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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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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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2월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종교개혁을 통하여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 제시된 교리와 본을 따라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실행에 옮겼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직후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 있어 왔다. 개혁을 통하여 썪어빠진 로마 카톨릭의 둥지에서 많은 형제들이 빠져나오기 전에 이미 사도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이 형제들은 다른 기독교도들로 부터는 “극단주의자” 내지는 “분리주의자”라고 불리며, 카톨릭에 의해서는 “사악한 이단들”로 박해를 받았으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정신병자”, “광신자”로 불리기에 적절한 믿음과 행동을 소유했었다.
이들 성경대로 믿는 형제들의 피묻은 발자취를 추척하여, 종교개혁 이전에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신앙을 지켜왔는지를 살펴보겠다.
교회의 2,000년 역사 가운데서 이들 형제들을 찾아내기란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식별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안다면, 수백 가지의 색깔을 띄고 있는 다양한 신앙 노선 속에서도 그 “사악한 이단들”을 쉽게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태도이다. 이들 성경대로 믿었던 형제들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든지(노바티안, 도나티스트, 폴리시안, 보고밀즈, 불가리안, 카타리, 왈덴스, 알비겐스,위그노, 브레드런...)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는 공통된 입장을 가졌었다. 즉,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바”가 중요한 것이지, “무슨 의미”이며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가 우선시 되지 않았다. 현대의 배교자들처럼 자신들의 주장에 성경이 동의하고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성경 구절에서 단어들을 바꾸거나, 삭제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로 변개시키지 않았다. 이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도 전천년주의의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사악한 교리에 타협하지 않았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야만 이 땅에는 참된 평화와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천국”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챤 사회주의자들”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 없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천국”이루기 위해서 자신들의 시간을 쓰는 일들에(“환경운동”, “윤리실천운동”, “공명선거운동”, “순결서약운동” 등) 하나님의 귀한 시간들을 일분 일초도 낭비하지 않았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전파했다.
여기서는, 이 세상은 자기들의 살 만한 데가 못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곳에 마음을 두고 살았던 형제들의 발자취를, 그들이 불렸던 이름에 따라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 종교개혁 이전에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했음을 확인하겠다.

1. 몬타니스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121󰠅180)의 치리 동안에 자기들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몬타니스트”(Montanists)라고 불리우는 “거룩한 떠돌이”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남부 프랑스와 북아프리카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확고한 전천년주의자였으며 오리겐과 동시대 사람들이었는데, 오리겐이 전천년주의를 증오하였던 고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추종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 찍힌 그룹이다.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는 이들 그룹을 평가하는 것에는 신뢰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그가 오리겐과 어거스틴처럼 전천년주의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까지의 모든 교부들은 오늘날 우리가 “전천년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 교리는 “천년지복설”(chiliasm)이라고 불리웠다. 이 교리는 종말에 관해 다음 사항을 믿음으로 인해 인간의 성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였다. 인간은 천연적인 상태에서는 물론,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그의 본성에 있어 여전히 악하므로 아무리 많은 시간과 재원이 주어진다할지라도 하늘에서 처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룩할 수 없다.
따라서 신구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완전한 평화의 1000년 기간은 왕 중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왕으로서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가시적으로 육체적으로 재림하실 때에야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 분께서는 인간이 이 땅에 세워놓은 모든 형태의 종교적 정치적 정부를 모조리 파괴하실 것이요, 이 파괴는 아무런 자비를 베풂이 없이 잔인하게 행해질 것이다. 전천년을 전파한 증인들은 A.D.120에서 311년까지 중단없이 진리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오리겐은 이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유대인의 꿈”일 뿐이라고 했다. 오리겐은 A.D.235년 팔레스타인의 카이샤라로 이주했고 따라서 그 도시의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가 이 교리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거스틴, 칼빈, 제롬 역시 이 교리를 거부했다.
몬타니스트는 점차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성도 각 개인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도들의 가르침과 규례로 돌이키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세속화 되어 가는 교회와 타락한 당시의 풍조에 거세게 저항했으며 주님의 재림에 대해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2. 유카이트

