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본격적인 공격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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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3월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라. 이를 위하여 네가 또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느니라』(딤전 6:12).


사가들과 신학자들은 W.B. 릴레이, 샘 존스, D.L. 무디, 빌리 선데이 등과 같은 사람들을 바울이나 마틴 루터 같은 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두기를 싫어한다. 그것은 학자들이 그들의 불 같은 성격과 그들의 인격은 무시한 채 “바울 신학”과 “루터 신학”만을 끊임없이 논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학자들은 그들의 “사역”보다는 그들의 “지식”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신학자들은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종교개혁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루터와 칼빈을 사용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또한 종교개혁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성경”은, 1880년 이래로 인쇄되어 나온 그 어떤 영어나 독일어 성경과도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배교한 근본주의 신학자들을 가려내는 또하나의 방법은 이들이 소위 “역사적인 근본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언급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성경을 믿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루터와 바울이 일으켰던 것과 같은 “소요”를 일으키는 데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2-3세기, 10-15세기 전에 진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믿는다고 고백했던 그것을 자기들도 믿는다는 근거 하에 자신들의 현상황을 정당화시키는 것뿐이다. “역사적인 근본주의적 입장들”은 흔히 현실에 안주하는 데 대한 알리바이로 사용된다. 이 “근본주의적 입장들”에는 최종권위, 복음전파, 선교, 지역 교회 등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교회사 초기에 있었던 일곱 번의 공회에도 한 번도 포함되지 않았었다. 또한 루터 시대와 칼빈 시대에 물침례와 선택의 교리에 관한 “근본주의적” 입장은 잘못된 것이었다. 바울, 루터, 무디, 선데이 등은 “역사적 입장들”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성경을 믿었고 성경대로 설교했을 뿐이다.

윌리암 워드 아이에르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남겼는데 그것은 1950년도에 정확히 성취되었다. “뉴욕은 이제 본질적으로 이교도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이 도시의 시민들의 도덕적, 종교적 상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뉴욕을 미국화시키고 기독교화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뉴욕이 우리를 유럽화시키고 이교도화시켜 버리고 말 것이다.” 이 침례교 “이단”은(로마 카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모든 침례교인은 “이단”이다) 유럽과 이교도를 언급했다. 사실 뉴욕을 이교도화시킨 사람들은 아프리카 출신이다. 무디와 샘 존스의 부흥이 끝나가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육 기관과 병원들을 세웠고(물론 세금을 지원받아서) 뒤이어 소교구들이 세워졌다. 로마의 침투 직전에는 대대적인 교육 운동이 펼쳐졌는데, 이 운동으로 록펠러가 60만 달러를 기부하고 침례교도들이 40만 달러를 지원해서 거대한 시카고 대학 건물이 세워졌다. 이 계획은 1890년에 시작되어 서방세계에 있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신론의 가장 위대한 온상이 되어 버린 시카고 대학의 건축으로 절정에 달했다. 시카고 대학의 역사는 “역사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을 믿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종교개혁이 만들어 낸 영어 성경인 <킹제임스성경>을 혼잡케 만들기 시작한 침례교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가장 잘 증명해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50년 동안 <킹제임스성경>을 뜯어고쳐 온 시카고 대학은 1930-40년대에 자유주의자들과 불신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미국인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태평양 케이블, 샌프란시스코 지진, 노동자 폭동, 금주, 브룩클린 다리, 인디언과 인디언 정착촌, 시카고 세계박람회, 필리핀의 반란, 다가올 제 1차 세계대전 등을 겪고 있었다. 이와 같은 “뉴스거리”에 미국인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두 가지 아이템이 조용히 나타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말았는데, 그것은 미국민들이 열렬히 환영한 “고등비평”(파괴적 추측)과, 의무교육법이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연합된 결과 연방 학교 제도는 전국 교육자 협의회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즉시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명제 하에 성경을 학교에서 “추방”시켜 버렸다. 동시에 각 주정부의 돈이 로마 카톨릭 학교들에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공립학교들은 모두 파괴되어 버렸고(1954-1974) 주 방위병과 법무부에 의해 지원을 받는 강제적인 연방 교육제도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 연방 교육제도에는 매년 28억 달러의 운영비가 지출되는데도 매년 7만 건의 교사 폭행 사건과 25만 건의 학생 폭행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제로 스쿨 버스 제도를 시행하여 매일 4백만 달러 상당의 휘발유를 낭비하고 있다. 이처럼 공공 교육이 연방 교육으로 바뀌면서 교육 재정은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고, 학교 내에서의 성경 읽기와 기도도 금지되었으며, 학교에 십계명을 인쇄해서 게재하는 것마저도 금지되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건국 공신들(1776)의 후손들은 비기독교적 교육을 강제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곳에서 “학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칼 막스의 후예들인 언론인들은 이 교육제도에 반대하는 모든 미국인들(골드워터, 월레스, 래퍼티, 앤더슨, 리스, 바넷, 포부스 등)을 숙청해 버렸고, 1950년 이후로 가정 안에서의 성경 읽기는 신문과 TV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민족들을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개되고 무시당하면 하나님께서는 국민의 모든 필요를 공급할 수 있는 정부를 세우도록 허락하셔서 결국 국민의 모든 행동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정부가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잠 28:2).
