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사도행전 주석 분류

주의 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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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11월호>

•사도행전 5:1-42•



5:1-11 『한편 아나니아라고 하는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대금의 일부를 감추니, 그의 아내도 그 일을 알더라. 그런데 얼마를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놓더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 또 토지 대금 일부를 감추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도 네 것이 아니었느냐? 또 팔린 뒤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느냐?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였느니라.”고 하니... 큰 두려움이 온 교회와 이 사실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니라.』

사도행전 5장은 바나바를 흉내내고자 한 아나니아 부부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자기 소유를 팔아 그 중 얼마를 숨기고 속여 최후를 맞는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큰 두려움이 온 교회와 이 사실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11절). 디모데전서 5:20이 본문에 적합한 구절이다(『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하여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
『아나니아』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며 『삽피라』는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한다”는 원칙에 의해 그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 부부는 바나바처럼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행 4:37) 바나바가 했던 것처럼 (행 4:37) “얼마를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2절) 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과정이 약간 다르다. 바나바는 “그 대금을”(4:37) 가져 왔다. 이것은 그가 판 돈 모두를 가져왔음을 나타낸다. 반면에 가져온 양과는 상관없이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그 대금의 일부를 감추었다(2절). 사실 아나니아는 그가 원하는 만큼을 가져올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원했다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땅은 그가 그것을 팔기 전에도 그의 것이었으며 그것을 판 후에 그 돈도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4절). 그 누구도 그에게 어떤 것을 주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며(고후 6-11장),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얼마를 가져오라도 요구받지 않았다. 그는 소량만을 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어도 그것은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더욱 깊어진다.
그 교회에는 성령(Holy Ghost)께서 활동하고 계셨다(행 4:8; 4:31; 2:4을 볼 것). 3절과 4절을 비교해 볼 때 성령(Holy Ghost)은 하나님이시다. 『... 성령(Holy Ghost)께 거짓말하게 하며... 거짓말을... 하나님께 하였느니라』(3,4절). [고린도후서 3:17에서는 성령(Holy Spirit)이 “주”(Lord)로 불리고 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位)시다(마 28:19, 20 참고). 그는 요한복음 15:26에서처럼 위로자이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4:17에서처럼 진리의 영이시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성령으로 충만”했었으나(행 4:31) 이 충만함은 “사탄으로 충만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3절).
한편 은사주의자들은 위의 본문을 들어 구원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한다.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가장 많이 걱정하는 사람들은 요한일서 3:9을 인용하며(『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리스도인은 죄가 하나도 없이 완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누구도 위의 본문이나 고린도전서 5:1-8에서처럼 사탄이 믿는 자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영적 위선자들이다. 그들이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든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주님 대신 마귀가 자신들을 다스리게 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것과 같이(고전 11:30, 요일 5:17) 그들도 죽은 것일 뿐이다(롬 8:13). 이들이 구원받지 않은 유대인으로서 지역교회에 돈을 줌으로 믿는 사람인 체 행세할 만한 가능성은 전혀 없다(13절을 볼 것).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 구성원들의 약 20%를 대표한다. 그들은 “교회의 경영자들”로 영적인 성도들이 자신들을 세속적이지 않고 하늘의 마음을 가진 자로 여겨 주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일 아침에 엄청난 금액을 헌금으로 드리는 수천 명의 구원받은 기독 실업인들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위대한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십일조는 저울에 달았을 때 과부의 동전 두 닢보다 더 무겁지 않다. 불구자가 그리스도께 드리는 적은 돈이 건강한 의학박사가 연보함에 넣는 큰 돈보다 더 귀한 것이다(막 12:42,44).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십자가를 짊어진 자들”이라는 명성을 얻기 원했다(막 8:34). 그들은 회중이 생각하기를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드렸다고 여기기를 원했다. 아나니아와 삽피라 같은 사람들도 영적인 사람들과 함께 계수되었으며 그들 사역의 일부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마귀’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행 1:17) 성도가 왜 못하겠는가?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3절). 죄는 “마음”(4절)에서 구상된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잠언> 4:23 주석 참조, 1972).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4:1-4에서 죄를 짓는 과정의 아우트라인을 잡아 주는데, 죄는 명백한 행동이 범해지기 오래 전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나니아는 그가 돈을 교회에 가져오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는 부동산을 팔기 전에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와 그의 아내는 “주의 영을 시험하려고 공모”했다(9절).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세부 계획이 세워졌다. 그들의 죄는 다음의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1.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4절)
2. 성령께 거짓말하는 것(3절)
3.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9절)
4.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것(8절)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간음이나 살인, 도둑질, 교회를 떠나는 일, 이혼, 자살 등을 하지 않고서도 “죽을 죄”를 저질렀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위선을 부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오늘 모두 치신다면 여러분들은 장례식에 참석하느라고 성경을 가르칠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관 속에서 쭉 펴지기 전까지는 결코 바로 잡혀지지 않는다.

