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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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부흥은 이렇게 전개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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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2월호>

섭리적인 “불일치”

웨슬리와 휫필드가 미국에 왔을 때(1738-1739)에는 소위 “유동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어떤 그룹도 기독교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카톨릭은 발티모어 경에게 주어진(1632) 허가장을 근거로 교황의 세력을 메릴랜드로 침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에 국가교회를 세우기 전에(그들은 스페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프랑스, 멕시코 등에 이미 국가교회를 세운 바 있다.) 메릴랜드는 영국 성공회에 의해 왕실 식민지로 되었으며(1691) 이 사건으로 그 그룹은 분산되고 말았다. 반대로 성공회는 남부 식민지에서 법으로 규정되었다(1706-1717).
그러나 그 지역 주민들 중에는 위그노, 장로교인, 침례교도, 퀘이커교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에 의한 교회국가는 명목상에 그칠 뿐이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굳건히 확립되었던 영국과는 상황이 달랐다. 청교도들은 그들이 메사츄세츠 만 식민헌장(1684)을 무효화하고 성공회가 보스톤에 확고한 기틀을 잡게 되었을 무렵(1687) 칼빈이 제네바에서 세운 신정국가(1600)에 걸맞는 신정국가를 뉴잉글랜드에 거의 세울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펜실베니아는 가장 유동적인 지역으로 이곳에는 독일 경건파, 루터교도, 모라비안, 덩커파, 아미파, 웨일즈 침례교도, 퀘이커교도, 스위스 메노파, 스웨덴 루터파 및 화란과 독일의 개혁 그룹 등이 섞여 있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부터 온 성경대로 믿는 스코틀랜드인들은 1710- 1750년 사이 대서양을 건너와 거의 모든 식민지에 그들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대도시에서 벗어나 남북 캐롤라이나, 서부 버지니아, 켄터키 및 테네시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국가교회들이 그들에게 보여 주었던 잔인한 행위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취하는 자들이면 그 누구든 화형시켰던 로마 카톨릭이라는 국가교회의 횡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웨슬리와 휫필드가 제이콥 프렐링후이센(모라비안교도), 길버트 테넨트(1703-1764), 그리고 죠나단 에드워드(1745-1801)와 힘을 합치기 위해 미국 해안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은 콘스탄틴(A.D.300)이래 어느 한 종파가 다른 종파들에 대해 절대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미국의 기독교계는 너무도 다양하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어서 그 누구도 “모두의 유익을 위해 뭉칠” 수도 없었고, “한 우리에 한 양떼”를 만들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행위라고 요즘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것도 당시의 다원화된 상황 하에서는 결코 스캔들이 될 수 없었다.
미국이 스페인이나 멕시코 같은 국가교회가 되지 않았던 것은 여러 종파가 나뉘어져 서로 다투고, 분열을 일삼고, 분파로 쪼개져 “종교적 불일치”를 이루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불일치”에 깊이 감사해야 한다. 언론이 미국을 형편없는 “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기 전까지(1860-1960) 미국에서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1750년 당시만 해도 언론은 별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는 대중적 의사형성, 대량전파, 대중적 외설, 연방에 의한 대중의 통제(1933)가 아직은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길버트 테넨트와 “통나무” 신학교

대부흥운동의 심지에 불을 붙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은 길버트 테넨트라고 하는 장로교인(1743)으로 그는 휫필드의 설교와 모라비안 교도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죠나단 에드워드가 이 운동에 참여하기도 이전인 1726년 이미 수십 명을 회심시켰다. 테넨트는 “지옥과 저주를 외치는” 구식 설교자 중 하나였다. 그의 설교는 위선자들에게 찔림을 주어 회심케 하거나 이들로 분노케 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는 그가 속한 장로회의 박해를 받았다. 그는 휫필드와 웨슬리처럼 오직 한 가지 책, 즉 1611년 킹 제임스 성경만을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부흥운동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죠나단 에드워드(1745-1801)로 이는 그의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놓인 죄인들” 이 미국 역사(혹은 문학)책에 거의 100여년 동안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교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 “화를 내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들만이 인용하고 있다. 그것도 성경대로 믿었던 당대의 미국인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설교를 들먹거리는 것이다. 이 설교는 성경을 거부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도록 미국의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배포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설교는 “부정적 사고방식의 기독교”가 최악의 상태에서 어떤 모습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리고 그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 미국의 교육자들이 제시하는 증거자료가 되어 버렸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최초의 부흥의 열기는 1730년 경 메사츄세츠의 노스햄톤에서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그곳에서는 “아르미니안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열띤 논쟁이 있은 후 갑자기 몇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 사건 직전인 1720년 경에는 스토다드라는 목사가 죠나단 에드워드가 후일 설교했던 그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스토다드 목사의 신학적 견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죠나단 에드워드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아르미니안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를 자기 교회에 4번이나 초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리에서의 설교를 주무기로 삼았던 성경대로 믿는 아르미니안
주의자의 실천신학적 태도가 미국의 대부흥의 시위를 당겼던 것이다. 미국의 부흥은 “버림받은 자들”에 관한 신학적 논쟁을 일삼고 있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부흥의 열기를 타고 주일학교(1790), 전도협회(1804), 런던선교회(1795), 필라델피아 칼리지(후일 펜실베니아 대학교가 되었음), 프린스톤, 콜롬비아 및 다트마우스 대학교 등이 생겨났다. 복음전파에 뒤이어 성경교육이 일어났던 것이다. 드럼몬드라고 하는 역사가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례 없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던 부흥운동이 미국의 교육에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인 일이다.”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전혀 역설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교육은 항상 그 나라의 교육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일어난 모든 교육운동 중 성경의 공개적인 설교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아니면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지식인들은 지옥과 재림과 지식인들의 타락에 대한 설교를 듣기만 하면 핏대를 올리면서 대항해 왔다.

