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히브리서 주석 분류

이 마지막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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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5월호>

히브리서의 주제는 “더 나은” (better)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비교급으로서, 어떤 것보다 더 나은, 혹은 더 좋은 어떤 것을 소개하는 말인데, 히브리서에서 이 비교급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사용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더 월등한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것도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것들보다 월등히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1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더 월등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며, 3장에서는 모세와 비교하여 더 월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5장에서는 구약의 대제사장의 직분보다 더 월등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6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더 좋은 일들을 설명한다. 또한 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위대한 분이라고 말하며, 7장에서는 더 좋은 소망(7:19)과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을 말하고, 8장에서는 더 좋은 약속들(8:6)을 통하여 그분이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더 월등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증한다. 이어서 9장에서는 구약의 성막과 희생제물보다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과 희생제사를 언급한다. 그 외에도 더 심한 형벌(10:29), 더 좋고 영구한 재산(10:34), 더 나은 제사(11:4), 더 좋은 본향(11:15), 더 큰 재물(11:26), 더 좋은 부활(11:35), 더욱 좋은 것을 말하는 뿌리는 피(12:24) 등 비교하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하심이라는 교리로 모아진다. 그리고 그분의 우월하심은 다른 모든 것보다 그분의 대제사장직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히브리서의 또 하나의 커다란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을 보면서 이 모든 사실들을 하나씩 관찰해 보자.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1절)




1:1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2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를 통하여 그 분께서 세상들을 지으셨느니라.
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한 번 계시하신 후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 계시를 중단하기도 하셨다. “여러 번”이라는 말은 분리된 기간이 여러 번 있었다는 의미이다. 예를들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에 나타나신 후 여러 해 동안 나타나시지 않았다가 다시 나타나셨다. 제사장 엘리의 시대에도 수십 년 동안 계시가 끊겨 있었다(삼상 1-2장). 말라키의 예언 후에는 적어도 390년 동안 아무런 계시도 없었다.
“다양한 방법”은 때로는 천사를 통하여, 때로는 선지자를 통하여, 때로는 제사장을 통하여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2절)
“마지막 날들”(last days)이라는 말을 주목하라. 이 말은 히브리서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위치를 정확히 제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마지막 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 이르는 전체 기간, 즉 2000년 교회시대 전체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서의 교리적 위치를 교회시대에 놓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들”은 교회시대와는 관계없는 어떤 특정한 날이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많은 본문이 교회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특별히 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속자”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속자”라는 말은 “유업”, 특히 땅에 속한 유업을 말할 때 쓰이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상속받아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교회시대에는 이 땅을 통치하시지 않는다. 이 땅은 여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전까지 그분은 아직 유업을 받지 않으신 상태이다.
특별히 이 용어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용어이다. “마지막 날들”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어떤 새로운 날들이 이르기 전까지의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날들”이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되고, 땅과 다른 피조물들도 구속을 받는(롬 8:19-21) 날들, 즉 천년왕국을 의미한다.
또한 이 용어는 “끝”(the end)이라는 말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이 “끝”이라는 것이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기간의 끝,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환란의 끝이라는 사실을 이미 보았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3-14,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 24장 주석 참조).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이나 “끝”이나 “장차 임할” 어떤 세상(world to come)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장차 임할 세상”은 성도가 죽은 후에 펼쳐지는 내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새롭게 변하는 새로운 세상, 즉 천년왕국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인 미래의 세상이라는 것은 히브리서 2:5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분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임할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에 맡기지 아니하셨으니』(히 2:5).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은 “끝”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예언된 대환란기간과 연결된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기간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 마지막 날들”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 때문에 학자들은 이 기간을 미래의 기간으로 인식하지 않고 과거 초림의 때로 인식하여, 그 기간이 2000년 동안 연장되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본문은 “이 마지막 날들”을 과거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예수님의 초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 때문에 이 기간이 교회시대 전체를 포함한다고 봐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업으로 받으시는 왕국이 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왕국복음을 전파하셨다(마 4:17,23). 그 왕국은 구약시대에 유대인에게 약속되었던, “다윗의 보좌”로 대표되는 신정통치국가이다. 유대인들은 이 왕국을 기다렸고(왜냐하면 사무엘하 7:12-16에서 약속된 다윗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왕국의 계획을 취소하신 적이 없으시다. 지금 우리는 이 왕국을 계시록 20장에 따라서 “천년왕국”이라고 부른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의 왕과 그 왕이 전파하시는 왕국을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이 마지막으로 전한 그 메시지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그 당시에 왕국이 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날들”은 초림과 재림을 동시에 가리키는데,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기간으로 정리될 수 있다. 즉, 마태복음 3장에서 침례인 요한이 왕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때부터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과, 2000년을 넘어서 교회시대의 끝부분부터 대환란 기간의 끝까지의 기간이다. 이 두 기간은 같은 속성을 지니는데, 둘 다 왕국복음이 전파된다는 것과, 둘 다 율법, 혹은 행위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이라는 과도기를 지나 교회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까지는 아직 구약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까지는 아직 구약에 속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영으로 거듭나지 못했고, 아무도 신약성도와 같이 구원받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마지막 날들”에도 여전히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강조되는 기간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1세기의 히브리인들에게 이 서신을 썼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히브리서 4장은 과거 여호수아와 함께 유대인들이 안식에 들어갔던 것과 비교하면서 미래에 있을 천년왕국의 안식을 말하고 있는데, 그때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방황하던 백성들과 비교하여 미래의 대환란 때 그들이 안식을 위해 수고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땅을 뒤흔들며 산에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출 19장). 그러나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며 하늘에서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한다(히 12:25-26).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책의 교리적 위치를 미래에 있을 대환란에 놓아야 한다. 이렇게 위치를 설정하고 이 책을 본다면 히브리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난해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3절).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유업으로 받으시는 분인데(2절), 이것은 원래 그분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들께서는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러나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신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요 1:3), 히브리서 1장의 본문에서는 그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위엄있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고 계신 것이다.
실로 모든 만물은 그분에 의해서 보존된다. 태양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제 위치에 있으며, 달과 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궤도를 돈다. 이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 말씀은 권위가 있다. 일월성신, 산천초목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대로 움직이며, 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그분의 섭리이다.
그런데 이 섭리에 불복종하는 존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이다. 인간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개에게 짖으라고 말씀하시면 개는 짖는다. 하나님께서 제비에게 남쪽으로 날아가라고 하시면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간다(시 148:1-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명령하시면 인간은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거부한다(잠 1-2장).
인간만이 불순종의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결국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안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대로 역사를 진행시키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기타 모든 자연만물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붙잡힌 바 되어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존하신다는 이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만물을 없애 버리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12절에서는 『주께서 그것들을 옷처럼 말아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그것들은 바꿔질 것이나』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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