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사도행전 주석 분류

담대한 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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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9월호>

사도행전 4:1-22


4:1-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책임자들로부터 사두개인들이 그들에게 와서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예수를 통하여 전파하는 데 격분하여서 그들을 체포하여 그 다음 날까지 가두었으니, 이는 그 때가 이미 저녁이었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믿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더라.』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전파하는 데 격분하여서』(2절).
디도서 1:12의 “악한 짐승들”과 “게으른 탐식가들”, 사도행전 20:29의 “이리들”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세기 동안 바티칸에 경의를 표하지 말도록 가르치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이단”들이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하다. 벌링거 추종자들은 침례교회에서 교인들을 빼내오기 위해 “물침례는 없다”라고 가르친다. 캠벨 추종자들은 “침례에 의한 거듭남”을 가르침으로써 행위로 인한 구원을 믿게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옥이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구원의 확신이 없는 감리교인들과 침례교인들을 끌어들인다. 순복음 교단은 감독교인들과 카톨릭 교인들에게 “방언과 치유”를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성경의 권위 대신 경험을 기초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끌어들인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하다. 사도들은 “죽은 자들로부터의(from) 부활을 예수를 통하여 전파”했다(2절).
문제는 바로 그 전치사(from)에 있다. 사두개인들이 어떤 형태의 부활도, 심지어 죽은 자들의 부활(행 23:8)까지도 강력히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원로”(행 5:21)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격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바리새인들도 포함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무천년주의 해석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마르다와 마찬가지로(요 11:24) 마지막 때의 전체적인 부활과 심판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증오했던 것은 마지막 심판(계 20:1-6) 이전에 죽은 자들“로부터”(from) 어떤 이들이 살아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가르침이었다.
전천년주의는 하나의 성경 해석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19세기 동안 증오되고 무시되어 온(막 9:9,10을 볼 것) 진리이다. 그것을 마지막 심판 전에 두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심판대에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도 이 교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총체적인 죄들이 총체적으로 심판받는 총체적인 부활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심판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3:25,26; 10:1-4).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행 17:31)은 그 의가 심판 때에 있을 어떤 죄인의 의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보다 먼저 부활할 것이다(롬 10:9,10을 볼 것).
이것이 바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붙잡혀서(3절)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이다. 관찰력 있는 독자라면 베드로가 2시간 동안 설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3:1과 4:3 비교). 그는 청중의 죄와 무책임, 무지, 살인(행 3:13-16)을 강력히 지적하면서 메시지를 시작했다.
믿는 자들의 수는 이제 5,000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2시간의 메시지 후에 약 2,000명이 개심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개심한 사람 중 아무도 방언을 했다거나 즉석에서 침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4:5-12 『그 이튿날 예루살렘에는 그들의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또 대제사장의 친족이 모두 참석하여 두 사도를 가운데 세워 놓고 그들이 묻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였느냐?”고 하더라.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관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여, 오늘 우리가 불구자에게 선한 일을 행한 것에 관해서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느냐고 심문을 받는다면 너희 모두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처형하였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온전하여져서 너희 앞에 서게 되었느니라. 이 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쓸 데 없다고 제쳐 놓은 돌이었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고 하더라.』

