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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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3월호>

출애굽기 30:1-10
부패한 사마리아 사본은 이 열 구절을 26장에 옮겨 놓았다. 바로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는 말이다. 더멜로우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은 후에 첨가되었다고 믿는다.” [자신의 불신앙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들을 들먹거리는 것은 전형적인 수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는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등등.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나 보수주의자들에게나 똑같은 상황인데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지장을 받거나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향제단은 분명하게 기도와 관련된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출애굽기 30:36, 시편 141:2, 요한계시록 5:8, 디모데전서 2:8을 보라. 무어헤드(Moorehead)는 이 금으로 만든 제단에 대해 그의 책 <성막, The Tabernacle>(Kregel Publications, 1957, p.66.)에서 아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제단에는 나무로 만든 “채”가 있는데 금으로 입혀져 있다. 이 채를 꽂을 금고리도 있다(4절). 이것은 언약궤나 차려놓은 상과 똑같다. 이 제단에는 뿔들도 있는데 출애굽기 27:1,2에 나오는 놋제단과 같다. 이러한 사실은 드려지는 제물들로 인한 속죄가 성막 밖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은 성령께서 왜 향제단을 25-28장에서 다루시지 않고 30장에서 다루시는지 또 다른 이유를 말해 준다. 알다시피 “금제단”은 성소 밖에서 드려지는 번제물과도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성소 안에서 뿌려지는 피와도 관계가 있다(히 9:3,4).
금이 어떻게 언약궤(Ark)와 잘 연결되는지 살펴보라. 금은 놋으로 덮인 번제단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언약궤와 자비석은(6절) 둘 다 출애굽기 27:1-4의 놋제단과 연결되어 언급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피가 놋제단의 뿔들에 적용되듯이 금제단의 뿔들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10절). 이런 경우가 일 년에 한 번 있는데(10절) 그것은 “속죄의 날”(레 23:27-30)이다. 기도는 반드시 구원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이 향제단은 놋제단의 격자보다 ½큐빗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향제단은 피가 뿌려지는 “자비석”보다 ½인치 더 높다(출 30:2; 27:1,5).
이 금제단에 대해서는 많은 영적 교훈들이 있다.
1. 이 금제단은 단지 “거룩한” 것만이 아니다(아론의 옷들이나 놋제단처럼). 이 제단은 “주께 지극히 거룩”하다(10절). 그래서 이 제단은 “지성소”와 관계가 있다. 성막의 내부에 위치하는 거룩한 곳(히 9:3,4) 말이다. 성도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롬 8:26) 참된 기도는(마 26:36-44) “하나님 앞에 기억함”이 되는 것이다(회심하기 전의 코넬료의 기도를 보라 - 사도행전 10장). 참된 기도는 치유를 가져다 준다(약 5:15). 참된 기도는 잉태하지 못하는 태에서도 아이를 낳게 해준다(눅 1:13). 참된 기도는 부흥을 가져오며(합 3:1), 빛을 가져다 주고(단 9:17,21), 구원을 가져다 준다(롬 10:1). 참된 기도는 해방시켜 주고(빌 1:19), 부활을 가져다 주고(히 5:7,8), 도움을 주며(시 109:4), 어려움으로부터 구출해 준다(마 26:41).
2. 하나님께서는 이 금제단에 대해 말씀하실 때 출애굽기 29:42에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출애굽기 30:6의 『내가 너와 만날 곳』과 출애굽기 29:42의 『거기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고』를 살펴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릎을 통해 우리와 만나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문에서 모세와 만나고 성막 문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출 29:42 설명 참조).
3. 또 있다. 기도는 “아침... 저녁”으로 올라간다. 촛대를(성령을 나타낸다.) 손질하듯이 말이다. 우리의 기도는 로마서 8:26에서의 위대한 중보자께서 하시는 일과 같은 것임을 나타낸다. 또 있다! 다윗은 기도 시간에(눅 1:9-10)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말한다(시 55:17).
4. 이것이 다가 아니다. 또 있다! 부서진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간구를(시 51:1-6) 대신할 희생제물이 없다는 것이다. 사울이 드린 “희생제물”은 거부되었다. 그의 “마음”이 탐심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9절을 살펴보라. 번제의 희생도 드리지 말고 음식제사도 드리지 말고 술제물도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 다윗의 기도는 희생제물이 없었는데도 응답되었다(삼상 23:2). 반면 사울은 희생제물을 드렸는데도 그룹 사이에 거하시는 분으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했다(삼상 28:6).