집시 스미스, 존 맥닐, 빌리 선데이 등이 이 과도기에 뛰어난 하나님의 증인들로 일어섰지만, 주 공격 부대와 함께 다른 공격 부대도 함께 공격을 하고 있었다. 윌리엄 엘버트 뮌세이는 감리교도로 남부 지방에서 짧은 기간 동안 설교했다. 뮌세이의 설교는 많은 과학적 자료들을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특징이 있었으며, 그는 특히 지옥의 연기와 화염을 정말로 보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지옥을 잘 묘사했다. 그의 용어들은 그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무신론자 밥 잉거솔의 어휘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워드 장군은 전담 사역자가 아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훌륭한 증인이었다. 그는 탐파시에서 3,000명의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장병들, 나는 41년 전에 이 막사에서 2마일 떨어진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항복했었네. 그때 이래로 그분은 나의 사령관이 되셨지. 그분이야말로 군대를 지휘했던 모든 장군들 중 최고의 장군이셨다는 사실을 자네들에게 말해 주고 싶네.” 박스터 F. 맥클렌돈(“사이클론 맥”)과 헨리 C. 모리슨은 남부 지방에서 설교했다. 밥 존스 시니어는 모리슨에 대해 말하기를 모리슨이 최고의 설교를 하면 더 훌륭한 설교자가 있었는가 의심할 정도였다고 했다. 모리슨은(위클리프와 사보나롤라가 당대 사람들을 정죄했듯이) 강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 시대의 죄악에 대한 치유책은 설교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 기간을 언급하면서 “구조 선교단”(rescue mission)이 이룩한 사역을 빼놓을 수 없다. “구조 선교단”은 1830년 오하이오 주의 장로교 노회가 선원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사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선교단은 성공회 교회에서 모였으며 그들 중 가장 열심이고 뛰어난 활동가는 한 침례교인이었다. 이 단체의 초대 책임자는 회중교회 회원이었다. 제리 맥콜레이는(그의 간증에 따르면 그는 회심한 카톨릭 신자였다) 1872년 자신의 선교단을 조직했다. 멜 트로터는 기수 출신의 협잡꾼이었던 톰 맥케이에 의해 이 선교단으로 끌려와 구원을 받았다. 멜의 친구인 웨스트버지니아의 챨스톤 출신 팻 위스토는 어네스트 리빌을 자기 사역으로 이끌어들인 사람이었다. 1921년 경에는 미국 전역에 58개의 선교단이 생겼다. 이들의 표어는 “신조가 아닌 그리스도를 : 율법이 아닌 사랑을”이었다. <그랜드 래피즈 모닝 헤럴드>지의 편집자 주에 보면(1940년 9월 12일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집착해 있던 선교단원들에 대한 논평이 나와 있다. “멜 트로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도록 이끌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수천 명이 넘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원했는지, 얼마나 많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주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옷을 입혀 주었는지, 얼마나 많은 혼을 하나님께 인도했는지는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시는 비밀일 것이다.”
존 맥닐(1854-1933)은 스코틀랜드의 복음 전도자이며 대단히 유머러스하고 영적인 전도자였다. 그의 사역은 인쇄물로 출판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샘 존스와 비슷했지만, 그의 설교는 사회적 혹은 개인적 개혁보다는 교회 생활과 성경 교리들에 더 집중되어 있었으며 길이도 더 길었다. 그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며 모든 인간은 형제들”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받아들인 교회협의회의 인물들(워드, 파이크, 속맨, 옥스남, 라우센 부쉬 등)을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심판하시지 않는 그런 하나님을 나는 멸시한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그저 사랑뿐이다. 그러나 죠셉 파커가 말했듯이 ‘이 위대하고 새로운 현대적 사랑은 그저 커다란 입맞춤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사랑의 신(god)은 1960년대와 1970년에 캐더린 쿨만, PTL(Praise the Lord의 약자, 1970-8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은사주의 운동으로 우리 나라의 “경배와 찬양”과 유사함-역자주), 오랄 로버츠, 지미 스워거트, 지미 카터의 누이 등에 의해 전파되었다. 이 사랑의 신은 1920년대에 벌써 이 땅에 선을 보였던 것이다.
