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철학자 무리들(150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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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4월호>

우리는 허튼 소리를 일삼는 철학자 무리들을 한꺼번에 다루고자 한다. 이는 이들 중 그 누구도 교회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2장 8절(최종 권위를 갖고 있는 무오한 텍스트임)은 이미 성도들에게 “허튼 소리의 전문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보여주었고 고린도전서 1,2장도 그 사실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행17:18 참조). 철학자들에 관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근대 서양철학은 킹 제임스 성경이 출판될 때까지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셀름(Anselm), 아블라드(Abelard), 스코투스(Scotus), 아퀴나스(Aquinas) 등과 같은 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탕에 불과한 반면,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이 출판되자 철학계에는 이변이 발생하게 된다. 즉 유럽과 영국의 곳곳에서 그 성경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일련의 지식인 무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온 것이다. 그 중 일부는 고고학자들이요, 일부는 불가지론자, 일부는 이신론자, 또 일부는 합리론자, 혹은 심리학자였으나 이들 모두는 철학을 전공한 자들이다. 이들은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의 출판이 마치 달리기 시합의 출발신호인 양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현대 사학자들은 왜 그들이 1611년 이전에는 숲속에 숨어 있었던가를 의아하게 생각할런지 몰라도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들을 간단히 열거해 보고자 한다.

1. 르네 데카르트(1596-1650)

데카르트는 킹제임스성경 초판이 나왔을 때 15세였다. 그는 실제의 천국과 지옥,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격, 거듭남, 육체의 부활 등을 거부했다. 그는 로마 카톨릭에 헌신했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합리주의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그의 철학체계를 꿈에서 힌트를 얻어 세웠으며, 성경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아버지로 300년 동안이나 군림해 온 그가 실은 킹제임스성경을 갖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신자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2. 토마스 홉스(1588-1679)

홉스는 킹제임스성경이 나오기 23년 전에 태어났다. 이 성경은 그의 일생 내내 영국과 미국의 성경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열을 내며 이 성경을 미워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무신론적 유물론자였으니 막스와 레닌의 선구자였다. 그는 성경에 관한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인 것도 거부했다. 즉 그는 인간기계에 불과했다.

3.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쯔(1646-1716)

라이프니쯔는 이신론적 진화론자로 희랍 철학자들을 우상시했던 자이다. 그의 ‘신’은 ‘모나드’라는 단자였다. 그는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중생, 육체의 부활과 미래의 상태를(그것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간에) 믿지 않고 거부했다.

4. 죠지 버클리(1685-1753)

버클리는 이신론자로 물뿌림에 의한 중생을 믿었던 자로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스도의 심판석, 휴거, 그리스도의 천년통치 등을 거부하였고, 그 누구도 실제로 지옥에 간다고 믿지 않았다.

5.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

베이컨은 “귀납적 과학 방법론”을 창시한 자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참된 철학의 시금석은 철학이 하고자 하는 바 그것이라고 (즉 그처럼 사람을 감옥에 쳐넣는 것) 말한 후 뇌물 및 부정 혐의로 벌금형과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공리주의자로 과학적 실용주의를 내세웠고 후에 듀이, 러셀 그리고 제임스 등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들을 뒤이어 등장하는 “허튼 소리 당원들”(진 리마르크, 꽁뜨, 볼테르, 루소, 데이비드 흄, 제리미 벤담, 존 밀, 허버트 스펜서, 헉슬리, 쉴러, 스트라우스, 레싱, 슐라이어마허, 괴테, 쇼펜하우어, 피히테, 볼프, 칸트, 니체, 쉘링, 포이에르바하, 헤겔 등)은 앞으로 1700-1900년의 시대를 다룰 때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때로는 “이신론자”, 때로는 “합리주의자”로 불리웠으나 모두 다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로마 카톨릭 사제, 주교 및 대주교 등과 매우 유사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자신들의 나라든 남의 나라든 표준원문 성경은 그 어떤 번역이라도 철저히 거부해 버린 점이다. 이들은 그들의 아비(창3:1)에 의해 양육된 엘리트 그룹으로 옥스포드, 캠브리지, 하이델베르크, 소르본느, 슈트트가르트, 할레, 로마 및 파리 대학에서 알렉산드리아 이단의 가르침을 촉진시킨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후 시대에 있어 “문화”를 추종한 배교자들이다. 이들과 더불어 복음전파-교육-문화-배교라고 하는 교회사의 악순환은 여지없이 되풀이된 것이다.
모든 철학사라고 하는 것은 (페리클레스, 고르기아스, 아리스티푸스, 제논, 크리시푸스, 카르네아데스, 플루타크, 호머, 피타고라스, 헤라클리투스, 아낙시메네스, 크세노파네스, 알카메온,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반교회사인고로, 우리는 철학사에 더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다. 페리클레스로부터 20세기의 싸르트르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신약 지역 교회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고르기아스로부터 틸리히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신약 지역 교회의 구성원이 아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들은 “사교단체”나 “정신 건강 증진 협회”의 회원이었다고나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철학자들의 “위대성”에 대해 성령께서는 그들은 무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고전1,2장) 그들의 “지혜”를 사용했을 뿐이며, 특히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음을 간단히 지적하실 뿐이다(고전1:21; 3:19). 교회사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이 경건한 불신자들의 무리가 A.D.325년부터 1611년까지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 위대하고도 교육수준이 높은 배교자들의 길을 예비한 사람들은 바로 1500년과 1700년 사이에 “문화(文化)”에 종사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안드레아스 마시우스가 쓴 여호수아에 관한 작품(1574)과 칼슈타트가 정경에 관하여 쓴 책(1521)을 시발로 하여 1611년 이후 두 작품이 나왔는데, 하나는 페레리우스 신부가 쓴 조직신학이요, 또 하나는 디프 출신의 리차드 시몬(Richard Simon) 신부가 “신약 저자들의 문체”에 관하여 오리겐적 입장에서 쓴 책이다. 이 두 로마 카톨릭 학자들은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을 몹시 증오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펠(Fell)의 성경변개 시도(1675), 왈톤의 변개(1657), 밀스의 변개(1707) 등이 이어졌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킹 제임스 성경에 사용된 헬리어 표준원문을 대체하기 위한 꿈을 품고 희랍어 성경을 출판해 냈다. 비록 그들은 실패했으나 그들의 추종자들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니 이들을 뒤이어 토이나드(Toinard, 1807), 벤틀리(Bentley, 1720), 매이스(Mace, 1729), 벵겔(Bengel, 1734), 썸러(Semler, 1765) 등이 나왔고, 라흐만(Lachmann, 1850), 그리스바흐(Griesbach, 1805), 하우드(Harwood, 1776), 슐츠(Scholtz, 1830), 알터(Alter, 1878) 등을 위해 멋진 드라마를 연출해 냈다. 이 올스타팀 멤버들은 오늘날 바이스(Weiss), 메이첸(Machen), 티쉔돌프(Tischendorf), 와필드(Warfield), 밀러(Miller), 로버슨(Robertson), 웨스트(Wuest), 웨스트코트(Westcott), 홀트(Hort), 렌달(Rend- all), 조다이츠(Zodhiates), 예이거(Ya-eger), 앤더슨(Anderson), 그리고 샤프(Schaff) 등의 이름 하에 전 미국의 신학교와 대학교 강단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3세기 동안의 비합리적인 망상이 어떻게 축적되어 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존 번연(1628-1688)