로마 제국의 동쪽 끝 부분에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는데 교회사가들은 이 운동을 “극단적” 광신주의라고 무시해 버린다. 신약 성경 사본의 원본이 기록되었던 바로 이 지역에서는 “메살린”(Messalines) 혹은 “유카이트”(Euchites)라고 불리는 그룹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세상적인 것들을 용납하는 지역 모임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유카이트”란 용어는 영어의 “nonconformist”(비순응자)와 같이 무엇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유카이트들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침례를 받았을지라도 그가 구원받았을 때 그 사람을 다시 침례주려고 했다. 이 실행은 몬타니스트 그룹의 실행과 일치하였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분명한 믿음의 고백 없이도, 혹은 입으로만 고백하더라도, 분명한 개종의 증거가 없이도 마구 침례를 주었다. 더우기 유카이트들은 침례를 구원이나 개종과 동일시하고 마귀처럼 세상에서 살아가던 구원받지 못한 교회 회원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이들 초기 그리스 “퓨리탄”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때로는 그들이 이주해 갔던 지방의 이름을 따라 불리기도 했다(프리지안, 불가리안, 아르메니안 등).
역사에서 볼 때 이들 그룹은 사모사타의 바울이라고 하는 안티옥의 감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양자주의”(adoptionism)에 대한 그들의 비정통적 태도로 인해 이단이나 광신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이들 그룹을 특징지워 주는 것은 이들이 일반서신들 보다 바울서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폴리시안(Paulicians)이라고 불린 것이다.
A.D. 325년 이후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사탄적이라고 간주했으며 예배시 그 어떤 형상도 용납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가르치는 신학 이론들을 완전히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유카이트(혹은 메살린)들이 트라키아와 불가리아로 이주하였으며, 이들 이민자들로부터 폴리시안, 까따리 그리고 보고마일즈 등이 6세기간에 걸쳐 계승되었다. 까따리는 카톨릭 교회 내의 복음적 “청교도”들로 이들은 로마 교회가 계시록 17장의 음란한 창녀이며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있어서 보고마일즈와 의견을 같이하였다. 보고마일즈는 니케아 이전과 이후의 모든 “교부”들이 거짓 선지자였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였다.

3. 노바티안

A.D. 281년 경 노바티안이라고 불리는 그룹이 등장한다. 노바투스(Novatus)라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은 어린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노바티안 주의라는 이단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이들은 믿는 어른들만의 침례를 주장하였으며 지역 교회에서의 순수성의 유지를 위한 징계를 주장했다. 이들은 부도덕한 감독에 의한 그 누구의 침례도 거부했으며 박해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믿음에서 이탈한 사람이 주는 침례도 거부했다. 노바티안과 같이 카톨릭 교회와 완전히 결별한 그룹들은 그 어떤 조건하에서도 유아에게 침례 주기를 거부했다. 노바티안의 후손들은 500년 후에 “카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암흑시대 동안 카톨릭 교회에 남아 있던 유일하게 참된 정통 그룹이었다. 노바티안은 카톨릭의 입장으로 볼 때 이단적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회중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그것도 사도행전 2:38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마태복음 28:19󰠅20에서 발견되는 방식으로 침례를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단들” 중에는 아르메니안들(A.D. 350)이 있었다. 이들 그룹은 로마의 감독들과 장로들의 도덕적 삶에 잘못이 있음을 알고 카톨릭 교회를 이탈하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카톨릭 성인침례에 문제가 있으며, 유아세례에도 문제가 있고, 가장 타락하고 혐오스런 카톨릭 누룩들인 마리아 경배, 유품숭배,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독신주의, 희생제사로서의 “성체성사”, 침례에 의한 중생, 묵주, 크리스마스 트리, 부활절 토끼, 형상들, 촛불,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 등과 같은 수많은 거짓 교리들이 완전히 잘못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4. 도나티스트