맥닐은 샘 존스와 마찬가지로 카톨릭 “성사들”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은사주의 위선자들을 매우 강하게 공격했다. “당신이 뭔가에 대해 매우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신 것처럼 보일 때, 그래서 당신이 위로 올라갔고, 당신이 계단에 올라가 막 문을 들어서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 버리면 당신은 층계를 내려가면서 할렐루야를 부르겠는가? 수없이 ‘할렐루야’를 외치치만 그것은 일시적인 흥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리실 때 당신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미하겠는가?” 라오디케아 시대의 배교자들은 다시 <리빙 바이블>을 내세웠으나 로고스 출판사는(60,70년대) 질병, 가난, 심지어는 약간 아픈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자들임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코프랜드, 고어맨, 테럴, 오스본, 어윙, 코우, 알렌 캡(1960-1980) 등과 같은 육신적인 말쟁이들의 사역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적극적 사고방식가”들은 바울이 타락했고 신실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바울은 병든 채 살았고 가난에 찌든 채 죽어갔기 때문이다(고후 11-12장, 딤후 4장, 골 4장, 행 20-28장). 가난과 질병은 “PTL” 같은 곳에서는 “할렐루야”를 부를 수 없는 주제이다.
롤란 리벨은 남침례교 작가로 아마도 윌리암 에슐리 선데이(보통 빌리 선데이로 알려져 있음)의 사역에 대해 학자들과 역사가들이 갖는 전형적인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빌리 선데이의 집회는 “지나치게 감정이 고취된” 것으로 “지나치게 상업적이며” 이런 스타일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빌리는 “교회나 교회 집사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일반적 사람들의 편견에 호소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음전파 용어로 말하자면 빌리는 교회 지도자들의 죄들을 지적하는 설교를 한 것이다. 마 23장, 렘 23장) 이와 같은 리벨의 평가가 올바를 수 없는 것은 리벨이 살고 있던 당시는 이미 언론 매체가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반성경적 세속주의가 리벨 같은 사람들의 삶 속에 완전히 침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리벨은 더이상 성경적 관점에서 생각하거나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남침례교 총회를 이끌고 있던 리벨의 동료들은 미식축구와 농구 게임을 보면서 환성을 지르거나 싸구려 순정 소설을 보면서 눈물을 쏟으면서도 죄를 지적하는 설교에는 화를 내는 자들이었다. 1940년대에는 막스의 제 4계급(언론)은 알콜 산업과 헐리우드의 지원을 받아 대다수의 설교자, 목사, 신학교 교수들의 사고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결국 이들의 종교적 감각은 마비되고 말았다. 쟈니 칼슨 같은 코메디 쇼를 보고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영적 상태라면 어찌 “다윗 쇼”를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라켈 웰치나 파라 포셋 같은 여배우들을 보고 흥분하는 자들은 에베소 교회의 부흥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법이다(행 19:19,20). 딘 마틴이나 필 도나휴 같은 사람의 호소력으로는 욥과 모세와 함께 하늘나라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빌리 선데이(1862-1935)는 이와 같은 육신적 상태에 놓여 있던 대중에게 직격탄을 쏘아 댔다. 그는 그의 청중들을 너무도 강하게 흔들어 놓았으므로 TV쇼를 보면서 웃음을 낭비하던 타락한 자들은 오히려 빌리 선데이가 “너무 감정적”이라는 핑계를 댔다. 죽어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감정적”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리벨은 무디에 대해서는 “복음 집회 조직의 천재”로 평가했으나 선데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빌리 선데이는 역사가들과 작가들이 객관적 근대 교회사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호머 로데히비는 빌리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빌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모든 작가들과 정반대의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그는 빌리는 자신이 거둔 헌금의 1/3을 동역자들의 급여로 지불했고, 임종시 그에게는 5만 달러의 재산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드럼몬드는 빌리 선데이가 “최악의 복음 전파자”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반면 로데히비는 “나는 선데이가 바울 이래 최고의 전도자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드럼몬드는 빌리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기울인 노력을 “강단에서 옷소매를 펄럭이며 옷장사처럼 떠벌린 것”으로 묘사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헬라어 문법학자인 A.T. 