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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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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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0월호>

Q.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정말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왜 주인이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 준 것을 칭찬하는지요? 이것 자체가 불의인데... 이것이 현명하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저 같으면 불의한 재물은 절대 모으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일단 주인의 재산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불의“란 말을 사용하여 불의한 재물이라고 일컫는 것을 보아 이런 행위 자체가 불의한데, 불의한데도 불구하고 신실한 행위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 이상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신실하지 못하면 참된 재물로도 역시 신실할 수가 없다는 말이 논리적 비약인 것 같습니다.


A.
1. 누가복음 16:1-12 말씀들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요인

첫째, 의문점을 갖게 된 내용, 즉 질문이 누가복음 전후 문맥의 전체 말씀 중에서, 그것도 한 구절 중에서 일부만 분리하여 그 표현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읽고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 교회 시대의 상황에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상황은 아직 구약입니다. 십자가 이전의 복음서 말씀들에는 구약의 상황은 물론, 대환란에 적용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하는데, 나의 가치 판단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현명하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깨달음이 있습니다.

2. 주인의 평가에 대하여

주인은 자신의 청지기가 행한 일들이 우선 “불의하다”고 판단했고, 성경은 분명히 그 청지기를 “불의한 청지기”라고 기록합니다(8절). 여기까지 청지기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자신의 재물을 불의하게 취급한 불의한 청지기를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판단했습니다(8절). 우리는 주인의 판단을 수용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판단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사람이 현명하다, 지혜롭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즉 위로부터 오는 지혜(약 1:5,17) 외에도 위로부터 내려오지 않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지혜는 땅에 속한 것이며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약 3:15). 이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고 이익을 취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합법적이든지, 편법이든지, 또는 불법적인 것이든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소위 ‘현명하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어떤 행위가 불의하다는 판단과 어떤 행위가 현명하다는 판단은 별개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인은 자신의 청지기가 불의하게 행동했으나 동시에 현명하게 행동했다고 판단했으며 그것을 칭찬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주인이 칭찬한 이유에 대해서 『이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현명하기 때문이라.』(8절)고 말씀합니다. 주인의 판단과 칭찬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

1) 1-8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부자와 청지기의 일화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9-12절이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하시고자 한 말씀입니다. 후반부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요지요 결론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은 9절과 10-12절로 구분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너희가 죽을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들로 영접하리라.』는 9절 말씀에서 주의할 것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결과가 죽을 때 영원한 거처들에 들어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거처들은 부정적 의미의 지옥이 아닌데, 제자들을 향해 그들이 가는 곳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사귄 친구들이 영원한 거처들에 가고, 그들이 불의의 재물로 자신들을 사귄 사람들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상황이 십자가 이전의 구약이라는 사실과 제자들, 즉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마 5-7의 산상설교와 같이) 대환란의 상황을 말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가 영원한 거처들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은 구약과 대환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1-8에서 관련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이제 오라, 너희 부자들이여, 너희에게 닥칠 재난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의복은 좀먹었으며 3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들의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한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일꾼들에게 속임수로 주지 않은 품삯이 소리지르며, 추수꾼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는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하였도다. 너희가 살육의 날처럼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가 그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분은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시느니라.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래 참나니 8 너희도 인내하며 마음을 견고케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

이 구절들에서 부자들에 대한 말씀은 현재의 교회 시대가 아니라 대환란 시대의 부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에게 닥칠 재난을 말씀하는데, 이것은 마지막 날들을 위한 재물이라고 말씀합니다(3절). 그런데 대환란 때에 자신들의 재물을 지키려면 적그리스도에게 순응해야 하지만, 적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은 그 재물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재물을 가지고 형제를 돕는 것이 대환란 때 구원받는 조건으로 제시됩니다(약 2:14-20을 주의깊게 읽어 보십시오). 마태복음 25장에서 민족들을 심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마 25:31-46을 주의깊게 읽어 보십시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유대인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대환란 때의 행위는 구원과 상 및 유업을 받는 것에 연관됩니다. 반면 교회 시대의 행위는 구원과는 상관없고 오직 상과 유업에 관련됩니다.


누가복음 16:9과 연관하여 살펴볼 말씀이 누가복음 14:12-14에 있습니다. 『12 또 주께서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점심이나 저녁을 마련하거든 너의 친구들이나, 형제들이나 친척들이나 부유한 이웃들을 청하지 말라. 혹 그들도 너를 다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함이라. 13 잔치를 베풀려거든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부르라. 14 그러면 네가 복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에게는 네게 갚아 줄 것이 없으므로 의인들의 부활 때에 네게 갚게 될 것임이라.”고 하시니라.』 재물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의인들의 부활에 참여하고, 재물을 베푼 사람도 의인들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들이 재물을 베푼 사람에게 갚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들 역시 구약의 상황이며, 동시에 왕국에 앞선 대환란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편 누가복음 16:9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 중에 “불의의 재물”이란 1-8절의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불의하게 사용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권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참된 재물”과 대비되는 표현입니다. 11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로도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 신용에 맡기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참된 재물은 왕국에서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불의한 재물이란 왕국 이전에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땅에 속한 재물을 말합니다. 만일 불의한 재물을 참된 재물과 대비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면, 불의하게 재물을 모아서 그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재물에도 신실함을 보이지 못한 사람은 왕국에서 주어지는 재물에 신실함을 보일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10-12절에서 “신실한”이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사용하시며 제자들이 신실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신실하다고 말씀하셨고, 또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남의 것에 신실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몫이 주어지겠느냐고 반문하심으로써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신실해야 이후에 주어지는 것에도 신실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환란 때에는 행위가 믿음과 상(유업)에 다 적용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재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 즉 형제들, 특히 유대인들을 돕는 데 사용하면 왕국에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구원과 상 모두를 의미합니다. 한편 누가복음 16:1-12과 다르게 교회 시대를 향한 말씀은 디모데전서 6:17-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7 이 세상에 있는 부유한 자들에게 명하여 마음이 교만해지지 말고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요하게 주셔서 향유케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라고 하라. 18 곧 그들이 선을 행하고, 선한 일에 부요하며, 기꺼이 나누어 주고, 아낌없이 베풂으로써, 19 자신들을 위하여 오는 때를 대비한 좋은 기초를 쌓도록 하라. 이는 영원한 생명을 붙들기 위함이라.』 19절에서 말씀하는 “오는 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행위는 상과 유업에 적용됩니다. 19절 끝의 “영원한 생명을 붙들기 위함이라”는 말씀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모데전서 6:12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라. 이를 위하여 네가 또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으로 고백하였느니라.』 영원한 생명을 붙잡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이 상을 받기 위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개된 <개역성경>은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또 “영생을 취하라”고 변개하여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12은, 특히 9-12절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진리로 믿고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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