5. 또 있다! 우리의 기도가 정결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기도들은 속죄제물에 의한 피로 성결하게 되어야만 한다(10절). 어떤 유명한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설교할 때도 죄를 짓고, 기도할 때도 죄를 짓는다. 회개할 때조차도 나는 회개가 필요하다. 내 눈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져야 할 필요가 있다!”
6.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기도와 관계가 없는 기도라면 그것은 “이상한 불”(레 10:1)이다. 놋제단에서 가져온 불에 의해서만 향제단에 불을 피울 수 있다(레 16:12; 10:1). 아론의 아들들에게 분명히 경고하신 것은(레 10장) 하늘로부터 어린 양에게 떨어지는(레 9:3) 하나님의 진노의 불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의 제물을 불사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그 어린 양은 레위기 9장에서 희생제물이 처음 죽을 때 나타난다. 그 어린 양은 출애굽기 28-29장에서 제사장들의 성결과 관련되어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아, <킹제임스성경>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이여! 한마디 한마디의 절대무오한 그 위치라니!] 레위기 9:16에서 그 어린 양이 나타났다! 제사장들이 황소나 수양으로 성결하게 되기 전에 그 어린 양은 나타났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7. 금제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진리들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신성을 나타내는 것은 금이다. 금제단은 성막을 만들 때처럼 똑같은 나무로(1절) 만들어졌다. 그리고 차려진 상과 언약궤처럼 금테로 둘려져 있다.
클라크는 “증거궤 위의 자비석 앞이라.”를 빼야 한다고 말한다. 케니코트가 말하는 부패한 사본과 사마리아 본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술에 물을 탄 꼴이다.
이런 영적 진리들을 소위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시할 때마다 즉시로 장염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대다수의 보수주의 학자들”인데 이들에 대한 치료법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주석 시리즈에 나와 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AV 1611을 버린 근본주의자들은 그 쓰레기 같은 네슬 헬라어 본문이나 메쯔거 헬라어 본문 아니면 로크만 재단에서 출판한 출판물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을 거부했다. 이들은 <킹제임스성경>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모든 헬라어 원어사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자신들의 번역 원칙을 고수한다. 필사본에 접근하는 자신들의 자세에 추호의 의심이 없다. 그러면서도 <킹제임스성경>을 거부할 목적이라면 일학년 초급 헬라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조차도 넘겨버린다.]
New ASV와 Old ASV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제시한다.
히브리서 9:4에서 “향로”(CENSER)라는 말이(“Thumiatarion”) “제단”(ALTAR)이라는 말로(“Thusiastarion”) 바꿔져 있다. 무슨 근거에서 바꾼 것인가? 아무 근거도 없다.
이처럼 기록된 헬라어 본문은 없다(파피루스, 벨럼, 대문자, 소문자). 어떤 헬라어 계열에도 없다(서방 계열, 시리안 계열, 알렉산드리아 계열, 카이사랴 계열). 어떤 시대에도 없었다. 히브리서 9:4에서 “제단”이라고 한 것은 제멋대로 추측해서 옮긴 것이다. “대다수 보수주의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둔함과 성경에 대한 불신을 근거로 말이다.
수없이 말했지만 20세기의 죽은 정통주의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한다. 오리겐, 심마쿠스, 필로, 클레멘트, 데오도티안, 발렌티누스, 아퀼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긴다고 입바른 소리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한다는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할 수 있는 한 모두 제거해 버린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놓고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꼭 있어야 될 곳에 적절하게 배치시킴으로 하나님을 도와드렸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눈만 뜨면 꼭 있어야 될 곳을 찾는다. 그렇게 히브리서 9:4까지 온 것이다. 자만하고 건방지고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 같은 그리스도인 외에 누가 이들의 히브리서 9:4 변개를 동의하겠는가?
로크만 재단은(오리겐처럼) 금향로가 “지성소” 안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즉 휘장 밖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향로”라는 말은 와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더멜로우의 설명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 구절은(히 9:14) 중복되어서(overload) 분명하게 자체적으로 모순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기록하신 성령께서 곤혹스러워하시는 것을 돕고자 칠십인역은 출애굽기 30:6에서 “증거궤 위의 자비석 앞이라.”를 모조리 빼버렸다.
“향로”를 “제단”으로 바꿔치기 한 결과(ASV, New ASV, 고대 ASV, 현대 ASV, 우주 시대 ASV) 더욱 혼란만 가중되었다. 향로는 일 년에 한 번 지성소로 들어간다! 그러나 제단은 밖에 여전히 그대로 있다. 이런 혼란으로 어리둥절하기만 한 로크만 재단과(ASV, 1969) 샤프 박사는(ASV, 1901)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이 쓰레기 같은 책을 추천하는 소위 “경건한 보수주의자들”과만 어울릴 뿐이다.