5:12-16 『또 사도들의 손으로 많은 표적과 이적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니,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더라. 그 나머지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감히 그들에게 동참하지 아니하였으나, 백성은 그들을 칭찬하더라... 무리가 예루살렘 근처 성읍에서 병든 자들과, 더러운 영들에게 괴로움 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모두 치유되더라.』

이 구절은 사도적 권위로서 주어진 표적과 이적을 완벽하게 요약해 주고 있는데, 그들의 표적과 이적은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은사주의자들은 안수나 아픈 곳에 손을 댄다든지 하는 “접촉점”을 중요시하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50이나 마태복음 8:13에서 어떤 “접촉점”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접촉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사도들의 표적”은 “천사들의 방언”이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또한 사도들의 치유에는 불발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병자가 치유되었다. 사도들은 텐트나 교회로 사람들을 데려오지도 않았고, 그들에게서 헌금을 걷지도 않았다. 회중을 수동적인 상태로 만들기 위한 오르간 연주도 없었으며 그들 중 누구에게도 “믿기만 하라!”는 노래를 부르며 “나을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5:17-28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한 모든 자, 곧 사두개파가 분노로 가득 차서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더라. 그러나 주의 천사가 밤중에 감옥문들을 열고... 경비원들이 거기에 갔으나, 감옥 안에 그들이 없는지라...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보소서, 당신들이 감옥에 넣은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들을 데리고 와서 공회 앞에 세워 놓고, 대제사장이 물어 말하기를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너희에게 엄하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보라, 너희가 예루살렘을 너희의 교리로 가득 채워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려 하는도다.”라고 하니라.』

