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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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붙잡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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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9월호>

<본문 : 히브리서 3장 1-6절>



3:1-6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신실하기를 마치 모세가 그분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그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아 마땅함은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한 것과 같으니라. 어떤 집이든 누군가가 지었으나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또 모세는 실로 장차 말하여질 것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 그분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이니, 만일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


3장에서 우리는 모세와 비교하여 월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1장과 2장에서는 천사보다, 아담보다 더 월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절).
“참여하는 자”(partaker)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6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성경에서 “사도이며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예수님 당시에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바로 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로마 카톨릭은 베드로를 “사도들의 왕”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칭호를 자기들의 교리에 따라서 베드로에게 주고 있다.
“대제사장”도 마찬가지다. 구약에 많은 대제사장들이 있었으나 “바로 그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이다. 로마 카톨릭은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받으실 칭호를 찬탈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성직자들을 제사장(priest)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이며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신실하기를 마치 모세가 그분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2절)
성경에서 “집”(house)이라는 말은 몇 가지 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사람의 몸을 집이라고 표현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1에서 몸을 땅에 있는 장막 집으로 묘사한다. 또한 “집”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성전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그분의 집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서 “집”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집”을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라는 표현을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집은 “가족”(household)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핏줄과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이 “집”은 이스라엘의 집을 가리킨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집안을 신실하게 관리했다. 또한 이 집은 그분의 집,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린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안을 관리하라고 세우셨을 때 신실함으로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주인(하나님)의 집을 맡은 종으로서 신실하였던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에서 “아들”로서 신실하셨다(5,6절).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면에서 비교되는데,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종과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로 비교가 된다.
물론 모세는 모든 면에서 신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에서 나타난 가장 큰 오점은 백성들에게 분노하여 바위를 두 번 친 일이다(민 20:11).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모세는 카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 실수가 아니라,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번 치심을 받아야 할 것을 두 번 치심을 받을 것으로 그 모형을 잘못 제시한 큰 실수였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처럼 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집에서 신실하다고 여겨진다. 그는 성막과 율법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모든 일에 대해 신실하였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와 같은 표현들을 자주 읽게 된다(출 39:32; 40:19, 레 8:4 등).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를 신실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민 12:7). 그러나 민수기 20장에서 모세가 실수하여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3장에서 그를 신실하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큰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신실하다고 여기시는 그 판단 앞에서 모세의 잘못은 간과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들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사라의 잘못이 간과되며,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위대한 표적으로서 요나를 제시하며, 야고보서 2장에서는 창녀 라합에게 큰 점수를 준다(약 2:25).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삼손의 부도덕성이 간과되어 있고, 로마서 9:13에서는 야곱의 거짓말이 간과되어 있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을 볼 때 그들에게서 많은 실수들을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등도 포함시키는데(히 11:32), 성경은 이들을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들의 잘못들이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간과된 것이다. 신약성경은 구약에서의 죄들을 없애 버리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대한 은혜의 교리이다.

『그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아 마땅함은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한 것과 같으니라』(3절).
여기서 모세와 비교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4절에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신성과 연계되어 설명된다. 이 “집”을 구원받은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본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시니 교회를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욱 존귀하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골 1:13-19).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자기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종의 위치로 사역하시기도 했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되심이 아니라 아들되심이다. 그리고 그분을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항상 그 분의 신성을 말하는 것이다(요 10:29-30).

『또 모세는 실로 장차 말하여질 것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 그분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이니』(5-6절).
모세의 역할은 장차 말하여질 일들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장차 되어질 일들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제시된다. 그가 하는 사역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요한복음 6:32-33에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세가 하늘에서 빵을 내려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참된 빵을 내려 너희에게 주시나니 이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먹게 한 그 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그 빵의 모형이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제시되셨다 (신 18:18). 모세가 책망받은 유일한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다루는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민 20:7-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위에다가 단지 말하라고 하셨을 뿐인데 모세는 바위를 두 번이나 친 것이다. 바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고전 10: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한 번만 치심을 받게 된다(히 10:8-12).

『만일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6절).
본문은 교회시대에 적용될 수 없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하나님의 집”은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 그분의 몸(골 2:9), 그분의 살과 뼈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 1:23; 4:15-16; 5:30), 바로 그 몸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몸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받았다(롬 8:28-32). 그러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집(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만일”이라는 부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그분의 집(가족)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집이 되기 위해 이러한 조건을 지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몸이요 집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처음부터 “마지막 날들”을 겨냥해서 기록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히 1:2). 또한 “유업”이라는 말이 등장하고(히 1:4), 보좌와 홀이 언급된다(히 1:8). 그리고 그 분의 통치가 있은 후에는 하늘들과 땅이 사라져 버릴 것이며(히 1:10 -13), 이 때에 구원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이 등장한다(히 1:14). 이 기간은 “장차 임할 세상”(world to come)과 연관되어 있으며(히 2:5), 아담에게 주어진 약속이 성취된다(히 2:7-8).
여기에 “끝까지”라는 말이 상당히 부각되는데, 바로 이 “끝까지 견디는 것”은 구원을 받는 조건이 된다(히 3:6). 이 기간에는 성령의 동참자가 되었을지라도(히 6:4) 안식에 이르지 못할 자들이 있고(히 4:1) 뒤로 물러나 멸망하게 될 자들이 있다(히 10:39).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잃어버릴 자들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교회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믿을 때에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병합되지 않는다.
4장과 6장에서도 계속 언급되겠지만 이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여기서 “끝”(the end)은 마태복음 24:13,14에서 제시된 “끝”이며, 끝까지 견디지 못해 거부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25장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참여자가 되기 위해 끝까지 견디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전 1:8).
대부분의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교회시대에 관계없는 부분을 취해서 자기들의 전체 교리로 삼으려는 데 문제가 있다. 히브리서 3:6과 3:14은 교회시대에 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교리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본문에서 “끝”은 어느 일정 기간의 끝이다. 이 “끝”이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은 마태복음 24:13,14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3,14).
만일 “끝”이 각 성도 개인의 삶의 끝이라면 그 각각의 “끝”들이 임하기 전에 온 세상에 왕국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문맥 속에서 이 “끝”이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일정 기간의 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은 교회시대가 아니다. 교회시대에는 결코 왕국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은혜의 복음이 전파된다.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당시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이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에게 설교한 때까지의 기간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인 대환란 기간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히브리서 1:2의 “마지막 날들”(last days)의 기간과 일치된다. 이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끝날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서 3:14에서는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확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partakers of Christ)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끝까지 견딘 자에게 약속된 구원의 보장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6:4-6에서는 “성령의 동참자”(partakers of the Holy Ghost)가 된 사람 중에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 또한 교회시대와는 다른 환란시대의 교리를 분명히 제시해 준다.
교회시대에는 성령의 동참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동참자이다. 이 시대에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는 그 즉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성령께서 영원히 내주하시기에 성령의 동참자가 된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환란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사건은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 먼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는 히브리서 6장에 나와있는 것처럼 “성령의 동참자”가 된다. 그는 하늘의 선물을 맛본 사람이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떨어져 나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고 지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내하며 그의 행위로 끝까지 견디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되어 구원받게 된다(히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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