길버트 테넨트를 사역에 임하도록 훈련시킨 사람은 그의 아버지 윌리암 테넨트였다(1673-1760). 이 용감한 비순응주의자는 그 어떤 “정통주의자”도 자기 아들들이 사역자가 되기에 합당한 교육을 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자기가 지은 통나무 집에서 세 아들을 가르쳤다. 그는 그들에게 히브리어, 헬라어, 복음증거, 개인사역 및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이 “성경”임을 믿었다. 이 인가 받지 못한 “통나무 신학교”가 후일 프린스턴 대학교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 당시까지만 해도 언론은 윌리암 테넨트가 세운 비인가 신학교를 무너뜨릴 만큼의 능력은 갖지 못했다. 오늘날 같으면 언론은 자기들의 기준(사회주의적이고 인종 통합적 범세계주의)에 미달하는 대학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분리

이와 같은 배경 하에 성령께서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종교단체들을 둘로 나누셨다.
첫번째는 장로교 노회가 구식과(Old Side) 신식(New Side)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뉴욕 노회(청교도주의, 성별 및 부흥을 내세우는 신흥 노회와 필라델피아 노회(극단적 칼빈주의와 형식적 예배, 죽어 버린 정통주의를 주장하고 그리스도께 회심한 분명한 외적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구노회)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두번째 분열은 회중 교회가 “구광”주의(Old Lights) - 이들은 부흥과 복음 전파에 반대했음 - 와 “신광” 주의 (New Lights) - 이들은 이 두 요소에 모두 찬성하였다 - 로 나뉜 것이다.
세번째 분열은 침례교도들이 “분리주의자”(Separates)와 보통 사람들(Regulars)로 나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란 그룹은 옛 형식주의에 머물렀고 분리주의자들은 대부흥운동기간 동안 성령과 동행했다.
침례교도는 이미 특수 침례교도(극단적 칼빈주의자)들과 일반 침례교도(온건 칼빈주의자)들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대부흥운동 기간 동안 다른 어느 교파보다 두배 이상 많은 새로운 교회들을 세워 나갔다. 대부흥은 감리교와 루터교에는 이 정도까지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카톨릭에게는 전혀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카톨릭교회 역사상 성령 하나님께서 그 어느 곳에서, 카톨릭에 속한 그 어떤 그룹에게 부흥을 주셨다는 기록은 없다. 예외라고 굳이 들자면 아시스의 프란시스와 사보나롤라에 의한 일시적 도덕 개혁을 들 수 있겠다).