천로역정의 저자는 영국의 침례교도로 친카톨릭 역사가들은 그를 “청교도”라고 잘못 부르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 분별없이 살다가 16,혹은 17세에 군에 입대하였으나 경건치 못하고 세속적인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군에서 제대 후 그는 땜쟁이가 되었고 세련된 그리스도인 아가씨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결국 그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다. 1655년 침수에 의해 침례를 받은 그는 벧포드 침례교회(청교도가 아님)에 합류했다. 그의 아내는 네 명의 아이를 남기고 죽었으며 그는 4년 후 재혼하였다. 번연은 1660년 허가장 없이 그리고 감독의 허락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어 1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672년 사면령에 의해 풀려난 그는 다시 설교하기 시작하였으며 1675년 몇 개월 간 감옥에 갇힌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설교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천로역정은 여전히 읽히고 있으며 한때는 가장 유명한 책 10권 중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즉 성경과 팍스의 “순교사”를 빼고는 번연의 이 알레고리 작품이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었던 것이다.

요한 하인리히 벌링거(1504-1575)

벌링거는 그의 기독교적 태도에 있어 모든 개혁자들 중 가장 합당한 인물이다. 그는 루터처럼 너무 과격하지도 않았고 쯔빙글리보다는 복수심이 덜했고 칼빈보다는 더 성경적이었다고 할 수있다. 그는 스위스의 매우 존경받는 결혼한 사제의 아들이었다. 쯔빙글리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벌링거는 그를 이어 쥬리히에서 “위대한 사역자 교회”(Great Minister Church)의 목사가 되었다(1531). 1536년 그는 “스위스 신앙 고백”(Helvidic Confe- ssion)의 작성을 도왔는데 이는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들 간에 교리적 논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벌링거는 확고한 개혁가로 칼빈과 쯔빙글리와 손잡고 카톨릭과 재침례파를 반대했으나 칼빈이나 쯔빙글리와는 달리 그들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양 그룹에 반대하긴 했어도 벌링거는 (모든 침례교도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감옥에 가거나 살해당하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

파스칼은 우리가 소위 “신비주의자”(토마스 아켐피스, 시엔나의 캐더린 등)라고 부르는 뜨겁지도 차겁지도 아니한 카톨릭에 속했던 자로 “얀센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카톨릭교회 내의 복음적 그룹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얀센주의자들은 아퀴나스적 해석 방법 대신에 어거스틴의 성경해석법에 더 치우친 자들이었다. 사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나 둘 다 그리스도인을 죽인 이단들로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는고로 얀센주의자들 역시 올바른 성경해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겠다. 이 운동은 코르넬리우스 얀센(1585-1638)이라는 프랑스의 루뱅 출신의 교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쓴 <어거스틴>이란 책은 그저 칼빈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가르칠 뿐으로 당연히 예수회가 나서서 그들의 신학을 반대하였다.
파스칼은 1654년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후 성경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는 란 책을 썼는데(1657), 이 책에서 그는 예수회를 공격했다. 이에 교황이 곧바로 이 책을 비난하고 나서 파리에서 발견된 그의 책 모두를 불태워 버렸다. 루이 14세는 “모든 얀센주의자”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파스키엘 케스넬은 교황 클레멘트 11세가 교황칙서로 (1713) 그의 모든 책을 금지시키자 화란으로 도주하였다. 파스칼은 죽기 전 “팡세”로 알려진 몇 편의 경건 수상집을 썼으며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3년간을 은퇴하여 신비로운 베일 속에서 보내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카톨릭 세력이 그가 화형당하지 않은 채 공개적으로 성경을 설교하고 나서기에는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루이 14세는 여러분이 기억하듯이 “태양왕”으로 프랑스에서 위그노를 모조리 몰아낸 자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자녀들을 “참된 신앙 안에서” 키워야 한다는 구실 하에 카톨릭교도에게 넘겨준 자였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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