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시대의 표적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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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3월호>

우리는 유럽에서의 필라델피아 교회(계3:8) 시대의 전반부(1500-1700)를 요약해 줄 수 있는 몇 사람의 생애를 살펴 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생애를 고찰함으로써 그들을 올바른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시대적 배경, 즉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 불어 닥친 영적 사망의 현상들을 파악할 수 있다. <편집자 주>


메노 시몬즈
(Meno Simons, 1496-1559)

메노 시몬즈(때론 시몬이라고도 함)는 화란의 비투마루스에서 태어나 1524년 카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531년 화형당한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와 함께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수도원 복도에서 수백 명의 침례교도들이 살해 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그 중에는 메노의 형제도 끼어 있었다. 결국 메노는 사제직을 포기하고 1536년 40세의 나이에 카톨릭 교회를 떠났다. 그는 곧바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수개월 후에는 칼빈이나 쯔빙글리마저도 신약성경의 진리에 관한한 로마 교회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있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자동적으로 사법당국으로부터 “도망자”가 된 셈이었다. (즉 로마 카톨릭의 체포 대상이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카톨릭 게슈타퍼와 암살자들을 피해 일생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녀야 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책을 저술했다.
모쉐임(Mosheim)은 메노와 함께 했던 화란의 침례교도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기원이 분명치 않다.”고 했으나 더몬트(Dermont) 박사와 이페이(Ypeig) 박사는 이 문제에 관해 화란의 국왕에게 보고하기를 “침례교도들은 전에는 재침례파로 불리던 자들이요, 후에는 메노파로 불렸던 자들로 그 기원은 왈덴파(왈덴시스)입니다.”라고 했다. 켈러(Keller), 텐 케이트 림볼크(Ten Kate Limborch), 밴 브랫트(Van Bracht), 더몬트(Dermont) 및 디홉(DeHoop) 등의 연구에 따르면 종교개혁 기간 중 개혁자들에 의해 “재침례파”라고 불리운 사람들은 11,12세기 경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그리고 화란으로 도피해 갔던 그 옛날의 왈덴시안스였다고 한다. 이들은 노바시안, 도나티스트, 유카이트, 폴리시언 등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아세례의 거부,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후에 침수에 의해 어른에게만 침례를 주는 것 등이다. 그들은 또한 14세기 동안이나 소위 불경건하다고 알려진 “마니교”의 ‘이단’ 요소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우주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세력이 서로 반목하고 있으니 마귀도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교회, 성경, 설교자, 사역자, 사도, 및 회중들을(고후 11:1-4)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신적인 카톨릭 교도들은 이 주장을 “이원론”이라고 비난했으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평가한다(살후2:1-13; 겔14: 1-12; 고후11:11-14).

제임스 왕 1세
(King James, 1566-1625)

로마 카톨릭 역사가들의 주 공격대상이 마틴 루터, 헨리 8세 및 올리버 크롬웰이라면 개신교(특히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의 희랍어와 희브리어 학자들이 가장 미워하는 영국역사의 인물은 다름아닌 스코틀랜드의 왕(1567-1603)이었다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오게 된(1603-1625) 제임스 왕이다. 제임스 왕은 “근본주의”자들로부터 폭군이라는 칭호를 시작으로 호모(동성연애자)라는 칭호에 이르기까지 온갖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가장 높으시고 능력이 많으신 군주”(most high and mighty character)가 - 편집자 주 : 이 칭호는 킹 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서문에서 제임스 왕을 불렀던 칭호였다. - 이와 같이 모욕적인 칭호들을 얻게 된 것은 그의 성격이나 인품, 혹은 청교도의 학대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책인 킹 제임스 성경과 그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이야말로 출간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히브리어, 헬라어 학자들이 없애 버리려고 애쓰고 있는 바로 그 책이다. 이 킹 제임스 성경이 얼마나 강력하고 권위가 있는지 이 성경이 가르쳐지거나 설교되는 곳에서는 신약 지역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복지와 사회개혁이 단행되었고, 과학, 기술, 예술, 음악 등이 발전하고 꽃피웠으며, 킹 제임스 성경을 거부한 지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많은 히브리어, 헬라어 근본주의 학자들이 이 권위 있는 성경과 제임스 왕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인해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킹 제임스 성경은 소위 “개신교의 교황들”(카톨릭 교황은 물론)이라고 자처하는 그들, 즉 스스로를 성령보다 더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늘 두려움과 사망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제임스 왕이 청교도들의 “1000가지 청원”에 대해 취한 반응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제임스 왕이 “장로교는 하나님과 마귀에게 뿐만 아니라 군주제에도 동의한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를 비방하는 외골수 고집쟁이들은 (어떻게든 흠을 찾아내기 위해) 그와 같은 선언을 제임스 왕이 신약에 나타난 지역교회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그러나 제임스 왕이 말한 장로교란 제네바에서 칼빈이 실시한 신정정치같은 개혁교회를 지칭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군주제”로 로마에 있는 교황제도가 한 나라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제임스 왕은 교황보다 영적으로 앞서 있었던 셈이다. 그가 올바른 통치자로서 어떤 실수가 있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는 그 당시의 어떤 교황보다도 더 겸손했으며, 오늘날의 그 어떤 보수주의 성경학자들 보다도 지적으로 우수했다. 다음의 예를 통해 이를 입증해 보자.
1. 제임스 왕은 청교들의 집회를 허용했고, 반 카톨릭 성경 번역본을 내놓았는데 그 서문에는 교황을 “죄의 사람”이라고 선언했다. 이후에 나온 그 어떤 개정본이나 “라크만 재단”(Lackman Foundat- ion)이 만들어 낸 성경에도 그와 같은 지적은 없다.
2. 제임스 왕은 뉴스코필드 성경 편찬위원회나(1950-1980) 라크만 재단(1960- 1980)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그는 가짜 성경 원문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따라서 새국제역본(NIV), 미국표준역본(ASV), 새미국표준역본(NASV), 개역 한글판, 표준 새번역 및 이들과 유사한 그 어떤 번역본에도 그의 이름은 관련되지 않았다. 제임스 왕은 이 20세기의 번역본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수회 림즈 역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3. 그가 “교만”하다는 온갖 풍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의 교황들처럼 자신을 “거룩한 아버지”나 “그리스도의 대리자”(혹은 거룩한 주)라고 부르라고 할 정도로 미친 것은 아니었다. 즉 제임스 왕은 그가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로마 교황이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보다(레오 1세부터 10세까지) 두 배 이상 겸손했다.
4. 영국을 30년 전쟁에 개입시켰다고 하면서 그의 “어리석은 국가 경영”을 비난하지만 그는 미국을 제 2차 셰계대전에 개입시킨 루스벨트나, 미국을 한국전쟁에 개입시킨 트루만이나, 독일을 세계대전에 개입시킨 히틀러나, 미국을 피그만 사건에 개입시킨 케네디나, 미국을 베트남 전쟁에 개입시킨 교황 피오 12세보다 훨씬 국가를 잘 다스렸다고 할 수 있다. 약간의 유머 감각을 갖고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람들의 참된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17세기에 살았던 제임스 1세는 그가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라도 20세기에 살고 있는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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