교육과 철학의 반대

웨슬리, 테넨트, 에드워드, 휫필드 및 프렐링 후이센 등의 사역에 뒤이어 “자격을 갖춘 학자들”과 “인정받는 성경학자”들이 온갖 논쟁 거리를 들고 등장했다. 이들은 트래트크 논쟁, 고함 논쟁, 햄던 논쟁, 에세이와 리뷰 논쟁 그리고 종교의식의 재등장 등을 가져왔다. 그결과 영혼의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거들과 신약교회 정치가 대부흥운동기간 동안 확립되었고 모든 식민도시에 이식되기에 이르렀다. 데이브드 브레이너드(1718 -1747), 다니엘 마샬, 윌리암 커레이(1761-1834), 로버트 홀(1764-1831), 제이콥 냅(1799), 롤랑 힐(1744-1833), 및 챨스 피니(1792-1875) 등이 대부흥운동을 뒤이어 기독교계를 장악해 버린 둔감한 “교육받은 계층”들 속을 뚫고 나타났다.
비록 부흥은 30여년 간을 지속했을 뿐이지만 그 영향은 1756년을 훨씬 넘어서까지 나타났다. 윌리암 커레이, 헨리 던스터, 다니엘 테일러 및 제이콥 냅 같은 위대한 설교자, 교사, 그리고 선교사들은 모두 대부흥의 열매들이었다. 이 운동은 너무도 강력해서 기독교 대학들이 관념론, 이신론, 회의주의 및 원문비평학의 함정으로 지역교회들을유혹하기까지는 수십 년이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7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교회 역사상 최초의 참된 교훈을 배웠다. 성령께서 움직이심으로 죄인들이 구원받고, 대규모의 복음전파와 부흥이 있고 나면 성경공부와 교육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가면(성경이 정해 놓은 데드라인은 마태복음 28:19,20이다.) 이미 “잘못”되어 가는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이 서점에서 인기를 끌자마자 이 성경의 모국격인 영국은 이신론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원칙들”, “교훈들” 및 “메시지들”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기 시작했다(에드워드 로드 허버트 : 1583- 1648, 토마스 브라운 경 : 1605-1682). 결국 “근본적인 사항”들과 “주요 원칙”들만이 남게 되고 이러한 것들을 제공했던 원천이 되는 성경 그 자체는 공격당하기 시작한 것이다(토마스 홉스 : 1588-1679, 존 톨란드 : 1670- 1722). 일단 이 원천이 되는 책이 무효화되자 영국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기 두뇌 외에는 더이상 최종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안토니 쿠퍼 : 1671-1713, 토마스 울스톤 : 1669- 1731 , 데이브드 흄 : 1711-1776).
이 모든 이신론자들은 영국 국민들로부터 이 지구상에서 기록되고 인쇄된 책들 중 가장 위대한 책에 대한 기억을 제거해 버리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교육받은 계층”이었고 그들 중 세 명은 오늘날 미국의 메이첸, 워필드, 밥 죤스 3세 및 스튜어트 커스터가 믿는 “믿음의 기본 사항들”을 믿는다고 고백했었다.
성령께서 성경대로 믿는 야외 설교자들을 동원하셔서 양 대륙을 휩쓸고 계신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의 이신론은 “교육받은 계층”들에 의해 번져 나갔다. 이 교훈은 교회사 학도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표준원문 혹은 이것에서 번역된 성경에 대한 공격은 1574년경부터 안드레아스 마시우스(Andreas Masius)라고 하는 카톨릭 학자와 폐베리우스(Peverius)신부, 그리고 호네(Horne) - Introduction to the Critical Study and Knowledge of the Holy Scripture 상하권을 합쳐 1,149 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저자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연구”는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톤, 다트 마우스 및 콜롬비아 대학들도 결국은 이러한 “자격을 갖춘 권위자들”에 의한 공인받은 학문의 유혹을 저항하지 못하고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이로써 학문은 죄에 대해 그 어떤 알리바이도 제공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웨스트민스터(1930)와 밥 죤스 대학교(1950)는 케네스 웨스트(Kenneth Wuest)와 로버트슨(A.T. Robertson, 1920-1970)의 학문 앞에 무릎을 꿇고 배교하고 마는 것이다. 죄에 대한 알리바이를 찾는 사람에게는 자갈도 황금 덩이로 보이는 것이다.

이번에도 서쪽을 향해...

성령께서는 독일(1850)의 영적 황폐를 뒤로 하고 떠나 버리셨다. 할레 대학 출신의 몇몇 목사들과 성경 교사들만이 배교를 이겨내고 살아 남았으니 국가적 부흥은 루터 이후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다. 성령께서는 마찬가지로 웨슬리와 휫필드의 사역을 끝으로 영국을 영적 암흑에 남겨 둔 채 떠나셨다. 웨일즈는 아직 부흥에 이를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윌리암 부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때였다.
웨슬리와 휫필드의 사역은 사상가들에 의해 대체되었고 성령께서는 늘 그러하시듯이 이번에도 서쪽을 향해 미국으로 건너가셨던 것이다. 그는 미국의 동부인 뉴잉글랜드를 강타한 후 교육의 열풍 속에서 (하버드, 프린스톤, 예일, 콜롬비아, 다트 마우스) 그의 표준비행 계획을 재개하실 준비를 하셨다. 즉 복음은 미 대륙에서도 서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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