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히브리서 주석 분류

낮아지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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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7월호>

히브리서 2:1-4 『이로 인하여 우리가 들은 것들에 대해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니, 이는 언제라도 우리가 그것들로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만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확고하여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면 우리가 이처럼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서야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요? 이 구원은 맨 먼저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이요, 그분께 들은 자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확증되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들과 이적들,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의 선물들로써 그들에게 증거하셨느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2절)
이것은 율법이다. 율법은 천사를 통해서 제정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날 때인 출애굽기 3장에서는 “주의 천사”가 가시덤불의 불길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출 3:2-4, 행 7:30-32),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이 주어진 것이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를 통해 제정되었다고 말한다. 『한 중보자의 손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된 것인데 약속하신 그 씨가 오실 때까지라』(갈 3:19).
여기서 중보자는 율법을 전달해 준 모세를 말한다. 출애굽기 32:34에서는 천사가 이스라엘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며 인도하신 것은 천사를 통해서였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천사들을 통해 제정하신 율법도 권위가 있다면 하물며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더욱 권위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천사들보다 월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묘사된다.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면』(2절)
이것은 하나의 자연법칙이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이다. 특히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이 엄격한 율법으로 제시되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 21:23-25).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나 양심 아래 있던 자들이나 기본적으로 죄의 개념은 동일했다. 도둑질이나 살인이나 간음이나 동성연애 같은 것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은 이상 이방인들에게도 양심의 법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진보된” 인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죄의 개념은 파괴된다. 교육을 받을수록 죄는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죄에 던져 놓으셔서 심판받게 하신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버려 두셨으니, 심지어 여자들까지도 순리대로 쓰는 것에서 순리를 거역하는 것으로 바꾸었음이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여자들을 순리대로 쓰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 음욕이 불일듯하니, 남자들이 남자들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자기 자신들에게 받았느니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 가운데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받은 마음에 내버려 두시어 온당치 아니한 일을 하게 하셨도다』(롬 1:26-28).
『우리가 이처럼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서야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요?』(3절)
본문은 교리적으로 마지막 날들을 사는 “구원받지 않은 히브리인들”에게 적용된다. 물론 이 시대에도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그 구원을 소홀히 여겨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이 대환란기를 사는 유대인에게 적용될 때에는 구원을 받았어도 그들의 행위로 끝까지 지키지 않고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구원을 소홀히 여겨서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본문은 이 구원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르쳐졌다고 말하고 있다(3절). 그리고 그 구원은 열두 제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으며, 이제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 구원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은혜의 복음이었다면 사도들에게 맡겨졌다는 말 대신에 바울에게 맡겨졌다는 말로 설명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은혜의 복음은 바울에게 맡겨졌는데, 바울은 이 복음을 다른 사도들에게서 받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분께 들은 자들”, 즉 사도들을 통해서 전달된 복음은 “천국복음”을 말하는 것이다(마 4:17; 10:7 주석 참조). 여기서 강조할 것은 열두 사도들의 사역에서 대환란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열두 사도들은 환란 때에 대한 경고를 받는다(마 10장, 24장).
마지막 날들, 특히 대환란시대와 관련해서 이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천년왕국으로 이끄는 복음인데, 이들은 구원을 받았어도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마 24:13, 히 6:4-6). 그러므로 이 구원은 소홀히 여김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될 경우 그는 미끄러져 나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1절). 교회시대의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구원을 소홀히 여길지라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구원을 영원히 안전하게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들과 이적들,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의 선물들로써 그들에게 증거하셨느니라』(4절).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4장에서부터 유대인들을 항상 표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유대인의 표적” (Jewish Sign, 막 16:17-19, 고전 1:22)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다양한 기적들(예를 들면 행 5:15-16; 3:1-6 등)과 성령의 선물들(Apostolic gifts, 고후 12:12, 고전 14:22)로도 인도하셨다. [“성령의 선물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이 책이 교회시대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 책은 “장차 임할 세상”을 준비해야 하는 환란 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쓰여졌다. 그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2:5-10 『그 분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임할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에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누군가가 어느 곳에선가 증거하여 하기를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주께서 그를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으셨고 그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으며, 주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그에게 넘겨 주셨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나이다.”라고 하였느니라. 이는 만물을 그에게 복종케 하심에 있어서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음이라.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노라.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도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고난들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세상의 통치자로 위임하신 것을 말한다.