반대하는 자들도 증가하고 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책임자들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이제는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까지 포함되었다.
『...대제사장의 친족이 모두 참석하여...』(6절).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제 안나스, 카야파, 요한, 알렉산더 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이다. 누가복음 3:2은 이 구절에 있는 무리 중 두 명을 언급하고 있다. 카야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고 믿었던 요한복음 11:49의 선지자이다. [이 같은 믿음은 공민권법(1964)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사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 사도 시대의 에큐메니칼 공회가 의지했던 “숫자 상의 안전성”은 결코 불못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였느냐?』(7절).
이 위선자들이 나타날 때마다(마 21:23, 막 11:28, 눅 20:8, 요 5:27) 그들은 항상 권세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천 명을 먹이고(마 14:21), 수십 명이 치유되고(마 8:16) 죽은 자들이 살아났음에도(요 11:20-50),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뇨?”(마 21:23)이다. 학위를 어디서 얻었지? 서명을 좀 보자구! 어떤 교단에 속하지? 어디서 위임을 받았지? 출판사는 유명한가? 누가 임명했지? 무슨 학교를 나왔지? 누가 파송했지? 목사는 누구지? 사역은 얼마 동안 했는가? 인가받은 신학교겠지? 협회에는 소속이 돼 있나? 주교가 추천을 할까?...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였느냐?”
카야파와 안나스, 요한, 알렉산더는 이번에는 사슴 대신 회색곰을 잡았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의 베드로는 너무나 우둔했다(요 13:8, 마 16:22).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8절) 그의 대답은 질서정연하다.
『백성의 관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여』(8절)
이번에는 머뭇거리거나 불평하는 것도 없으며(마 26:70) 분노에서 터져나온 저주도 없다(마 26:74). 베드로는 큰 소리로 정연하고도 공식적인 입장에서 반대파를 정면으로 겨냥하여 그들의 영적 눈멈과 직무 태만, 성경에 대한 무지와 살인(10절)을 비난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시편 118:22을 인용한 것이다. 그 구절은 산헤드린이 자신들이 죽였던 사람의 입에서 들었던 바로 그 구절이다. 마태복음 21:42-45를 보라.
직업 어부인 베드로가 그들을 사정없이 해치웠으며, 그들이 “숨겨진 손길”이 그와 함께 했다는 것을 즉시 인지했다는 사실은 13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시편 118:22를 인용해서 그들을 살인자로 고소한 사람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옛 친구 시몬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11절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에(마 21:42-44) 설명되어 있다. 이 머릿돌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놓여지는 돌을 말한다. 그것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돌이 와서 놓여지는 때와(마 21:42) 와서 피라미드를 세우는 자들을 부숴뜨리는 때(마 21:44) 사이에 하나의 중간 시대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에게 왕국이 연기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자료를 통해 입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11절). 그러나 그 ‘돌’은 다니엘 2장 이후에야 다시 내려올 것이다. 그때 그 ‘돌’은 유럽에 세워지고 있는 열 개의 실제적이고 눈에 보이며 정치적인 로마 카톨릭 왕국들을 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12절).
이것은 신약적인 구원에 대한 위대한 선포이다. 12절에서 “우리”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하늘 아래서...다른 이름을...주신 적이 없음이라”는 말씀이 덧붙여진 것은 로마서 10:14-16의 전조가 된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내용과도 유사하다(마 1:3,5; 13:14; 6:33 주석 참조). 이러한 삽입구들은 유대인들을 향한 감추어진 경고이다.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13절)이라는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이 부적절하다고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담 클라크(Adam Clark)이다. 빈센트(Vincent)와 로버트슨(Robertson)도 그 말을 몹시 싫어했고, 브루스(Bruce), 얼(Earle), 카터(Carter), 웨스트(Wuest), 래드(Ladd)도 이 단어들이 적절치 않으며 NASV처럼 “교육받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으로 돼야 한다고 말한다.
산헤드린의 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직업 어부들은 배우지 못했고 무식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기독 대학에서 교육받은 산뜻하고 교양있는 젊은이들만을 사역에 부르시며,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대학 입학이 보장된 사람들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나 요한, 예레미야, 베드로, 느헤미야, 미카 같은 사람들은 더 이상 부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만이 자격을 갖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랍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바울의 언변은 “서툴고” “약했다”(고후 10:10). 더구나 구원받은 후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다시 복학하지 않았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사야 29:21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고 있던 그들의 고소자들의 눈에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촌뜨기들한테 생각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설교하지는 않을텐데, 그들은 무식한 사람들이야.”라고 생각했다. 물론 베드로의 갈릴리 사투리(마 26:73)는 그가 촌뜨기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배우지 못한” 자였다. 그는 연설 중에 호흡을 가다듬을 줄도 몰랐고, 글을 쓸 때면 알아보기 힘들게 썼다. 그는 “분노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오싹할 정도였다. 그는 속어를 썼다(로마서 16:18을 볼 것!!). 그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분명히 그는 “배우지 못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했다. 죽은 정통주의의 상투어구는 “하나님은 무지를 존중하시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교육을 높이시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일을 시키기를 원하실 때 교육받은 것을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다.
『그때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자』(13절).
서로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그들의 재치나 상냥함도 아니다. 원어에 대한 지식도, 그들의 훌륭한 인격도 아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그들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자”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비 수집가가 아니었다. 그분은 사자를 길들이는 분이셨다(딤전 1:13). 그분은 남을 저주하는 시몬 베드로, 살인자 모세, 간음자 다윗, 신성모독자 바울, 개심한 갱 두목(킬러 벅 Burke), 개심한 마약 우두머리(프레디 게지 Freddie Gage), 구원받은 창녀(라합), 설교하는 노예 밀수업자(존 뉴톤 John Newton), 포효하는 엘리야, 야만적인 입다, 잔인한 아모스, 말다툼하는 느헤미야, 개심한 레슬링 선수(스트랭글러 루이스 Lewis), 복음전파자 야구선수(빌리 선데이 Billy Sunday), 그밖에 피를 보고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낙스, 사이클론 맥, 휫필드, 먼스터, 테넌트 등), 즉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방울뱀에게 침을 밷을 수 있는 사람들을 “길들이셔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담대함”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6:19,20에서 이 위대한 신약의 진리를 잘 말해 주고 있다.
15절에 나오는 회의는 “분리를 일으키는 일들”(잠 18:1,2)로서, 요한복음 11:47과 마가복음 3:6에서 진행되었던 비밀스런 일과 연관된다.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한다. 진리와 의의 가시적 증거는(요 11:20-46 참조) 고의적으로 거부하고(16절) “편의주의”(17절)를 표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라는 실용주의 철학이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A.D. 70)을 가져온 원인이었다. 15절에서는 “공회”(15절)가 다시 나타나는데(행 23:1,6,15,28 참조), 공회의 역할은 마귀가 맡긴 일을 수행하는 것, 즉 성경의 진리가 전파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 “비밀스런 회합”에서 그들은 사도들의 사역에 주께서 함께하심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명백함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그를 위협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천국의 문을 닫아서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막는다(17절 참고).
데살로니가전서 2:14-16에서 바울이 한 말은 사도행전 4:18에서 우리가 읽은 것이 나중에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그들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 “이름”이었음을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한다(17,18절, 5:42).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 이름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받게 해 주는 서명이다(요 14:14). 그 이름은 유대인 사회주의자들과 산헤드린에 의해 공격당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 넣으신 최초의 원본”을 믿는 전천년주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도 공격받고 있다. 케네스 웨스트(Kenneth Wuest)와 로크만 재단은 어떠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못지 않게 “그 이름”에 손상을 입힌다[<확대번역, An Expanded Translation> 웨스트, 빌립보서 2:9-10 참조].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대답하여 말하기를...우리는 보고 들은 일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19,20절).
이것은 결코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행 4:21,24,34) 나무랄 데 없는 증인들의 명백한 증언이다. 한편 산헤드린은 진리가 폭로되지 않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위협할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마 21:26)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통해 영광을 취하시는 것에 분개했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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