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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7월호>

아프리카에서도 심한 폭력을 동반한 박해가 위세를 떨쳤으며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다음은 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사람들의 행적이다.
카르타고(Carthage)의 감독이었던 씨프리안(Cyprian)은 교회의 광채를 더해주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언행은 우아하고 겸손하였으며, 그는 참으로 경건하고 예절바른 설교자였다. 젊어서 그는 이교도의 교리로 교육받았으며, 막대한 재산가였고 모든 화려함의 극치 가운데서 생활하였다. A.D.246년에 카르타고의 목자였던 코에실리우스(Coecilius)에 의해 개심한 그는 침례받기 전에 성경을 매우 주의 깊게 공부하였으며,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에 크게 충격을 받고 기록되어 있는 명령을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침례에 뒤이어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였으며, 자신은 매우 소박한 차림새에 궁핍의 생활을 하였다. 그의 미덕과 선행은 광범위하게 칭송되었고 A.D.248년 도나투스(Donatus)가 죽자 그는 거의 만장일치로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씨프리안의 영향력은 카르타고 뿐만아니라 누미디아(Numidia)와 머리타니아(Mauritania)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만장일치만이 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사역에 있어서 형제들의 조언을 구했다. “감독은 교회 속에, 교회는 감독 안에”라는 그의 말은 격언이 되었고, 그러한 일치됨은 목자와 양들간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만이 유지될 수 있었다.
A.D.250년에 씨프리안은 데시우스(Decius) 황제에 의해서 그리스도인 감독 코네실리우스 씨프리안이란 이름으로 추방당하였다. 그 이교 로마는 “씨프리안을 사자들에게, 씨프리안을 맹수들에게 던지라”고 부르짖었고 씨프리안은 주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한 후 그는 그의 양들에게 30회에 걸쳐 경건하고 향기로운 서신을 보내 그들을 돌보았다. 박해의 위세가 조금씩 가라앉자 그는 칼타고로 돌아와 교회 내의 위험스러운 견해들을 없애는데 그의 모든 힘을 기울였다.
칼타고에 무시무시한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늘 그렇듯이 그 책임이 교회로 돌아갔으며, 그 역병에 대한 교회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씨프리안의 편지에 행정관료들은 다시 교회를 차례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A.D.257년에 씨프리안은 다시 칼타고로 돌아왔으나 정부 관료에 의해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A.D.258년 10월 14일에 목잘려 순교당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씨프리안의 제자들은 루시우스(Lucius), 플라비안(Flavian), 빅토리쿠스(Victoricus), 레무스(Remus), 몬타누스(Montanus), 쥴리안(Julian), 프리메루스(Primelus)와 도나티안(Donatian) 등이 있다.
우티카(Utica)에서는 가장 잔인한 비극이 발생되었는데, 3백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불타고 있는 가마에 둘러 세워져서 쥬피터를 경배하지 않으면 불타는 가마 속으로 던져지는 무서운 명령이 지방 총독에 의해 내려진 것이 그것이다. 그곳의 모든 형제들은 쥬피터에게 경배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 가마에 뛰어들었다.
스페인 타라곤(Tarragon)의 감독 프루투오수스(Frutuosus)와 그의 두 집사 어거리우스(Augurius)와 율로지우스(Eulogous)도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불태워졌다.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알렉산더(Alexander), 말쿠스(Malcus)와 프리스쿠스(Priscus)는 한 여인과 함께 자진하여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힘으로써 호랑이에게 던져지는 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선고는 곧이어 집행되었다.
투버가(Tuburga)의 세 처녀인 막시마(Maxima)와 도나틸라(Donatilla), 세쿤다(Secunda)에게는 쓸개와 식초를 마시게 한 후 채찍으로 때리고 교수대에서 고통을 주고 맹수들로 위협하다 결국 참수하였다. 그러나 A.D.260년 발레리안 황제의 뒤를 이은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통치하는 동안은 몇 명의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교회는 수 년 동안 평안한 기간을 구가하였다.

아우렐리안(Aurelian) 통치하에서의 아홉번째 박해 A.D.274년
이 때의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로마의 감독이었던 펠릭스(Felix)를 거명할 수 있다. 그는 A.D.274년에 로마 감독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참수당하였다. 젊은 그리스도인이었던 아가페투스(Agapetus)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매우 신실한 형제였으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명으로 붙잡혀 많은 고문을 받은 후 로마로부터 하룻길 떨어진 곳인 프레네스테(Praeneste)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들이 이 기간에 순교당한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기록에 남은 사람들이다.