마귀의 하수인인 콘스탄틴이 나오기 전의 황제는 디오클레시안(284󰠅313)이었다. 그는 “마니키안”이라고 불리는 그룹에 대한 위협으로 그의 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 군사 모두에게 국가 종교가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지낼 것을 명하는 칙령을 내리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 명령은 A.D. 303년 모든 지역 교회 목사들을 투옥하고, 모든 교회 건물들을 쓸어버리며, 모든 성경 필사본을 다 태우라는 칙령 직후에 내려졌다. 이때 성경을 이 독재자에게 넘겨준 자들은 “배반자”로 불리게 되었고, 이 일로 지역 교회에서는 또다른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분리한 자들이 역사가들에 의해 “도나티스트”(Donatists)라고 불리는 그룹들이다. 이들은 후대의 폴리시안, 알비겐스, 그리고 왈덴스와 관련이 있다. 도나티스트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유아 세례를 받아들였을 때 그 어떤 형태의 유아 세례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실행인, 어린 아이를 물에 담그거나, 물을 뿌리거나, 군인들의 머리 위에 젖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식으로 침례를 주고 있던 모든 의식을 거부하고 어른이 된 믿는 자들에게만 침례를 주었다. 침례에 의한 중생과 유아세례는 배교자들이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미 카톨릭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기 위해 전통으로 수립해 놓았었다. 도나티스트라고 불리던 그룹은(몬텐스라고도 불렸음)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하기 위해 누미디아 공회(A.D. 415)를 소집하기 전에 어른들을 “재침례”주었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다. 도나티스트들이 재침례를 주었다는 것은 첫 번째 침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온 세계에 선포하는 것이므로 어거스틴이 “유아”세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오직 참된 침례는 카톨릭 교회가 주는 물침례이며 그 이외의 모든 침례는 이단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재침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카톨릭 교회의 물침례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도 못하고 새로운 출생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선포하는 셈이 된다. 결국 카톨릭 교회는 갓난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물을 뿌림으로써 후일 아무도 이 아이를 “재침례”주지 못하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거짓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유아세례는 성경적일 뿐 아니라, 유아세례를 받은 어른을 다시 침례 주면 이단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A.D. 314년 카톨릭들은 태양숭배자 콘스탄틴으로 하여금 카톨릭과 도나티스트들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 순간부터 기독교에 베풀었던 콘스탄틴의 “관용”은 급작스레 사라져버렸다. 콘스탄틴은 즉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침례에 의한 중생은 마귀의 교리라고 주장하는 도나티스트들에 의해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콘스탄틴은 훌륭하신 여타의 기독교 황제들처럼 유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도나티스트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콘스탄틴은 도나티스트들을 사형에 처했으나, 그는 카톨릭측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도덕가”를 본받아(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의 생애’에서 내린 찬사) 441년 공회에서 누미디아 멜라의 주교였던 옵타우스는 도나티스트를 비난하는 책을 썼고 A.D.377년에는 그라티안 황제가 도나티스트들로 공적, 사적모임을 갖지 못하도록 금하면서 이들의 교회들을 빼앗아버렸다.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회(411)에서는 286명의 카톨릭 대표가 279명의 도나티스트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도나티스트들의 패배의 주요원인은 어거스틴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때문이요, 그가 쓴 <신국> 등과 같은 책에 나오는 “애매한 용어들” 때문이었다. 도나티스트들은 만약 어떤 카톨릭교도를 재침례주다가 발각되면 즉시 사형에 처할 것임을 경고받았다. 다시 말하면 유아세례 혹은 카톨릭 침례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적극적인 박해가 콘스탄틴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니케아공회(A.D. 325)이후 확산되었다.

