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창세기 주석 분류

여자의 씨 vs. 뱀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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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3월호>

하나님께서는 뱀에게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사양반”을 전에 다루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창세기 6:1- 6을 보시오). (누군가 말하기를 만약 뱀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었더라면 뱀은 하나님을 비난하고 나섰을 것이라고 했다). “가축”과 관련해서는 창세기 3:1의 주석을 보기 바란다. “네 배로 다닐 것이며 네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이 예언은 이사야 65:25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곳의 문맥은 천년왕국이다.

“빛의 천사”와 기어다니는 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사탄이 실제의 뱀을 통하여 이브에게 말을 걸었거나 (이것은 그리 가능성이 높은 것 같지 않다) 아니면 뱀은 이브에게 말을 건넨 존재의 예표(type)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가능성은 더 높지만 이 경우는 만약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이 빛의 천사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14절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 (14절은 실제적인 동물로서의 뱀에 관한 말씀인 것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벧전 5) 돌아다니고 있지 뱀처럼 기어다니고 있지 않으며 그의 활동영역도 이 지구상에서 흙을 먹는 것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다(계 12:4-10). 14절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흙”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19절에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서 “흙”이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며 “네 배로 다닐 것이며”라는 표현은 단지 천하게 타락한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말하고 있는 “뱀” (serpent)은 오늘날 땅에서 기어다니는 그러한 뱀(snake)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뱀은 15절에서 볼 수 있듯이 동정녀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해칠 수도 있으며, 자기자신의 아들인 가짜 메시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의”라고 하는 말은 원수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뱀을 여인의 원수로 만드시며 여인도 뱀의 원수가 되도록 하신다 (물론 뱀과 우의를 맺고 있는 여자들이 없는 것은아니다). 우리는 창세기 3:14,15이 이브와 그녀의 대적을 훨씬 넘어서는 차원의 이야기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15절 말씀은 “메시야 예언들”(즉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로 알려진 일련의 성경구절들 중 첫번째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세기 1장 20절(다섯째 날에 나타나는 “생명”)이 최초의 메시야 구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초림시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초림은 그분의 죽으심(창5:5)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있게 연구”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머리로서 이런 수준의 계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3장 15절을 최초의 메시야 예언 구절로 보고 있다. 창세기 3장 15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여자와 뱀은 잘 지내지 못할 것이다.
2. 여자는 씨를 갖게 될텐데 그 씨는 “it”로서 중성명사로 되어있다(영어성경에 그렇게 되어있음).
3. 뱀은 여인의 씨와 적대관계를 갖게 될 씨를 갖게 될 것이다.
4. 뱀은 여자의 씨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다.
5. 여자의 씨는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다.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마귀는 이미 3장 4절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중성으로 되어있는 대명사 “it”를 여러 번역본에서 “she”로 바꾸어서 마리아를 성경의 수호신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아다시피 마리아는 뱀의 머리에 아무것도 행하지 못했다. 뱀은 죽음의 세력을 동원해(히 2:14) 마리아를 정해진 때에 무덤으로 데려갔으며 그녀는 결코 무덤에서 올라오지 않았다(추기경 대학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발표하더라도 사실은 사실이다: 성모몽소승천교리 참조).
최근의 카톨릭 번역본들은 다시 공인역본으로 원대 복귀하였는데 이로써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려는 의도(렘 23:36)가 잘못이었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1. 여자들과 뱀들은 - 적어도 여러종류가 있음 -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1000명의 여자들 중 한 명도 기어다니거나 슬슬 미끌어지듯 다니는 그 어떤 동물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독이 없는 얼룩뱀이나 작은 뱀의 모습일지라도 평범한 여자들에게는 맹독성 방울뱀이나 살무사가 사냥꾼에게 주는 만큼의 충격을 줄 것이다.

2. 이 귀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성명사 “it”로 불리우고 있다. 누가복음 1장 35절에서도 예수께서는 “thing”으로 불리운다. (이 두 구절은 로마서 8:16, 26절 두 구절에서 성령님을 it로 번역한 것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박을 일소해 버린다. <한글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우리말 어감상 대명사를 명사로 처리하였음 - 역자주)
성령님을 칭할때 중성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다. 프뉴마타(pneumata)는 중성 명사이다. 물론 이 경우는 성령님의 사역에 관해 언급될 때에 한한다. 성령님의 인격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에는 “he”가 적합하다고 하겠다(요14:26; 16:7,8). 그러나 이 구절에 있어서 충격적인 사실은 메시야가 “it”로 칭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그 분은 창세기 49장에서는 “실로(Shiloh)”라 불리우고 있는데 이 명사 역시 중성이다) 여자가 씨를 갖을 수 있다고 암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의 어떤 여자도 다른 원천으로부터 공급받지 않는 한 자기 안에 생식이 가능한 남자의 씨를 갖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공수정의 경우마저도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때는 동정녀 탄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씨”라는 이 말 한마디가 현대주의자들(이들은 부풀리기 명수이다)이 동정녀 탄생대신 발명해낸 부풀려진 용어 “신적 잉태”(The Divine Conception)가 잘못된 것임을 입증해 준다.

