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창세기 주석 분류

첫 사람의 타락과 최초의 가죽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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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6월호>

3:20,21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부르니, 이는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미였음이라. 또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이브”(히브리어 Chavah: Heth, Vau, He) 즉 “생명” 혹은 “생명을 주는”이라고 붙인 것을 주목하라. 이 구절은 불가사의한 구절이다. 이브는 아담의 죽음을 야기시켰고 그녀의 모든 자녀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채로” 태어났다. 그녀의 첫 아들은 살인자였으며, 그녀는 자기 자신을 죽였다(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이름은 아무리 영적인 의미를 지녔다 할지라도 잘못 선택된 것 같다.
만약 이 이름이 육체적인 생명만을 언급하는 것이라면 아담이 창세기 3장 이전에 에덴의 동산에서 다른 아이를 갖지 않았을 경우 그 이름은 창세기 4:1 이후에 아담이 이브에게 주었을 것이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창세기 3장 이전에 아이들을 갖고 있었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고 어쩌면 그 어딘가에 살아 남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틀랜티스(지브랄터 해협 서쪽에 있다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플라톤이 말하는 전설상의 섬)나 북극점 지하에 있다는 빈 장소에나 어울릴 이야기인 것 같다. 만약 이브가 다른 아이들을 갖고 있었다면 그들 역시 아이들을 낳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아들들과 딸들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창 5:4). 결국 아담이 자기 아내를 이브라 칭한 것은 창세기 4장 1절 이후였을 것이다. “Life”라는 잡지는 잡지 이름을 이브(life를 뜻함)에게서 빌어온 셈인데 따라서 이 잡지는 이브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는 만큼이나 “생명을 주지” 못하고 있다.

“또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 이 선언이야말로 창세기 3:20에 이르기까지의 성경의 선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 기록이 사실이라고 아무런 의심없이 믿고 있다) 인류는 현재 창세기 2장의 상황 하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3:6-24절의 상황 하에 놓여있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저를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태양계를 탐사하는 것도 아니며(롬10:6-8),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생활여건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완전한 사회 혹은 “왕국”을 이땅에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만한 조건을 갖추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창조의 구체적인 사실들, 즉 우주의 수수께끼를 모두 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성품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 첫 세 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물론 타락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치료해 주시기 위해 무언가를 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3:15은 위대한 말씀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아직은 미래의 사건이기 때문에 당시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다. 창세기 3장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인간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쳐서 숨었으며, 책임을 전가시키고,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타락의 상태로부터 회복을 시켜주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가죽옷이다.
이 가죽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탈굼(Targum: 구약성경의 아람어 부분역)에는 이 가죽이 뱀의 가죽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귀가 속죄염소와 죄를 지고가는 분의 예표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제 7일 재림안식교의 메리 엘렌 화이트가 주장한 것과 똑같다). 가죽옷은 의심할 여지없이 “양의 가죽”이다(창4:4, 22:8; 출 12). 그래서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뱀을 통해 선악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 졸업하게 될 때 “양의 가죽”(Sheep skin은 영어로 졸업장이란 뜻이 있음)을 받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양을 묻었고 그때 이래로 여자들은 동물 “털”코트를 좋아한다. 성경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처럼 정확히 인간의 삶을 지적하고 있는지!)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장면은 우리의 주목을 받을 만하다. 먼저 어린양 한 마리가 숲 속에서 등장한다(요1:29). 이 어린양은 점도 없고 흠도 없다(출 12장). 이 어린양은 주의 천사 앞으로 입을 열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나간다. 그는 온순하게 고개를 떨구고(요19:30) 민수기 22:23의 칼이 그 양을 내리친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동맥을 흐르고 있는 액체인 피가 어린양에서 솟구쳐 흐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풀밭은 검붉게 물들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경고하셨던 죽음이 무엇인가를 최초로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이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죽임당한 것은 어룡이나 익수룡 혹은 디즈니랜드에나 나올 것 같은 상상의 괴물이 아니었다. 이 피로 흠뻑 젖게 될(사 34:7) 지구상에서 흘려진 최초의 피는 열정적인 구애자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터져버린 동굴 속의 원시 여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것도 아니고, 효마( Eohippus)나 도리너구리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어린양의 것이었다. 이렇게 어린양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성경은 결국 보좌 위에 앉아있는 어린양(계 6장), 도살당하였던 것 같은 어린양(계 5장), 그리고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어린양(계5:12)으로 끝나게 된다.
성경이 스스로를 계시하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이처럼 어린양을 강조하는 것인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서적도 어린양과 영원한 진리를 연관지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벨,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이세, 다윗 등은 모두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 왜 성경은 이처럼 어린양을 강조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그거야 유대인들이 유목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어부였던 요한은 왜 그처럼 어린양을 강조하고 있는가? 왜 꼭 어린양이어야 하는가? 이집트 사람들은 황소와 숫소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들은 어린양은 거들떠도 안본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린양이 예언되어 있고(창22:8), 적용되어 있으며(출12:13), 인격화되어 있고(사 53장), 누구인지 신원이 확인되어 있고(요1:29), 십자가에 못박혀 있고(계5:6), 영광을 받고 있다(계5:12). 아무리 유목민이라지만 이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아랍인들도 유목민이다. 그런데 코란 어디에도 이런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왜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목자였던 다윗은 그 어린양과 자기의 주님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고 목자인 자기를 양으로 말하고 어린양이신 자기 주를 목자라고 하고 있는 것일까?(시 23편)