5. 마니키안과 폴리시안

니케아 공회 이후 대부분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그 그룹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아리안”이나 “마니키안”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시대에(500-1000)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친 사람들은 “카톨릭” 혹은 로마 카톨릭 혹은 그리스 정교회라고 불려본 적이 없다. 이들은 폴리시안, 불가리안, 파테린, 부르군디안, 보고밀, 아르메니안, 카타리 등등으로 불렸다.
이들의 신학적인 지식의 부족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리고 신약성경의 모든 교리들을 다루는데 있어 얼마나 서툴렀든지 간에 이들은 두 가지 사항은 결코 실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유아에게 물을 뿌리지 않았으며, 성인의 경우 거듭남을 체험했다는 고백이 있을 때까지 침례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침례교도”로 불릴 수도 있는데 이는 바로 이 두 가지 사항이 침례교도들이 물침례에 관해서 믿고 있는 독특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침례교도”(Baptist)가 어린 아이는 침례주지 않고 어른의 경우 구원받을 때까지는 침례주지 않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한다면 암흑시대의 가장 유명한 복음적 그룹인 왈덴스는 침례교도들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두 가지 사항이 그들이 믿고 실행했던 바였기 때문이다.
폴리시안은 처음부터 모든 선한 카톨릭에 의해 이단종파로 분류되었다. 이들을 금지시킬 목적으로 이들은 유명한 이단이었던 “마니키안”과 연관된 것으로 꾸며졌다. 마니키안은 마네스(혹은 마니)라고 하는 페르샤인이 A.D. 270년경 페르샤에 세운 이단 종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마니키안에 대한 반대는 마니가 영지주의자들이나 카톨릭 보다 창세기 1:2에 대해 더 정확한 해석을 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마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적하는 사탄적 세력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카톨릭 역사가들은 이 주장이 “이원론”을 믿는 영지주의라고 몰아붙였다. 모든 카톨릭 교황, 대주교, 사제, 수도승, 수녀, 추기경 및 대통령들은 사탄이 이 땅 위에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사상을 거부한다. 이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원론자가 되는 것이다. 몬타누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니는 자신이 요한복음 14-16에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위로자”라고 주장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는 결코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역사가들은 성령께서는 오직 자신들의 교회를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의 회원이 아닌 그 누군가가 성경적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면 그는 “자기가 성령이라고 말한” 셈이 된다. 마니는 자신 안에 계신 위로자께서 자기를 통해 말씀하셨다고 말했을 뿐이다. 마니의 적들이 쓴 글들을 받아들인다면 마니가 구약 성경에 대해 취한 태도는 완전히 불신자의 자세일 것이다. 마니는 275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죄목은 선과 악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와, 아담 이전의 역사에 대해 갖고 있던 철학적 주장이 이단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구약 성경이 영감을 받았고,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모양을 입은 하나님이시며, 죽었다가 장사되었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믿었다. 전통주의자들이 마니의 가르침에 반대한 진짜 이유는 훨씬 간단하다. 그의 추종자들은 4세기나 5세기 동안 카톨릭 신앙을 조롱하고 “카톨릭 교도”들의 반성경적 실행들을 조롱한 사람들로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카톨릭은 폴리시안 역시 “반카톨릭”이었으므로 이들을 약탈하고 살해할 목적으로 마니키안과 연관이 있다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마니키안을 “과격하고, 이단적인 종파”로 분류한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과는 반대로 바울 서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폴리시안”(바울파)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카톨릭 교회는 한 번도 바울 서신을 강조하지 않았다. 폴리시안은 한 마디로 오리겐, 시프리안, 클레멘트, 파피아스, 유세비우스, 제롬, 혹은 어거스틴보다 신약성경의 핵심을 훨씬 잘 파악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샤프가 “이단종파”라고 부르는 이 그룹의 창시자는 A.D. 684년 그리스 황제 콘스탄틴 포고나우츠(668-685)의 명령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 이 “이단종파”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쉽게 그 출처를 찾아낼 수 있는 시리아에서 유래되었고, 소아시아를 거쳐 퍼져나갔다. 정통주의자 데오도라는 십여만 명의 폴리시안을 칼과, 밧줄과, 화형으로 죽였다. 폴리시안 회중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정치적으로는 사라센과 동맹을 맺었다(종교적으로는 아니었다). 비잔틴 제국은 이 당시(A.D.867) 우상을 섬기는 배교자였던 그리스 카톨릭(Greek Catholics)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카톨릭 교회사가들은 이들 “극단적인 이단들”은 “이원론”을 가르쳤고,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가르쳤으며, 기독교보다는 유대교를 가르쳤고, 시몬 베드로를 거짓 선지자라고 여겼다고 그의 교회사에 기록했다.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폴리시안은 두 가지 이유로 “이단”으로 분류된 것이다. 폴리시안은 카톨릭 교회의 수장을 거짓 선지자(사탄)라고 불렀다. 폴리시안에 대한 공격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15세기에 걸친 중상모략을 전형적인 예이다. 폴리시안들은 카톨릭 교회의 성직제도를 거부했고, 성체성사도 거부했고, 유품과 십자가 숭배도 거부했고, 에베소서 4:5의 “하나의 침례”는 성령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 안으로 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폴리시안의 최악의 상태마저도 당시를 지배하던 교회의 그 어떤 주교나 대주교 보다 최소한 다섯배 이상은 성경적이었다. 심한 박해를 받게 된 폴리시안들은 불가리아와 발칸 지역의 산악지대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이탈리아 북부와 유고슬라비아로 가서 왈덴스와 알비겐스로 불리우는 그리스도인들을 낳게 된다. “마니키안”으로 몰린 사람들은 로마의 “기독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뿌리뽑히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북부(파테린과 왈덴스의 본고장)와 프랑스 남부(보도와 알비겐스의 본고장)에서 비밀리에 성경을 가르쳤고 복음을 전파했다. 폴리시안은 한 때(A.D.560) 마니키안이었던 콘스탄틴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사람의 회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구령하는 어떤 전도자가 그에게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의 필사본을 하나 건네주었다. 물론 이 필사본은 제롬이 사용한 알렉산드리아 계열이 아니고 시리아의 비잔틴 계열 필사본이었다. 이 성경 출판으로 이 감독은 황제 유스틴(483-565)에 의해 “마니키안”으로 몰려 트레이스로 추방되었다가 그곳에서 그리스 정교회 교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6. 왈덴스