이 용어는 신정통주의를 표방하는 불신자들이 “동정녀 탄생”이란 용어보다는 세상 사람들을 덜 자극시킬 요령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신적 잉태”란 하나님께서 요셉의 씨를 메시야가 되도록 간섭하셨다는 의미도 되는고로 결국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고 있는 기적의 요소를 부인할 수 있도록 피할 길을 내고 만 셈이다(이처럼 “그럴싸한 용어”를 만들어내서 본질을 흐려버리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이와같은 “귀를 가렵게” 해주는 따위의 신학의 입을 막기위해 성령께서는 <킹 제임스 성경>에 “그녀의 씨”(her seed)라는 말씀을 보존해 놓으신 것이다. 이 씨는 그 어떤 남자와도 관계가 없다. 성령님께서 갖고 있는 씨는 오직 말씀의 씨앗뿐이다(벧전1:23). “처녀의 배에서 출생한 자손”이란 표현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마리아는 이땅의 먼지를 밟고 살았던 여인 중에서 유일하게 (약 4000억 명의 여자들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수태과정이 없이 아이를 낳은 여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 “성령의 장막” “신들의 두려운 거처” “하나님의 어머니” 혹은 이교도의 우상 숭배자들이 붙여준 신성모독적인 칭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B.C. 4000년경에 이브에게 주어진 약속이 40세기를 지나 마리아에게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약속의 일부는 후일 성취될 것이다.

3. “뱀의 씨”는 주석가들 사이에서 “여자의 씨”보다도 더 큰 혼돈을 일으켰다. 이 구절이 문자적으로 해석되
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일 첫번째로 내세우는 것은 “마귀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거나 혹은 생식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조적인 오류는 출애굽기 8장 18절이 마귀는 어떤 생명이라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데서 나온 것이다.
출애굽기의 문맥은 마귀의 종들은 흙에서부터의 생명 창조는 할 수 없다(이것이 원래의 창조였음)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주석가들은 계시록 13장 14절은 속임수를 다루고 있을 뿐 그 형상이 실제로 “살아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러나 이들은 계시록 16장 14절과 마태복음 7장 22절을 잊어버린 것같다. 유다 이스카리옷 역시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죽은 자들을 살리도록”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말라(마10:1-5).
앞에서 신정통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신적 잉태”는 적어도 사탄의 경우에 있어서는 적용이 가능할 것같다. 왜냐하면 유다 이스카리옷은 “시몬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마귀”(a devil)였기 때문이다.
카인은 악한자로부터 나온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요일3:12). 그리고 그리스도 당시의 주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뱀, 지옥의 자식들, 마귀의 자식들, 독사 등으로 불리웠다. 이들 용어들이 “기독교적” “성경적” 용어들임을 잊지말라(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는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영”을 갖고 있으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종교지도자들을 위에 나온 그런 식으로 불러야 되지 않겠는가?)

창세기 3장 15절은 결국 지난 18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 비평학파의 거두 오리겐(A.D. 185)이 제정한 해석 원칙에 입각하여 영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물론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카인과 바리새인들은 사탄과 여자와의 관계에서 잉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죄의 사람”은 그 모습을 들어낼 때에(계시록 13장 주석을 볼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였던 것처럼 뱀의 씨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너무 충격적일지 모르지만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네 씨, 그녀의 씨”등의 표현은 정확히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개입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관한한 사탄 역시 인간을 잉태하여 낳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마리아는 남자의 개입없이 아이를 낳았다. 따라서 사탄은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씨”를 낳을 수 없다는 가정은 잘못된 교리요, 빗나간 결론에 불과하다.

4. 뱀은 여자의 씨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다. 이 구절이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은 갈보리 십자가이다. 마귀의 권세는 갈보리 이후 어느 정도 축소되었으며(요14:30, 16:11; 골2:14,15), 그리고 재림시에는 천년동안 소멸될 것이다. 그는 천년왕국이 끝날 무렵에 조차도 결코 완전히 권세를 회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계시록 20장 주석을 볼것).

“발꿈치를 부순다”는 표현은 가장 경미한 손상을 입힌다는 의미로 적어도 머리를 부순다는 표현과 대조해 볼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머리를 부순다”는 표현은 전혀 비유적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전혀 관계가 없다. 자, 이제부터 다섯번째 사항을 주목하라.

5.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이 구절은 보통 갈보리에서의 영적인 승리를 의미한다고 잘못 해석되어져 왔다. 이러한 해석은 갈보리 사건이 있은지 오래 후에 기록된 바울의 로마서 16장 20절을 고의적으
로 무시함으로써 나오게 되었다.
로마서 16장 20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미래에 부수실 것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영어의 분명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영적 해석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헬라어’ 의미를 자세히 분석하면서 분주하던 근본주의 및 보수주의 주석가들은 킹 제임스 성경 속에 감추어진 금광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의 구절들은 “머리를 부순다”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재림시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탄의 화신인 “짐승”(계시록 19장)이 그의 머리 위에 직접 날아오는 돌로 부셔져 버릴 것임을 (단 2:34,45)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것이다(판5:26, 9:53; 삼상 17:51; 시 7:16; 68:21, 110:6, 140:9; 합 3:13). 손 안에 금광을 들고 있으면서 철광에 눈길을 돌릴 필요는 전혀 없
다.
머리와 관련해서 우리는 또 하나의 보편적인 신비를 벗겨낼 수 있다. 소위 “선사시대”의 종교들은 해골을 숭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여리코 시는 말들의 시체밑에 묻혀진 채색된 해골들로 가득차 있다. 인디안들은 포로의 머리가죽을 벗겨냈으며 인간사냥군들은 해골을 수집하였다.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해골의 장소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지난 60세기 동안 전세계 모든 대륙의 모든 종교의식에 있어, 우리가 보기에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은 이러한 사실들이 성경 안에서 씨줄과 날줄로 짜여서 진리라고 하는 수예작품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 마저도 설명해 낼 수 없는 현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단 몇 시간만에 만족스럽게 설명되고 있다(아킬레스는 “발꿈치”가 약하다. 그런데 이 발꿈치는 야곱이 엄마 뱃속에서 형 에서를 붙잡은 부위였다. 발꿈치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성경에 붙어있으라. 그리고 나서 과학과 교육이 성경을 뒤따라오도록 하라. 이것이 순서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