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캐스퍼 슈뱅크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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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5월호>

슈뱅크펠트(1489-1561)는 실레지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루터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개혁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침례교 입장에 가까운 성경적 신학을 전개했다. 그는 국가는 그 어떤 시민에게도 자기의 종교적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는 법을 만들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슈뱅크펠트는 점점 더 신약 성경적 기독교에 다가갔고 “루터교도”들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는 사람들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에 의해 구원받으며 성령께서 물침례 없이 사람을 중생시킨다고 가르쳤다. 그는 더 나아가 “떨어져 나갈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몇몇 성경구절은 “사람”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나갈 가능성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요한 웨슬리와 샘 죤스의 입장이었다.
이 교리로 인해 아르미니우스는 곧 박해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르미니우스의 반대파였던 영원한 보장과 선택을 그렇게 잘 믿는 칼빈주의자들이, 거의 동시에 어린아이를 물 뿌려주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믿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이단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소위 “이단들”이고 불리웠던 사람들은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참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었다. 감독교회, 감리교회, 루터교회, 카톨릭교회 및 오순절 그룹 등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사람”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있다고 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과 비교할 것) 그거야 성경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은 구절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히브리서 3:14; 6:1-6, 10:26-30; 야고보서 2:24; 갈라디아서 5:4; 마태복음 25:30; 24:50-51; 계시록 3:5; 22:14; 사도행전 13:43; 10:35 등을 아주 훌륭한 켐벨주의자들 처럼 찾아 냈던 것이다(1980).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무천년주의자이거나 혹은 후천년주의자라면 이 구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전천년체계 만이 열거한 구절 중 8개의 구절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도 아르미니우스도 전천년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로마의 알렉산드리아 이단이 1200년간이나 쇄뇌시킨 것을 어찌 완전히 떨쳐벌릴 수 있었겠는가? 사실 오늘날 전천년주의자들 중 90%가량이 히브리서 4,6,10장, 혹은 마태복음 24,25장을 아르미니우스 보다 더 잘 다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결국 체면치레를 위해 주의 만찬은 실제의 제사가 아니며 유아 침례는 이단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만약 사람이 중생했다고 고백한다면 그는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증거를 그의 삶에서 마땅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로마 카톨릭에게는 슈뱅크펠트는 제 1등급의 이단이요, 진리의 철천지 원수요, 사탄의 자식이요, “지옥문과 연계한 자”이며 “거룩한 어머니 교회”를 감히 전복시키려는 못된 녀석이었던 것이다.

