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히브리서 주석 분류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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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2월호>

▶ 히브리서 6:1-20 ◀



6:1-6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의 기초를 떠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리니, 죽은 행실들에서 회개함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침례들과 안수함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리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니라. 실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깨우침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

본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히브리서에서 가장 많이 걸려 넘어지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서 휘청거리는 이유는 이 부분을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교회시대를 향해서만 기록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경륜은 결코 교회만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 전체에서 볼 때 교회의 경륜은 일부라는 것이다. 교회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을 영적으로 교회에 적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헌신도와 성숙에 맞추어 설교도 하고 거울로 삼을 수도 있지만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문자적으로 한 가지 해석만을 취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본문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적용하면 많은 문제점들이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말하는 바울 서신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로마 카톨릭이나 감리교도들이 취하는 해석, 즉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해석이다. 본문을 통해 볼 때 구원받은 누군가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하다. 이것이 얼마나 확실한지 요한 웨슬레마저도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성경적인 교리인 줄 알았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는 카톨릭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여, 이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경우에 있어서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다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6절) 그들은 다시 영접시켜 구원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교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말하고 있는 바울서신과 “모순”되는 이 구절들을 억지로 해석하곤 한다. 우리가 잘 아는 M.R. 디한(M.R. DeHaan)은 본문을 8절의 “불타는 것”과 연결시켜 해석하면서(『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서,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기 때문이라』 8절), 불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일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일들을 고린도전서 3장과 연결시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성도들의 공력이 그 지은 것에 따라 불에 타버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마지막에 불타 버리게 된다는 구약의 마지막 말씀을 완전히 간과해 버린 것이다(말 4:1-4). 사무엘하 23장에는 재림과 “불타 버림”에 대한 다윗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23:4의 “해 돋을 때의 아침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을 나타내고, 6,7절은 재림 때 악인이 받을 형벌을 묘사한다. 『그러나 벨리알의 아들들은 모두 내다 버린 가시나무 같으리니... 그것들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불태워지리라』(삼하 23:6,7). 이때 불태워지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일들”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다.
올리버 그린(Oliver Greene)이라는 사람은 본문을 하나의 “가상의 상황”으로 설정해 버린다. 사실 어떤 침례교도들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세운 가상의 상황은 이렇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절대로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으나, 만약, 정말로 만약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절대로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칼빈주의자인 아더 핑크(Arthur W. Pink)는 어떠한가? 그가 세운 상황은, 본문에 제시된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령의 동참자”일 수는 있으나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핑크는 “동참자”(partakers)라는 말을 “동료”(companions)라는 말로 대체한다. 즉 그들은 진정한 “내적인 동참자”가 아니라 “외적인 동참자”일 뿐이라는 말이다. 결국 핑크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원래부터 택함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기에, 교회는 다니고 입으로는 고백할지라도 결국은 떨어져 나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4절이나 5절에서 하늘의 선물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봤다”는 것도 실제로 하늘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맛만 봤다”는 말로 이해한다.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맛만 봤을 뿐” 실제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기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맛본다”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참여하고 경험한 것을 가리킨다. 만약 이 “맛보다”는 말을 핑크 식으로 해석한다면 히브리서 2:9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단지 죽음을 살짝 “맛만 보셨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도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히 2:9).

