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카놋사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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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8월호>

이제 세계사에서 요란했던 십자군의 마지막 모습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네번째 십자군전쟁(1200-1204)은 예루살렘에 라틴왕국을 세우는 대신에 그리스 정교회와 그 제국을 전복시키기로 결정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예루살렘을 대신한 차선책이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로마 카톨릭은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많은 물건들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스테판의 머리, 가시관의 가시, 마리아의 허리띠,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이 두르셨던 수건, 침례인 요한의 한쪽 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넣었던 도마의 손가락, 야고보의 머리, 주님이 흘리신 눈물,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진짜 피...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다섯번째는 1229년에 프레드릭 2세의 지휘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자기의 결정권이 교황보다 더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이슬람교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레드릭을 파문시켰다.
마지막 십자군 전쟁은 1248-1270년에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 10세는 헛되이 또 한 번의 십자군을 일으킨 것이다. 1289년 트리폴리가 점령되고 에이커(Acre)는 1291년 이슬람교도들에게 포위되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되어갔다.
샤를마뉴의 악행을 흉내내는 우르반의 호소 이후 무절제한 십자군 전쟁에 대해 광신적인 로마 카톨릭 교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외침은 마치 이슬람교도들이 외치는 “알라신의 뜻이다”와 같은 것이었다. 이백 년에 걸친 전쟁은 “알라신”을 샤를마뉴의 가짜 하나님이 되게 한 것이다.
반(Anti) 교회사는 샤를마뉴, 우르반, 십자군을 하나같이 세계 역사의 주요한 주제로 묘사한다. 이들 역사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여러 주인공들이 있다. 독일 왕 헨리 3세(1039-1056)는 1046년애서 105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1046년 로마로 가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3명의 적들(실베스터 3세, 베네딕트 9세, 그레고리 6세)을 끝장내기 위해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시몬 베드로에게서 내려온(?) “사도직의 계승자”를 배후로 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한 모든 일은 잘 되어나갈 수 있었다. 헨리는 교황 클레멘트 2세를 높은 의자에 앉혔고, 이 호의에 보답하고자 클레멘트는 즉시 헨리 3세를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황제”라 하여 그에게 관을 씌웠다. 서로 등을 뛰어 넘는 이 놀이는 관련된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며, 헨리에게 다음 번의 네 명의 교황을 임명하게 하였다.
헨리 4세(1050-1106)는 헨리 3세의 계승자로 프러시아 태생의 독일 왕이었다. 그는 1075년 색슨을 정벌하면서 자기에게 주교, 수도원장, 대주교 등을 임명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 헨리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래서 교황이 그를 파문시키겠다고 위협하자 헨리는 윔즈 종교회의(1076)를 소집하여 교황 그레고리를 마법사, 반역, 불순, 마귀와 약속을 맺은 자라는 이유로 파문시켰다.
그 다음 날엔 그레고리(역사가들에게는 ‘힐데브란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가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파문시켰다. 위선적인 그레고리는 마태복음 16:18을 인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를 성경대로 믿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를 원했다. 또 그는 윔즈에서 헨리와 만났었던 독일 및 이태리 주교들을 교회로부터 추방시켰다.
이때에 모든 독일의 국민들은 A.D.800년 크리스마스 날에 샤를마뉴가 당한 일을 기억하며 왕좌에 왕을 앉힌 그 사람이 왕을 파문시킬 수도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왕에게 왕관을 씌우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권한은 분명히 그레고리에게 있게 된다. 그 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그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헨리의 국민들은 어떠한 성경적 권위나 성경구절이나 성경의 가르침, 진리와는 상관없이 자신들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헨리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교황에게 복종해야만 했다. 헨리는 12개월 내에 사면을 요구하든지 왕관을 몰수당하든지 결정을 해야 했다. 헨리는 격노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헨리는 아내와 아들과 종 한 명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태리에 있는 도시 카놋사(Canossa)까지 갔다. 거기서 그는 교황이 금지령에서 자기를 풀어 준다면 거룩한 교황에게 복종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레고리는 헨리가 독안에 든 쥐라는 것을 알았기에 헨리에게 사면을 내리는 것을 거절했다. 헨리가 모든 왕들은 교황에게 왕관을 바쳐야 한다고 고백할 때까지 사면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헨리는 땅에 엎드려 삼일 동안 교황의 대문을 두드렸다. 그는 맨발이었으며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눈 속에서 벌벌 떨며 있었다. 삼일 후 문이 열렸고 헨리는 자기의 “은혜자”에게 애원하고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살려주세요, 거룩한 아버지, 살려주세요.” 거룩한 아버지는 그 ‘아기’를 용서했고, ‘사도의 축복’과 ‘바알의 미사’를 그에게 행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몇가지 경고를 한 뒤에 헨리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이 메스꺼운 일의 결과로 독일과 이태리에선 내전이 일어났다. 헨리와 스와비아(Swabia)의 공작, 루돌프 사이의 피튀기는 싸움이 삼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후 그레고리는 관대하게도 루돌프에게 독일을 주었으며 자기 자신은 이태리를 차지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30명의 독일과 이태리 주교들이 신속하게 티롤(Tyrol)의 브릭센(Brixen, 1080)에서 만나 27명의 주교가 서명하여 그레고리를 교황의 권좌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이번에 헨리는 장난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명의 종 대신 군대를 동반하고 알프스를 넘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늙고 두 얼굴을 가진 Trouble maker를 체포하여 형무소에 감금했다(1084). 감옥에 갇히는 것은 그레고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다. 이 더럽고, 늙은 위선자는 어거스틴만큼이나 경건하고 착실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악인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악에 동의하느니 차라리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했다.
이제 헨리는 로마를 정복한 후 베드로의 권좌에 위버트(Wibert)를 앉히고 늙은 그레고리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팽개치게 했다. 얼마 후 그레고리는 몽둥이로 헨리의 뼈는 부러뜨릴 수 있을망정, ‘명성’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도와줄 위스카드(Wiscard)라는 노르만 대장을 불렀으며, 위스카드는 사라센인과 롬바르드인을 포함한 3만 명의 보병과 6천 명의 기병을 동반하고 도착했다. 그는 안전하게 교황을 석방시켰으나(1084년 5월) 그레고리의 전략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위스카드와 그의 군대는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의 후원자들이 마치 자기들의 적인 양 수없이 강간하고 살육했다. 또한 수천 명의 착한 카톨릭 신자들을 노예로 팔아먹었다.
살레노에 유배되어 있던 교황 그레고리는 그때도 헨리에 대해서 파문과 저주를 선포하였다. 로마에서 자기 백성 수백 명에 대한 강간, 절도, 살해와 이태리 밖에서 수천 명의 독일인에 대한 죽음과 파괴가 있은 후에 그레고리는 말하기를 “나는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나는 유배되어 죽는다.”라고 했다. 거짓된 아첨꾼 중의 하나가 그에게 말하기를 “아니오, 당신은 유배지에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그의 사도들은 유업으로 모든 민족을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버린 악당은 시편 2:8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약속을 도둑질했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 왕국에서 이루어질 약속이다. 이 약속을 권력에 미친, 이기적이고, 사형에 처할 만한 죄인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이러한 것은 바로 어거스틴을 성경학자로 취급하는 타락한 광신자들이 택하는 방법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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