“또 주 하나님께서는...입히시니라.”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의 주체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대속제물을 죽이신 후 그들에게 옷입혀 주셨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짐작하겠는가?(엡2:8,9) 하나님께서는 죽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기고 그것을 발밑에 둔 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의 가죽으로 이들을 입히셨다.
이것은 죽음 없이 털만 깎아내서 만든 그런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이 죽은 후에 얻을 수 있는, 가죽으로 만든 옷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예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자기 의라고 하는 더러운 옷을 벗겨내고(슼3:4), 올바른 옷을 입혀 주신 것이다(사61:10).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딤전3:5) 아담의 후손이 아무리 문명에 의해 눈이 멀었다고 하더라도 그 누군가의 것으로 덮지 않는다면 자신은 벌거벗은 자라는 엄연한 현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옷(덮을 것)을 자라게 할 수 없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3:22,23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니,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서 그를 내어 보내어 그가 취함을 입은 그 땅을 갈게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는 쫓겨나고 말았다. “낙원을 상실한 것이다.” 여자는 그녀의 생리적 기능들이 자연과 부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쫒겨났다. 하등동물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제때에 새끼를 낳는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남자는 평생 땀흘려 해야 할 일들을 눈앞에 둔 채 쫓겨났다. 그는 결국은 네모난 나무 상자(관) 속에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결국 “신들처럼 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고귀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두 명의 학생들은 열심히 지식을 추구한 나머지 병원침대와 무덤을 유산으로 받게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의 동쪽 문을 나서자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짙은 구름 위로 지기 시작하고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비참하게만 보였다. 마치 백만이나 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그들의 시선을 비틀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쫓겨나고만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이라고는 그들을 이끌어줄 양심과 땀과 노력으로 살아야 할 인생뿐이었다. 이들은 구원받았는가? 그렇다. 구원은 받았다. 하지만 불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최초의 부부는 그 어떤 부부도 향유해 보지 못한 최상의 조건과 특권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윈은 크게 빗나갔다. 다윈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고도 넓은 길을 따라갔던(잠14:12) 수십억의 부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윈은 어린양의 피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옷을 만드는 전문가였다.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 이 생명나무는 계시록 2:8, 22:14에서 발견되는 나무와 똑같은 나무이다. 창세기나 계시록에서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은혜가 아닌 행위에 근거해서 생명나무에 참여할 수 있다. 생명나무가 갈보리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둘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신비종교와 로마 교황들에 의해 상속된 바빌론 종교에서나 똑같이 취급되는 것이다. 나무에서부터 나오는 “생명”이란 인간이 창세기 3장을 통과하지 않고 에덴의 동산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영원한 시도들 중 하나임이 곧바로 입증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 아래에 땔감과 톱밥 이외에 그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 나무는 하나도 없으며, 얼마 간의 음식외에 더 영원한 무엇을 줄 수 있는 나무도 없다. 그러나 창세기 3:22에는 초자연적인 “나무”가 존재했었다. 이 나무의 열매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에게 “값없이”(freely) 제공되었다.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다면 비록 영적으로는 죽지 않을지 모르지만 육체는 수명에 따라 죽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생명나무가 육체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이미 타락해 버린 아담에게 이 나무가 금지된 것은(창3:20)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그 영이 죽어버린 상태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 참여했다면 아담은 영원토록 자기 육체의 노예로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아담이 그랬다면 오늘날에는 살아있는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영은 죽어있고 혼은 썩어가는 부패한 육체에 들러붙어 있는 채로 5000년 이상을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아마 걸어다니는 마귀 같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비로 그를 대하사 아담이 제 2의 사탄이 되는 것을 막으셨다. 그래서 아담은 육체적으로 죽게 된 것이다.