자, 그렇다면 본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자기들의 교리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학자들을 뒤로 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보자.
1. 이 책의 독자는 히브리인들이다.
2. 그는 구원받은 히브리인이다.
3. 하지만 그는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4. 그가 비록 “성령의 동참자”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견딤으로써만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될 수 있다.
5. 그는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인데, 그 세상이 오는 것은 사도들의 표적과 이적으로 특징지워진다. 성경에서 “오는 세상”은 항상 “천년왕국”을 가리킨다.
6. 그는 멸망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은 마치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애굽한 많은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한 것과, 또 카나안 땅에 들어간 많은 백성들이 배도해 나간 것과 같다.
7. 그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고, 그러면 다시 구원받을 수 없게 된다.
8.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불타는 심판이 그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10:26-31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심판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의 본문은 교회시대를 뛰어넘어 환란시대에 적용된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고찰한 바 있지만 환란시대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 시대는 교회 시대와는 여러 모로 다르다. 교회 시대에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 안에 들어가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지만 환란시대에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떠나실 수 있다. 교회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땅에 있지만 환란시대에는 교회가 휴거되고 없다. 이에 따라 교회시대에는 역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지만 환란시대에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역사의 중심이 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다루시는 경륜 속에서는 반드시 표적과 이적이 수반된다. 이 표적과 이적은 왕국복음과 직결되는데, 이 복음은 교회시대에 전파되는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은혜의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왕국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이 주로 다루어진다. 이 왕되심은 영적으로 성도들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왕되심은 구약에서 누누이 예언되었던 대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서 왕되신 예수님께서 직접 몸을 입고 정치적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실제적인 왕되심이다. 이 왕국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제시된 것은 유대인들에게이고, 이 왕국 역시 아브라함 때부터 유대인에게 제시되었다. 환란시대는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때로, 교회가 휴거되어 없기 때문에 구약과 연속선상에 있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환란시대는 구약시대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끝까지 견디는 그들의 행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나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결코 회복될 수 없다. 이러한 분명한 성경적 진리가 히브리서 3,4,6,10장, 마태복음 24,25장, 요한계시록 2,3,12,13,14,22장, 야고보서 5장, 유다서와 데살로니가후서 2장 등에서 명확히 제시된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면 이 진리를 명확히 나타내 주는 본문들에서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헬라어 지식에서나 학자들의 궤변에서나 로마 카톨릭의 사적인 해석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한 단어 한 단어를 그대로 믿음으로써 이 진리를 얻는다. 이 모든 본문들은 교회시대에 해당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7장에서 왕국복음이 멈췄다가 2000년 간의 교회시대를 뛰어넘어 환란시대에 적용되는 본문들이다.
물론 아무리 환란기간을 다룬 본문일지라도 영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거울이 될 수는 있다. 1절에서 “온전함”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장에서도 다루었지만, 새로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고 그 다음에는 이유식과 밥과 채소를 먹고 자라며 성인이 되어서는 질긴 고기를 먹을 수 있듯이, 새로 거듭난 성도들도 처음에는 우유같은 말씀으로 양육받다가 점차로 빵 같은 말씀, 꿀 같은 말씀, 그리고 장성해서는 고기 같은 질긴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 6:1-2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해 주고 있다. 죄인이 거듭났다면 그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기초 교리들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더 온전한 것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권면받는다. 그는 침례나 죽은 자들의 부활이나 심판에 관한 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젖”이다. 이제 그는 더 질긴 말씀으로 양육받으며 그리스도의 군사, 영적 전쟁의 전사로 우뚝 서야 한다. 이것이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6:13-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두고 맹세할 이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며,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또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하셨더니, 그가 그처럼 끈기 있게 견딘 후에, 그 약속을 받았느니라. 실로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이를 두고 맹세하나니, 확정을 위한 맹세는 그들에게 모든 다투는 일의 종결임이라.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기의 뜻이 불변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확정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하여, 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잡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 나온 우리로 든든한 위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혼의 닻같이 가졌으니, 확실하고 견고한 소망이라. 이로써 우리 혼이 휘장 안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나니, 선두주자이신 예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그곳으로 들어가시어,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느니라.

마지막은 다시 히브리서의 큰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주제로 넘어간다. 이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방인 셈족 제사장인 멜키세덱을 등장시켰고, 이와 관련해서 이방인이며 히브리인인 아브라함을 등장시킨다. (아직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맹세로 확정받은 “약속의 상속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 왜냐하면 맹세를 할 만한 더 큰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약속의 상속자들』(17절)은 두 가지 부류로 적용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인데(갈 3:14),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인 이삭의 영적인 씨로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이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에 따라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창 15:18-21). 영적인 자손들도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의 영적인 자녀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진다는 그 약속과 아브라함이 누리는 영적인 언약에 대해서만 참여할 수 있을 뿐, 그에게 주어진 “땅”에 관한 언약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팔레스타인 땅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인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께서 통치하실 때 그 땅을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 이르러 그 땅에서 다윗의 보좌를 영원히 세우시겠다는 언약으로 이어진다.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는 메시야 왕의 왕국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들인 “약속의 상속자들”이 누릴 실제적인 축복이다.
이 사실은 『자기의 뜻이 불변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확정하셨으니』(17절)라는 말로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불변하겠다고 하시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그 땅이 약속되었다면(창 17:8) 그 땅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속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율법 이전의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다. 중간에 끼어든 율법은 이 약속을 바꿀 수 없으며(갈 3:17-21)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그 약속은(유업이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땅”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중간에 어떠한 세대가 어떻게 바뀌었든지 간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하여』(18절)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약속과 맹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분의 속성으로 분명하게 확정지으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다면 그것은 선하신 것이다(민 23:19). 그분의 약속은 속이거나 잘못 인도하도록 고안되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그릇되이 인도하실 것이다(미 2:11).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학자들 또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도할 것이다(겔 14:1-10).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죽음에 던져 넣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을 허락하시기도 했다(왕상 13장). 그분은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미혹의 역사를 보내실 것이다(살후 2:11,12). 하지만 그분은 “약속”에서 만큼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잡기 위해』(18절)
이 “소망”도 두 가지 적용이 가능한데, 이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자 또한 환란 성도들의 소망이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다(빌 3:20,21, 요일 3:1-4). 물론 이것은 환란 이전에 휴거될 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눈깜짝하는 순간”에 변화되어 새로운 몸을 입는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고전 15:49-55). 마찬가지로 환란성도들도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다(히 11:35). 물론 이것은 대환란 이후에 있을 것이고, 땅을 유업으로 받는, 왕국을 상속받는 사건과 직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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