아우렐리안의 뒤를 이어 타시투스(Tacitus)가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프로부스(Probus)가 그리고 그 후에 카루스가 뒤를 이었다. 이 황제가 벼락을 맞아 죽자 그의 두 아들인 카르니우스(Carnious)와 누머리안(Numerian)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들이 집권한 동안 교회는 평화스런 기간을 갖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이 A.D.284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던 초기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286년 그가 막시미안(Maximian)과 연합하면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기 전 죽음에 처해졌다. 이들 중에 펠리시안(Felician)과 마르셀리아누스(Marcellianus) 형제가 있다.
마르쿠스와 마르셀리아누스는 쌍둥이였으며 로마인으로서 귀족의 자식이었다. 그들의 부모들은 이교도인이었으나 그들을 교육한 가정교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끈 주 안의 형제였다. 그들이 이교 로마인이 되기를 열렬히 기원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견고한 신앙에 누그러졌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비난하던 부모와 다른 모든 가족들이 개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교 로마는 이들을 기둥에 묶고 못들을 밟게하는 등 많은 고문을 가하였고 이들은 그 고통으로 순교하였다.
감옥 간수의 아내였던 조에(Zoe)도 그들에 의해 개심하였다. 그들은 그녀의 발밑에 짚으로 불을 지피고 나무에 매달았으며 그녀의 몸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강에 떨어지게 하였다.
A.D.286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발생하였다.테비아스(Thebias)에서 일어난 군대라고 하여 테반군단이라고 불렀던 군단에는 6660명의 군인이 있었는데 이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막시미안 황제로부터 버간디(Burgundy)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골(Gaul)로 행진할 것을 명령받아 마우리티우스(Mauritius)와 캔디두스(Candidus), 엑수페르니스(Exupernis)의 지휘 아래 진군하고 있었다. 이때 막시미안은 그들에게 이방신에게 숭배할 것과 골에 있는 기독교를 박멸하는데 참여해야 할 것을 명령하며 이 일에 충성을 선서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에 대해 경각심을 가진 테반 군단의 각 개인들은 이 두 가지 명령을 완전히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막시미안은 열 명 가운데 한 명씩 죽이는 명령을 내려 그들을 칼로 처형하였다. 이 피의 명령은 곧 집행되었으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두번째 이 명령이 내려졌을 때 또다시 열번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두번째 명령은 첫번째 보다 그들에게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불굴의 정신과 자신들의 신조를 지켰으나 그들 상관의 조언에 따라 황제에게 충성스런 진정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이것이 황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의 확고부동함과 일치함에 격분한 왕은 전체 군인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 명령은 점차적으로 다른 군대에까지 퍼져나가 집행되었다. 그들 모두는 A.D.286년 10월 22일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하였다.
영국에서는 헤르트폴트쉬어(Hertfor- dshire)의 성 알반(Alban)에서 그 이름을 딴 알반이 첫번째 순교자였다. 영국은 최초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던 루시우스(Lucius)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루시우스는 원래 이방인이었으나 암필바루스(Amphibalus)라는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개심하게 되었다.
존경할만한 형제 베데(Bede)는 알반이 순교할 때 그 집행자였다. 그때 그는 돌연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이 알반을 대신하여 죽거나 또는 함께 순교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은 알반과 베데의 목을 잘라 참수시켰다. 이 일은 A.D.287년 6월 22일 베룰람(Verulam)에서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콘스탄틴 왕 당시의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대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현재의 이 교회는 섹슨 전쟁(Szxon wars) 때 파괴된 것은 메르시아(Mercia)와 오파(Offa)에 의해 재 건축된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프랑스 엑큐타인(Acquitain)의 그리스도인 자매인 페이드(Faith)는 A.D.287년 기름가마에 던져진 후 참수당하였다. 큐틴(Quintin)은 로마 사람으로서 루시안(Lucian)과 함께 가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미엔스(Amiens)에서 설교했으며 이후에 루시안은 뷰마리스(Beaumaris)에 갔다가 순교하였다. 큔틴은 피카르디(Picardy)에 남아 매우 열정적으로 사역하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그들은 그의 정강이가 끊어질 때까지 잡아당겨지고 채찍으로 때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했으며 벗긴 몸에 끓는 기름을 끼얹는 등의 고문을 행하였다. 큔틴은 이런 모든 고통을 당한 후에 A.D.287년 9월 31일 순교했으며 그의 몸은 소메(Somere)강에 던져졌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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