로버트슨은 “나는 빌리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는 피츠버그 구석구석, 심지어는 차도에서 3개월 간 복음을 전해서 18,000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말했다. (로버트슨은 적어도 빌리가 <킹제임스성경>을 가지고 3개월 간 거둔 열매가 자기가 웨스트코트, 홀트, 알란드, 네슬의 알렉산드리아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40년 간 이룩한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할 정도의 은혜는 갖고 있었다.) 피츠버그에서 구원받은 18,000명의 죄인들 가운데 적어도 75% 이상이 18-80세의 성인 남자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탕발림식의 복음은 아직 유행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제대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빌리 선데이에 대한 공격은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빌리 선데이는 그의 사역의 초기에 술에 대한 도전장을 던졌고 따라서 당시의 술꾼들과 주류업자들로부터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로데히비는 “빌리 선데이는 이제껏 내가 본 설교자 중 그 어떤 사람과도 전혀 다른 식으로 설교했다. 그는 최신 유행하는 속어를 사용했고 청중의 99%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때로는 이런 설교가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선데이는 교회협의회의 지도급 인사인 글래든 박사를 “늙은 대머리 멍청이”라고 말했다(루터, 모데카이 햄, 프랭크 노리스 등도 직설적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빌리는 당시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을(모두 하나같이 사회주의자 혹은 막시스트였음) “몸이나 사리고 겁 많은 약골들”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교회사가들은 빌리는 “남을 존경할 줄 모르는 자”라고 평가했다. 빌리는 이들 학자들에게는 예의도 없고 “교회의 개념”도 모르는 무뢰한으로 비쳐졌고 그의 설교 역시 “왜곡되고 속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로데히비는 선데이를 생각이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강단에서 죄인들을 힐책할 때 말고는 그 어떤 사석에서 속된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 한 번의 집회를 통해 600명을 한 교회에 등록시킬 정도였다고 말했다. “교회에 대해 합당한 개념”을 갖지 못한 사람치고는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8주 간에 걸쳐 지속된 필라델피아에서의 집회에서는 약 230만 명이 빌리 선데이의 설교를 들었다. 로데히비는 선데이의 집회들은 “큰 사업”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교회들의 후원 없이 개개인 성도들이 그 집회의 비용을 부담할 것을 보장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로써 미국의 종교단체들이 고용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배교한 종교단체를 위해 정책을 강요하거나 선전을 일삼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빌리 선데이는 북부 침례교단과 감리교회의 배교를 막아 준 사역을 펼쳤다. 이 사역은 스코필드 관주성경이 출판되고 있던 시기에 이룩되었고, 선데이는 J. 프랭크 노리스가 남침례교단을 바로잡는 사역을 시작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설교했다.
선데이의 설교는 화끈하고 극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모든 규정화된 형식을 내던졌고 고유의 복음전파 방식을 갖고 있었다. 강단으로 걸어나가는 순간부터 그는 마치 “최고조로 음이 잡힌 바이올린 줄” 같았다. 그는 매우 민감했고, 그의 유머는 전염성이 강했으며 자유자재로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나의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 수 없다면, 만약 내가 당신이 하늘나라에 가고픈 마음을 갖도록 하지 못하고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비록 공산주의, 사회주의, 카톨릭, 관념론, 자유주의, 무신론 등의 세력에 대해 강력한 영적 공격에 맞서야 했던 많은 그리스도의 용사들은 1800년대 끝 무렵에 사역을 시작했지만 그들의 공적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가서야 가시화되었다. 이들 “구식 복음의 수호자들”(노리스, 풀러, 존즈, 라이스, 라킨, 빌링톤, 디한, 트루엣 등)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빌리 선데이의 사역 이전에 시작되어 사역 기간 중에 퍼져나간 엄청난 배교의 물결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미 모든 배교는 기독교 대학 및 신학교에서 발흥된다는 사실을 배운 바 있다(모든 공산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일반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다시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로 돌아가 알렉산드리아 이단이 무디와 선데이와 집시 스미스 등이 전 국민을 성경으로 돌이키고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때는 바야흐로 알렉산드리아의 이단들이 영국과 독일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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