부흥 뒤에는 반대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법이다(마 14:1-15, 행 13:45).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사두개인들은 분노로 가득찼다(17절).
“파”(sect, 17절)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분파이다(행 24:5 주석 참조).
『이 모든 생명의 말씀』(20절)은 부활하신 구세주의 부활한 생명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마지막 심판과 마지막 부활 이전에 몸의 부활이 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행 4:2 주석 참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원로(senate)』(21절). 이것은 산헤드린(행 22:5)보다 훨씬 큰 종교 거물들의 단체를 언급하는 것이다. 로버트슨은 “원로”를 산헤드린의 한 부분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단어의 헬라어는 노인들, 즉 장로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22,23절의 내용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죄수들”이 감옥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잠겨진 문을 통과해서 나갔거나 벽을 통해서 나간 것이 분명하다. 경비병들은 밖에서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으나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시 잡혀온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라는 심한 압력이 가해진다(행 4:18,21). 그들은 단순히 “이 모든 생명의 말씀” 때문에 제자들을 박해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군중들을 선동해서 마태복음 27:25을 외치도록 했던 자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피값”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이미 그들 위에 있었으며 그것은 누가 무슨 교리를 설교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제사장은 구약의 진리를 “너희 교리”(28절)라고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 시대에 있었던 에큐메니칼 공회가 성경을 바룩의 교리(렘 43:3)라고 불렀으며 유대인들은 그것을 바울의 교리(행 24:5)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무오성을 경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교리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아내는 데(요 7:17)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무엇을 해야할 지를 말씀해 주셨다. 정직한 사람 치고 어떤 교리가 성경적 교리인지 아닌지를 24시간 내로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5:29-32 『그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 이분을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셔서 왕과 구주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이라.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그의 증인들이요, 또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하더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29절)(출 1:22, 마 22:17 주석 참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로부터의 능력을 입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한 명령을 주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마 28:18-20). 그렇기 때문에 산헤드린과 원로가 대적하더라도 그들은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30절). 사도행전 5:17을 보라. 시몬 베드로는 서두도 없이 말씀의 칼로 그들을 베고 찌르고 있다.
검사가 범죄자에게 말한다. “지난 달에 송달된 법원 명령을 받았는가?” 피고가 대답한다.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더러운 죄인들아,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30절). 베드로는 그들을 1급 살인죄로 고소한다(행 4:10). 그리고 그는 성령께 이끌림을 받아서 다니엘이 말했던 “왕”(Prince 단 9:25)이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그리고 침례인 요한의 메시지였던 회개와 죄들의 사함을 반복한다(행 2:38 주석 참조).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그의 증인들이요』(32절, 사도행전 1:8 주석 참조). 이것은 오직 진리만을 말하기를 맹세한 피고의 말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는 말로써 진리를 확증하는 데 필요한 두 번째 증인(신 19:15)도 제시된다(히 2:4 참조). 그러나 그들은 성령께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행전 2:38에서의 “순종”은 물침례였다.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까지 구원받지 못한 캠벨파 목사들은 그 장을 떠나지 못한다. 율법 아래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은 성령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성령은 오직 믿음(행 10:44)으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롬 1:5; 16:26) 신뢰함으로써 오직 믿음만으로(롬 4:5) 받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그 어리석음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처럼(잠 27:22) 캠벨 추종자를 그 마술 물웅덩이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5:33-42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의논하니라. 그때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한 바리새인이 공회 중에서 일어서니... 그러자 그들이 가말리엘에게 설득되어,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한 후에 놓아주니라... 그들이 성전에서나 각 집안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쉬지 않더라.』

여기 존경받는 “율법 박사”가 등장한다. <미쉬나>(Mishna)는 라반 가말리엘이 죽었을 때 순결과 절제와 율법에 대한 경외심도 함께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더멜로우는 그가 할렐의 손자이며 “라반”(랍비보다 더 우위의 직책)이란 칭호를 받은 일곱 교사 중 첫째인 랍비 시므온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반면 누가복음 5:17은 그를 구원받지 못한 랍비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지혜의 “설교”는 필로와 공자 중간쯤에 있다. 여기가 그가 했던 충고는 “정의가 승리한다”, “계속 두고 보자”, “앞으로 될 일이 말해 줄 것이다”라는 정도의 깊이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 퍼진 가말리엘의 명성은 현혹시키는 행위에 근거한 과장된 칭찬인 것이다.
하지만 가말리엘의 충고는 효과적이었다.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내버려 두라”(38절)고 말했다. 즉 이 율법 박사는 그런 제안을 하는 데 대한 논리적 이유도 없이 적절한 제안을 한 것이다.
『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모욕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하며』(41절). 이것은 누가복음 6:23의 지시사항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시기, 이기심, 신뢰의 부족, 기질, 수다스러운 입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벧전 2:20)을 아신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위해 고난받을 기회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우리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면(요 16:33) 옳은 것을 위해 고난받아야 하지 않겠는가?(벧전 2:19-21)
5장 마지막에는 가가호호 방문해서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그들의 아버지의 일” (눅 2:49)을 하는 사도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에 그와 같은 모습은 성전 경배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가호호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며 전파하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훌륭한 구령 방법으로,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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