렸다.

교황이 왕들의 통치자가 되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고 나니 이후의 교황들은 각 나라의 왕들을 마음대로 선임하는 데다가, 협력하지 않는 왕이 있으면 서슴없이 그 자리를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800년 이후 로마 카톨릭 교황은 유럽 국가들을 지배하는 최고의 정치지도자로 기반을 확고히 한 셈이다. 이것은 성경의 기준에서 볼 때(계13:1-10) 이 세상을 미혹할 적그리스도의 유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살후2:1-9). 교황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직분을 취함으로써(요17:11) 그는 카톨릭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숭배되고 (단11:37) 국왕들의 통치자로 군림한다. 이때부터 로마 교황에 복종하고 로마 카톨릭 노선에 따르도록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국왕들은 훌륭한 통치자로 인식되고 반면에 로마교회의 교리나 가르침, 규율, 성사들, 신부들, 종교회의들에 반대하도록 허락하는 국왕들은 악한 통치자로 여겨지게 된다. 선과 악의 기준이 더이상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800년부터 선과 악에 대한 성경의 기준을 그들 교회의 기준으로 대체시켰다. 참으로 이렇게 암흑시대의 “주의 나라”는 확장되어 갔던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