이들이 벌이는 아찔한 묘기들에 대해서는 여러 번 보아왔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영감받은 최초의 원문”을 믿는다고 외치는 대다수의 보수주의 학자들이 그 원문의 뜻을 밝혀내고자 애씀으로 마침내 거룩한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일들은 이제는 별로 놀랄 만한 새로운 일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20세기를 사는 보수주의 학자들의 마음의 동기를 알고 계신다. “현명한 자들의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고전 3:20) 이들이 벌여 놓은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질 때 그에 대한 처방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많은 경우 보수주의 학교의 교수진들의 가르침에서 돌아서는 경우이다. 이들은 로마처럼 권위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유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두 개 혹은 세 개의 성경을 추천하는 경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최종권위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 대해 어떤 것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자신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속일 생각은 말라.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기 전에 이미 영양식으로 배불렀기 때문이다.)
1. 제단은 “지성소” 밖에 있다. 그러나 그 제단이 설명되어질 때(출 30:6) “휘장 앞에”라는 말은 지성소 안일 수도 있고 밖일 수도 있다. “휘장 앞에”라는 말이 지성소 밖이라는 것을 나타낼 때는 출애굽기 40:20 이후이다.
2. 향로는 운반하게 되어 있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히 9:4). 히브리서 9:4의 영어 본문에는 “The Holiest of all; WHICH HAD the golden censer.”로 되어 있다. 즉 지성소에 일 년에 한 번 향로가 들어갔던 것이다! <킹제임스성경>에서 히브리서 9:7을 통해 “향로”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 놓았는지 살펴보라. “향로”를 “제단”으로 바꾸어 버림으로 이 구절에서 말하는 전체 의미를 망쳐놓았다.
지성소에 제단이 있었던 적은 없다.
New ASV의 본문은 신뢰할 수 없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대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33; 24:51,52; 23:42, 요한복음 1:18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터무니없는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New ASV는 사반세기 동안 텔레비전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산물임을 알아야 한다.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는 이 세상은 수면제 같은 성서들만 만들어낼 뿐이다.)
다음에는 제단에 필요한 향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설명이 나온다.

출애굽기 30:22-38
우리는 본문을 11-21절보다 먼저 살펴볼 것이다. 향료는 수지류이고 껍질이 있는 생선에서 만든다[“마노 껍질”(Onycha) 34절]. 이 말은 일반적인 성경 용어 사전에서 찾을 수 있다. “몰약액”(Stacte)은 “몰약”(myrrh)을 추출하는 나무에서 나온다. 마노 껍질에서 전에 언급된 “자색”(출 25:4)도 추출한다. “풍지향”(Galbanum)은 합성수지 색깔을 띠는 크림이다. 이 향료는(유향과 더불어) 같은 무게로 함께 섞는다(34,35절). 향료는 성도의 기도를 나타내기에 순수해야 하고(딤전 5:22), 거룩해야 한다(35절). 그리고 곱게 찧어져 가루가 될 때면(사 53:1-6) 아주 거룩하게 된다(36절). 왜냐하면 이는 죄를 깊이 뉘우치는 죄인의 부서진 마음과 상한 영(시 51:1-6)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죄인의 혼이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아베 마리아”를 찾고 “신부”를 찾는 사람들은 “오 바알이여, 들으소서”(왕상 18장)를 외치지만 성도의 기도는 지성소로 들어간다. 바로 “회중의 성막에 있는 증거궤 앞에” 있는 곳 말이다(36절).
『네 자신을 위해서 그 제조 방법에 따라 만들지 말지니』(37절). 이 제단에서 태워지는 향은 하나님의 향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제조 방법에 따른 것이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희생하신 불로 태워야만 한다. 다르게 혼합되어서 태워짐으로 나는 연기는 “거룩하지 않은 연기”이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분류된다. 더군다나 이 방법대로 처방된 향은 진 중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향과 같이 사용되어질 수 없다(『네 자신을 위해서... 만들지 말지니』) “산상 설교”식의 기도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식의 기도는 거듭난 영으로부터 나오는 기도가 아니다. 참된 기도라 할 수 없다. 형식에 얽매인 기도는 이교도에서 사용하는 장식품과 같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참된 기도를 모방할 필요가 전혀 없다. 참된 기도는 제단을 태우는 장작으로부터 온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성결하게 된다. 연기가 하늘로 오르듯이 말이다.
『그것을 냄새 맡으려고 그것과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38절). 기도가 인위적이고 모방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소리조차도 듣지 않으신다. 당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 향을 맡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리 회중에게 들려졌던 위대한 기도니 뭐니 해도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BB

「이번 호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출간된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출애굽기>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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