제이콥 아르미니우스

제이콥(혹은 제임스, 1560-1609) 아르미니우스는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의 육체의 가시였다. 화란의 Oudewates에서 태어난 그는 유트레히트와 마르부르크에서 교육을 받았고 제네바와 바젤에서는 테오도르 베자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03년 레이든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609년 죽기 전에 개혁교회 신학자들을 노회로 소집하여 칼빈이 뒤범벅으로 만들어 놓은 반성경적 추측들을 분명히 바로 잡고자 하였다. 그의 사후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휴고그로티우스와 “그의 항변”에 동조한자들) 칼빈의 5대 강령(TULIP체계)에 대해 다섯 항목의 답변을 제시하였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중상 비방을 받기도 했던 아르미니우스가 실제로 가르친 것들은 빌리 선데이, 드와이트 무디, 죠지 휫필드, 죠지.W.뜨루에, 디한 박사, 찰스 풀러, 잭.반.임프, 잭 하일스, 리 로버슨, 존 R.라이스, 그리고 빌리 그래함이 유용하게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19,20세기의 구령하는 근본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가 비록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성도들은 칼빈에게 동조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문제는 성경해석의 문제인고로 더이상 교회사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다만 계시록 22:14, 마태복음 24:13과 그 주석을 참고하기 바란다.)
현대의 “Hard shell Baptist”나 “Pimitive Baptist”(핑크, 쉘톤, 바나드, 길핀, 로스, “Sorverign Book Club”, “Old puritan press” 및 “The Baptist Examiner” 등)들은 칼빈의 5대 강령(TULIP)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침례교라도 “아르미니안주의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The Baptist Examiner”가 모략 중상한 바에 의하면 미국에 있는 구령하는 모든 침례교도는 칼빈의 “제한된 속죄”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는 “아르미니안”이라는 것이다. 그가 비록 “성도의 견인”(믿는 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한 교리)을 가르치더라도 완고한 숙명론자들에게는 그래도 “아르미니안”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드는 모양이다. 피터 럭크만 박사가 석사학위 청구 논문 심사 때 심사위원으로부터 칼빈주의자인지 아르미니안주의자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답변하기를 “내가 갈보리에 가기 전에는 아르미니안이었으나 그 후에는 칼빈주의자가 되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훌륭한 답변이 못 된다”고 했다. 럭크만 박사는 다시 답하기를 “훌륭한 질문이 아니었다”라고 해 주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은 완전히 부패하였으나 의지는 부패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심지어는 그 분의 피를 발로 밟은 자들과 (히10:29) 그분의 속죄를 거절하는 자들(벧후2:1)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선택은 미리아심(벧전 1:2)에 조건지워져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죄인이라도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이것 역시 성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창6:3, 행7:51). 비록 아르미니우스가 히브리서 4:6, 10장과 야고보서 2장, 마태복음 24,25장에서는 잘못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구원에 관한한 아무런 오류가 없다. (즉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관한 교리). 어거스틴과 칼빈은 인간은 물뿌림을 받을때(소위 세례) 선택됨으로 인해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으니 만약 사전에 “선택”되어 있지 않았다면 물 뿌리는 세례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게 되는 셈이다. 칼빈과 쯔빙글리의 많은 추종자들이 유아세례를 너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렇게 행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까지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비록 “선택”이나 “무조건적인 선택”에 관해 뜨거운 신앙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주권적 선택마저도 그들의 지도자들이 물을 뿌려 베푸는 세례에 조건 지워진다고 믿는 셈이다. 오늘날 개혁교회나 카톨릭 교회의 실상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들이 거룩하다거나 진지하다거나 심지어는 분별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1618년 도르트에서 열린 노회에서는 117명의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13명의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심판을 받았고 유죄를 선고받아 (그밖의 다른 선고는 없었을 것이 뻔하다) 그들의 “성직”을 박탈당했다.
주님께서는 한 아르미니안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사역을 통해 영국 최대의 부흥을 일으킴으로써(1740- 1790)앞선 칼빈주의자들의 횡포에 일침을 놓으셨다. 이 기간 동안 영국과 화란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쇠락일로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샘 죤스(1847-1906), 밥 죤스 Sr.(1882- 1968), 밥 슐러(1800-1970), 피터 카트라이트(1785-1872) 등은 다 “아르미나안”이었다. 한편 20세기의 배교자중 가장 극악한 자들 두사람인 필립 샤프와 루이스 버코프는 “칼빈주의자”였다.
온건한 칼빈주의야말로 가장 정확한 교리라고 가장 위대했던 전도자 중의 하나였던 (비록 최고의 전도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휫필드의 말처럼 챨스 스펄젼도 칼빈의 5대 강령에 대해서는 1년에 한 번의 설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스펄전이 자신을 순수한 칼빈주의자라고 하긴 했지만, 그 자신은 칼빈이 구원에 관해 믿는다고 고백했던 그 내용을 공개적으로 강조할 만큼 분별력이 없지는 않았다. 챨스 스펄젼의 설교집 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스펄젼의 설교에서 강조한 것이 무었이었던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000개가 넘는 설교 중에서 칼빈의 5대 강령에 관해서는 10개도 채 배당하지 않았다.
“주권적 하나님”(성경적 용어가 아님)이나 “주권적 은혜”(성경용어가 아님)를 입을 열때마다 언급하는 사람들은 요나단 에드워드, 스펄젼, 이언 페이슬리, 죠지 휫필드 등을 그들의 모델로 삼고 있다고 떠들어봐야 실제로 이들과는 전혀 닮은데가 없다.

렐리오 소시누스

소시누스(1525-1562)는 이탈리아 시엔나 출신의 배교한 로마 카톨릭으로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할 때 세르베투스를 위해 옹호했던 사람이다. 소시누스는 아리우스파로서 칼빈이나 세르베투스 둘다 옳지 않다고 보고 유세비우스의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입장때문에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파우스토 소찌니(1539-1604)는 후에 폴란드에서(1605) “소시니안 운동”을 일으키고 전파했다. 현대의 유니테리안 교회는 오늘날 유럽을 장악할 목적으로 공산당을 이끌고 있는 “정통” 카톨릭 교황(1979)으로 대표되고 있는 폴란드에서 유래한 소시니안주의자들의 직계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시니안주의는 1978년 과야나 대학살을 일으켰던 짐 존스가 가르쳤던 것과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선행을 통해 영생을 얻으심으로 우리로 그를 따르게 하시는 모범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선행”(즉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함으로써)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짐 존스에게 있어서의 선행이란 인종적 평등, 시민의 권리, 사회정의, 통합 및 그밖의 의회나 T.V. 혹은 연합통신 등이 추진하는 그런 형태의 선행 등이었다. 개혁주의자들과 예수회는 즉각 침례교와 재침례파가 소시니안주의와 연루되었다고 비방하였는데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교회사적으로 보아 그 불순한 동기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것이다. 위선자들은 성경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알리바이도 갖다대기 마련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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