스페인 북부(피레네 산맥지대)에 있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후일 왈덴스로 신원이 밝혀졌다. 스페인을 떠나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그리스도인들은 프랑스 남부에 정착했을 때 “보도”라고 불렸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거리에서 설교했던 그룹들 중 유명한 그룹은 왈덴스였다. 이들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살았다. 이들은 소아시아에서부터 프랑스 남부로 넘어온 그리스도인들로 중세에 있어 정확하게 성경적인 기독교를 실행한 그룹이었다. 그곳으로부터 이들 그룹은 페이드몽,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로 퍼져나갔다. 이들의 호칭은 피터 왈더스(Peter Waldus)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달라티”(Sandalati) 혹은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렸다. 다른 학자들은 왈덴스(골짜기에 거주하는 자들)이란 명칭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스페인어로 골짜기라는 단어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왈덴스들은 제 3차 라테란 공회(1179년)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거리에서 설교하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했고 그들이 올드 라틴 역본에서 번역한 성경을 교황에게 하나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이 금지당했고 공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후일 그들의 성경들은 불태워졌고 80여 명의 설교자들이 스트라스부르그(1212)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스와비아, 쾨닉스버그, 폴란드, 바바리아, 보헤미아, 그리고 파소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 최종권위로 생각했기 때문에 성경의 배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면 이들은 이들 종교인들을 무시해 버렸다. 왈덴스의 믿음에 따르면 평신도도 성경을 설교할 수 있으며 그 어떤 평신도도 믿음을 고백하는 어른에게 침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유아에게는 침례를 주지 않았다. 이외에도 이들은 믿는 자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믿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루터와 칼빈이 태어나기 300여 년 이전에 유럽 전역에 걸쳐 역사하고 있던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인이었던 것이다. 왈덴스들은 모든 카타리와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바빌론의 창녀라고 선포했다. 성 프란스시와 도미니크 그리고 베르나르드가 가르쳤거나 모방했던 실제적인 기독교 진리들은 전부 왈덴스로부터 배운 것이지 자신들이 속했던 카톨릭 지도자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 수도승들은 왈덴스들의 기독교적 실행(즉 가난하게 사는 것과 가난을 선택하는 것)을 모방함으로써 많은 방랑자들을 다시 바빌론의 창녀의 품 안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왈덴스들은 36차례의 박해를 통과해야 했다. 그 중 가장 극심했던 것은 1208년에 있었던 몽포르드시몬의 십자군 원정 때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왈덴스들을 “삼손의 여우들”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다른 곳에서 나타났지만 모두 함께 묶어 태워죽였다. 왈덴스들은 겨울에 집에서 쫓겨나 산꼭대기로 내몰렸고 황막한 숲 속으로 내몰려 그곳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다. “경건한” 도니미칸들은 자신들의 멸망을 스스로 자초했는데 “도미니, 칸네스”(라틴어로 주님의 개들)라고 불렸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절벽에서 내던져져 산산조각이 났으며 어떤 이들은 동굴로 쫓겨갔고 이 동굴의 입구를 장작불로 태워 연기에 질식시켜 죽였다. 비틀거리는 노인들과, 어린이, 유아들은 목매달아 죽였고, 찢여 죽였으며 창자를 꺼내기도 했고, 쇠스랑으로 찔러 죽였고, 물에 빠뜨려 죽였으며, 갈기갈기 찢어 죽였고 칼로 찔러 죽였고, 개가 물어 뜯게 하여 죽였으며,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갖고 있던 긍정적인 견해가 낳은 당연하고도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악한 카톨릭 배교자들이 왈덴스, 카타리, 보고마일 등에게 품었던 불타는 증오심은 이들 성경대로 믿는 그룹들이 외친 부정적인 설교 때문이었다. 모든 성경적 설교는 로마 카톨릭에 관한 한 100%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이집트나 로마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7. 알베겐스