3:24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타는 칼을 놓아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갔다. 이 방향은 성경에서 보자면 비극적이거나 잘못된 움직임의 전형적인 방향이다(만약 히틀러와 나폴레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두 사람 다 러시아 공격은 포기했을 것이다).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이루어진 침략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을 거두었던 중요한 전쟁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소아시아, 페르샤 그리고 인도 정복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 제국을 향유해 보지도 못한채 33½의 나이에 술에 취해 발작을 일으켜 죽었다.

카인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쫓겨났다(창4:16). 야곱은 타락해 있었을 때 라반을 섬겼으며 이를 위해 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했다(창 28장). 유대인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포로로 잡혀갔고(왕하 25장) 성령께서는 복음이 그 방향으로 전파되는 것을 금하셨다(행 16장을 볼 것). 반대로 아브라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들어갔다. 성막에 들어가는 방향도 동쪽에서 서쪽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재림하셔서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들어오실 것이며, 유대인들 역시 포로에서 귀환할 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왔다. 물론 예외 없이 100%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외 없는 규칙은 없으며 “예외는 오히려 법칙이 있음을 입증한다”(서쪽에서 동쪽으로의 군사작전은 공격자가 피공격자보다 북쪽에 있는 나라일 경우에 한해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자).
그룹(cherubims)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그룹들은 에스겔 1, 10장 그리고 계시록 4,5장에도 나온다. 이들은 사르곤 왕궁 위에 세워진 그 유명한 앗시리아의 “날개달린 황소”와 약간 유사한 모습이다. 이들 그룹은 “천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날개가 없기 때문이다(창 6장 주석을 볼 것). 이들 그룹은 움직이면서 모습과 위치가 바뀌거나 움직이지 않은 채 멈추어 있기도 한다. 이들은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존재들이다-성경에서는 천사, 천사장, 그룹, 스랍(사 6장) 등이 구분된다. 이 영적 존재들에 관해서는 주석서들마다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나 그 어떤 주석도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에 이미 인쇄되어 있는 것 이상으로 기여한 바가 하나도 없다- 히브리어 어원연구 역시 이들 존재들의 규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룹(Cherub)은 “굳건히 붙잡힌 자” 혹은 복수인 경우(cherubim) “붙잡힌 자들” 혹은 “굳건히 붙잡힌”이란 뜻이다(창세기 3:1 주석을 볼 것).
“불타는 칼”은 기록된 그대로 불타는 칼이다. 이것은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불칼에 다가설 수도 있었고(창4:3, 4:16), “문 앞”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지만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제 아담도 그의 아내에게도 육체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사라졌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을 때 영적으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육체의 길을 택했고 결국 육체적 죽음이 그들의 인생 여정을 끝마칠 때만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3장은 침울한 분위기 가운데 끝을 맺는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