『장차 임할 세상』(world to come, 5절)
이것은 천년왕국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다시 한 번 본문의 상황을 환란 가운데로 설정해 주는 말이다. 4절에서는 “표적들”이 언급됐고, 5절에서는 “장차 임할 세상”이 나오며, 6-8절에서는 아담에게 주신 왕국 위임권에 관한 구약의 구절이 인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환란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서 천년왕국을 바라보는 상황이다.
여기서 인용된 구약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예수님에 의해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장차 임할 천년왕국은 천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 땅은 천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인간에게 맡겨졌다. “천국”은 인간에게 주어진 왕국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과 같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을 유업을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누군가가 어느 곳에선가 증거하여 말하기를』(6절)
이것은 다윗이 시편 8:4-6과 시편 144:3에서 말한 부분이다. 욥기 7:17-18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욥이 괴로워하면서 하는 말이다. 인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부분은 성경에서 여러 곳 있다. 실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호흡 같고, 진흙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셔서 왕국의 유업을 받을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으셨고 그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으며, 주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그에게 넘겨 주셨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나이다』(7-8절).
인간이 천사들보다 항상 낮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일시적으로만 천사들보다 낮다. 이것은 창세기 1:28에서의 아담의 모습인데, 우리는 아담의 원래의 모습을 여기서 본다(창 1:26). 여기서 그는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데, 인간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쓸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자 이 위임사항은 노아에게 넘어갔다(창 9장). 그래도 이 왕국의 위임은 사람에게 주어진다. 『하늘, 곧 하늘들까지도 주의 것이나, 그가 땅을 사람의 자손들에게 주셨도다』(시 115:16).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노라』(8절).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은 사탄의 통치 하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만물은 아직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왕국은 아직 인간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브는 고통 없이 아이들을 낳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브는 고통없이 아이를 낳지 못했다. [만약 이브가 5년 마다 한 명의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들이 5년 마다 한 명씩만 낳는다면 노아 때까지 지구상의 인구는 약 5천억(500,000,000,000)은 되었을 것이다. 만약 홍수가 나지 않았다면 지구는 인구폭발로 인해 우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을 통치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래서 이 약속은 “마지막 아담”에게 넘어간다. 그분은 누가복음 1:30-33대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이 약속을 차지하실 것이다. 그 분의 이름 “인자”는 인간에게 주신 땅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시는 이름이다. 그 분은 “인자”(인간)로서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대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인간으로 오신 그 분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인자로서 죽으신 것이다. 대신 그 분은 인자로서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고통과 시험들을 겪으셨다. 그리고 그 분은 인자로서 다시 오셔서 인간(인자)에게 주어진 이 왕국을 차지하실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 오실 때까지 만물은 “아직” 인간(인자)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9절)
8절까지는 아담을 다루었다. 9절부터 펼쳐지는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셨다는 것을 설명한다. 7절은 아담이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음받았다고 말하는데, 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같은 모습으로 제시되셨는데,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이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말로 이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으니,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라』(롬 5:1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신 예수, 즉 인자로 제시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아담과 같이 되셨다. 로마서 5장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 분의 본질은 생명이시지만(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사람이 산다. 롬 5:12-17), 그 분은 인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죽으신다. 그러나 그 일을 완수하신 이후에 주님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9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 편에 영광 가운데 앉아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다윗의 보좌에 앉지 않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9절).
주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이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선택된 모든 사람”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2:1-6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다. “제한된 속죄” 같은 것은 없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딤전 2:6).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10절).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아들들”만이 영광에 들어간다. 본문은 “모든 사람”과 “많은 아들들”을 대비시킨다. 왜냐하면 “많은 아들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의 대장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피흘리셨지만 그 분을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구원은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영접할 때만이 가능하다.
본문은 영광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아들들”로 묘사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아들들”로 삼으신 후에(요 1:12) 그들을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고 또 모든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러나 사람들이 거부함으로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또 구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고난들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도다』(10절).
예수께서 온전하게 되신 것은 고난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온전하다”(perfect)라는 단어는 “죄없는”이라는 말이 아니다. 만약 “온전하다”라는 말이 “죄없는 상태의 완전함”을 말한다면, 본문은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원래는 죄가 있었으나 고난을 통하여 죄없는 상태가 되셨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원래부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온전하다”라는 말은 문맥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각 문맥 속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서 이루신 일이다. 『그가 아들이면서도 고난받은 일들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심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히 5:8,9).
예수께서는 “온전하게” 되시기 위해 “배워야” 했다. 이것은 그 분이 단지 죽으신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난, 모든 유혹 등 인간적인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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