프랑스 툴루즈 북동쪽 42마일 지점에 있는 도시, 알비에서 그들의 이름이 기원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알비겐스라고 불렀다. 알비겐스들은 노바티안, 아리안, 도나티스트 및 기타 관련 “이단들”이 로마 북부로부터 롬바르디를 거쳐 프랑스 남부로 건너간 후 이들의 후계자로 등장한 그룹이다. 툴루즈 공회(1119)부터 시작해서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선언들이 뒤따랐고 군경을 동원해서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노센트 3세는 성경대로 믿는 “이단”들이 불신자들(사라센, 모슬렘, 그리고 터키족)보다 더 나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카톨릭의 본토인 유럽에서 창녀의 단합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노센트 3세는 네 번에 걸쳐 “십자군”을 조직하여 알비겐스를 멸절시키려 했다. 알비겐스의 살상에 참여하는 자원자들에게는 모슬렘을 죽이러 항해했던 자들에게 약속된 동일한 보상이 약속되었다(즉 죄들이 용서와 영생이 그것이었다). 교황 이노센트의 일요일 강론에서는 알비겐스는 “옛 뱀의 종들”이라고 불렸다.
이노센트는 비무장한 사람들에게 칼을 들고 살상하는 살인자들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했다. 1209년 7월 정통 카톨릭 군대가 베지어즈라는 도시를 공격했고 6만여 명의 무고한 비무장 시민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전 도시가 포위를 당했고 어떤 사람이 카톨릭 교도 역시 “이단”들과 더불어 살해당하고 있다고 불평을 하자 교황의 특사는 걱정말고 계속 죽이라고 하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을 알고 계시니” 염려말라고 했다. 프랑스의 카르카송에서는 모든 주민이 마을에서 쫓겨났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옷 뿐이었다. 미네르바에서는 140,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화형당해 죽었고 이들의 코, 귀, 입술 등은 “신실한” 사람들에 의해 잘려졌다. 이것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1229년에는 종교재판은 절정에 달했고 1233, 1234년에는 교황 그레고리 4세가 독일군을 동원해서 브레멘과 올렌부르크 근처에 살던 수십만 명의 알비겐스들을 살해했다.

8. 로라즈

로라즈는 “종교개혁의 새벽별” 위크리프가 조직한 순회 전도단이다. 위클리프는 영국의 색슨족 출신으로 1366년 왕궁의 궁전 목사가 되었으며 1374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이어 로마 카톨릭을 기탄없이 비난하였고 이에 런던의 성 바울 성당의 주교 앞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다. 교황은 위클리프의 모든 저작을 정죄했고 최초의 영어로 된 성경을 금지시켰다. 위클리프는 라틴어에서 영어로 성경을 이미 번역했었다. 위클리프는 분명 구라틴어 성경들을 갖고 있었고 몇몇 군데에서 제롬의 벌게이트와 일치하지 않는 구라틴어 필사본들도 갖고 있었다. 위클리프는 살아 있는 동안 영국의 강력한 귀족들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또한 그의 설교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일반인들 역시 그를 지지했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출신자들로 “가난한 사제”단을 조직해서 영국 전역에 걸쳐 성경을 설교하도록 했다. 이들은 후일 “로라즈”(Lolards)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프랑스의 리요니스트로 “휴밀리타이”와 “프라트리셀리”로 불렸음)이 로라즈들처럼 자진해서 가난을 택하였고 거리에서 설교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월터 로라드라고 하는 피드몽 출신의 왈덴스 목사에서부터 로라즈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위클리프는 1384년 교회에서 예배도중 죽었다. 그의 저작들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1415년 콘스탄트 공회는 그의 책들을 불태우도록 명했다. 후일 그의 유해는 무덤에서 파해쳐져서 태워졌는데 이 일은 1413년 라테란 공회에서 의결되었었다. 위클리프의 시체를 그처럼 잔인하게 파헤쳐 불태운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위클리프의 시체가 불태워졌던 이유는 그가 아리안, 마니키안, 도나티스트, 폴리시안, 파테린, 보도, 불가리안, 알비겐스, 왈덴스, 카타리들과 마찬가지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며 교황을 따르는 세속 정치가들은 마귀의 종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위클리프는 라드베르투스가 지어낸 “화체설”이라고 하는 아프리카의 검은 마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클리프는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처럼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로 믿었던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었다. 성경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모든 진리”이다. 성경에 일치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옳고 성경과 상치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거짓된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을 오늘날 신학교(총신, 장신, 감신, 합신 등)에서는 “성경숭배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위클리프는 성경의 모든 어휘가 참되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로마 카톨릭의 평신도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성경을 갖고 읽어야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그것이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유아세례를 거부했으며, 마리아숭배, 연옥,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염주, 유품숭배, 그리고 외경을 거부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인이었다. 위클리프가 조직한 순회전도단인 로라즈는 그가 번역한 그 성경을 가지고 영국과 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그중 일부는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최초로 화형을 당한 여자는 로라즈 출신의 요안 브로프톤으로 1494년 스미스 필드에서 화형당했고 그녀의 딸도 같이 화형당했다.

9. 후스파

후스파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따르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다. 후스는 보헤미아의 호시네츠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98년 프라하 대학교에서 신학 강사가 되었으며 1401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요한 위클리프의 저작들을 모국어로 번역했으며 곧이어 카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한 때 체코 민족 전체가 그를 따랐다. 후스는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설교하고 책을 썼다. 1414년 그는 콘스탄스 공회에 소환을 당했다. 자유로운 활동과 안전을 보장받고 그곳에 간 후스는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신속한 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해졌다(1415). 살인마 카톨릭 교회는 아리안, 보고마일, 파테린, 알비겐스, 마니키안과 같은 그 어떤 죄목으로도 그를 처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스가 보헤미아에서 배운 성경적 진리들은 이들 그룹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이는 보헤미아가 왈덴스들의 핵심 본부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후스의 죄목은 그가 아프리카이 검은 마술인 “미사”를 거부했다는 것이고 성당과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 언제든지 설교를 했으며 교황의 무오성을 부인했고 “참되고,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는 추기경, 교황, 대주교들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설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톨릭과는 달리 교회는 베드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위에 세워졌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후스는 당시 제도교회의 모든 교리와 그 영도자에 대항했다는 죄를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요한 후스를 화형에 처했다. 교황이 후스에게 자유로운 행동과 안전 귀가를 약속하는 거짓말로 후스를 공회로 소환한 것은 카톨릭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단”에게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후일 예수회에 의해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붙들고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회중들의 무리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종교개혁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성경대로 믿는 신앙을 소유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개혁을 통해 하루 아침에 튀어나온 것이 아니며, 암울한 로마 카톨릭의 치맛폭에서 하루 아침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이들은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 따를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할 때면 언제나 모든 것을 성경대로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그렇게 실행해 왔다.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처럼 “유아세례”을 수용하는 식의 타협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성경대로 따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카톨릭에 의해 박해와 비난을 면치 못했다. 성경대로만 따른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어린 아기에게 물을 뿌리는 짓이라든지, 세속정치와 교회의 결탁을 찬성하는 따위의 일에는 켤코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그런한 일에 연루된 사람과의 교제는 물론이고, 물침례만 받고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 구성원이 된 자들과, 말씀을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들과의 그 어떠한 타협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노선을 따르는 교회들이나 개인은 박해받았고 모욕당했고 오해받았으며 감옥에 갇혔고 고문당했고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끊기지 않고 이어진 노선은 종교개혁 이전에 있던 신앙의 노선이고, 1995년까지 어느 한 순간도 끊기지 않았다. 그들이 불렸던 이름은 다양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이렇게 불렸다 : 순교자들, 몬타니스트, 노바티안, 네스토리안, 유카이트, 메살린, 도나티스트, 폴리시안, 보고마일즈, 카타리, 왈덴시즈, 재침례파, 프로테스탄트, 침례교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 형제들에게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특징은 성경을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반대하는 것과는 그 어떤 것이라도 타협하거나 동행하지 않았다. 성경적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 로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며, 어떠한 형태의 친 카톨릭적인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결코, 카톨릭 성경을 가지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자칭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무리들과 비교한다면 로마 카톨릭과의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도 결코 끊이지 않았던 성경대로 믿는 신앙 노선을 보았다. 주님의 재림이 눈 앞에 다가온 이 시점에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도 수 없이 많음을 본다. 오늘도 또 다른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떠났다. 만약, 재림이 조금 늦춰져서 교회의 역사가 지금까지 만큼 또 있다 하더라도, 이제까지의 속도라면 복음이 전해지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의 성경을 버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위에서 살펴본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부분적이나마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며, 주님의 재림 이전에 민족적인 대각성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성경과 성경적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개혁이나 부흥은 역사 속의 이야기로만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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