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창세기 주석 분류

다시 채우고... 정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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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7월호>

1: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
니라.
2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온 지면 위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를 내는 나무의 열매가 있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그것이 너
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30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들에게 내가 모든 푸른 채소를 먹을 것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
로 되니라.
31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더라. 저녁
과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더라.



주의깊은 성경학도라면 이 구절에서 보듯이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이 노아에게 주어진 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창9:1-4). “다시 채우라”(replenish)는 말로 미루어 보아 이전에 누군가가 땅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창세기 1:2 주석을 보시오). “다스리라”(have dominion)는 말은 아담이 왕으로 임명받았음을 보여 준다(히브리서 2:6-8, 시편 8:6-8을 보시오). 다윈에게 있어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제치고 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다윈의 원숭이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을 “이겨낸” 셈이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 보면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인 참된 왕으로 창조되었으나 그 지위에서 타락해 버렸고, 그 지위는 사탄이 차지해 버렸다(눅4:6, 렘27:5-10, 엡6:10-14 참조). 현재 상태의 인간이란 자연에 대한 일시적 지배권만을 갖고 있는 퇴위당한 군주일 뿐이다(창9:1-4을 보시오). 인간의 참된 ‘그리스도의 형상’은 이미 사라졌고(창1:27) 이 그리스도의 형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를 믿고 그 분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개인에게 있어서만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왕”으로 군림하려면 그 분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계5:10; 11: 15; 눅19:12-27). 인간의 ‘통치권’은 “두번째 아담”께서 첫번째 아담이 잃어버린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돌아오실 때까지 회복되지 않는다(롬8:17- 26, 사11:1-11). 이것이 이 땅 위에 사는 인간의 ‘지위’에 대한 권위있고 온전하며 확고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만일 이와 다르게 해석한다면 그것은 고린도전서 15:22, 다니엘 2:44, 스카랴 6:9-15, 히브리서 2:1-8 말씀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며, 성경적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행3:20-23). 이와같은 소망과 관련된 구절들의 문맥은 한결같이 영광의 왕께서 재림하셔서, 아담과 이브가 교육을 택한 댓가로 상실해 버린 낙원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앞으로는 단순히 카톨릭 교회라고 표기함)나 기독교 교회협의회 등은 다음과 같은 이상한 방법으로 만물을 “회복”시키려 한다. 즉, 행위, 저당, 주식, 여신, 채권, 공회, 목표 달성 운동, 프로젝트, 계획, 프로그램, 로비, 입법활동, 재판, 선전 등을 총동원해서 이미 죽었고, 썩었으며, 타락하고 파멸되어 버려진 피조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이 늘 주제가로 부르는 “왕국을 가져오자”는 목표를 이루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없이는 왕국이 없음을 잊고 있는 것이다.
29절은 타락이 있기까지는 아담과 이브는 과일과 땅 위의 채소만을 먹었음을 보여 준다(‘온 땅의 지면 위에 있는’이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양배추, 콩, 완두콩 등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낙원에서 추방당했을 때부터는 그들은 땅 속에 자라는 것들도 파내어 먹었을 것이다. 『너는 너의 전생애 동안 고통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감자, 당근, 양파 등도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는가? 주목해 보라. 인간은 위로(진화)가 아닌 아래로 향하고 있다.
“식물”(meat)이라는 단어는 모든 종류의 음식을 뜻한다. 이 단어 말고 더 좋은 단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하고 빵(bread)이 육체의 예표인고로(창40:16-17, 삼하13:5-9, 대상 21:23), “식물”(meat)이든 “빵”(bread)이든 모든 종류의 음식을 뜻하게 된다(레5:13; 6:20; 2: 4).

『땅의 모든 짐승에게』

“땅의 모든 짐승에게”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창세기 3:10까지는 동물들도 역시 채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확인해 주는 구절은 이사야 11:1- 10 말씀으로 이 구절에 따르면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사자가 풀을 뜯게 된다. 로마서 8:20-27은 이를 확증해 준다. 이 구절에 따르면 모든 동물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아담의 저주 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무천년, 후천년적 해석은 이와같은 피조물의 회복을 취급도 안하며 그들은 단지 “인간의 진보”만을 주장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를 전부 회복시키기 원하시는데도(행3:19-22, 롬8장) 인간만 진보될 것이라는 주장은 조금 이기적이지 않은가? 어째서 무천년주의자들(장로교와 개혁교회)과 후천년주의자들(카톨릭과 남침례교)은 동물들을 간과하고 있는가? 어째서 진화론자들은 동물의 회복은 제쳐놓은 채 “왕국만 가져오려” 하는가? 진화론자 스스로가 동물들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판단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더라.』

이로써 하늘과 땅의 재창조는 끝이 난다. 여섯째 날에 끝이 나고 그 뒤에는 안식이 있게 된다. 인간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숫자는 사람의 숫자가 되었다. 666이란 수를 주의하라(계13:18, 스2:13, 대하9:13, 숫자에 대한 더욱 정확한 정보는 단3:1-8, 삼상30:9, 삼하15:18, 왕상10:14, 눅23: 44, 요4:6, 행10:9을 보시오).

일곱째 날에...
2:1 그리하여 하늘들과 땅이 완성되었고 하늘들의 군상들도 그러하니라.
2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던 일을 끝내시고, 자신의 하시던 자
신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신 그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음이라.

“하늘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땅의 재창조(창1:3-25)가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들의 군상들”(the host of them)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군상들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큰 무리의 별들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24:21과 에베소서 6:10-13에 언급되어 있는 영적 세력과 주관자들을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날을 보면 앞에서 여섯 번이나 반복된 “저녁과 아침”이란 표현이 빠져 있다. 비록 카톨릭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이 사실이 아무런 진리나 빛을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신학자에게나 “저녁과 아침”이란 표현이 왜 일곱째 날에만 빠져 있는지 한번 물어보라. 아마 해질 무렵까지 종일 기다려도 적절한 답변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에 관해 완전히 무지하다.) 히브리어 텍스트 역시 이에 관해 아무런 계시도 해 주지 못하며 히브리어 어휘집 역시 진리를 찾고자 하는 학생들을 혼동시킬 뿐이다.

일곱째 날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이 날은 일곱번째 천년 기간을 예표하기 때문이다(계20:1-6). 이 일곱번째 천년은 곧바로 영원 세계와 연결되기 때문에 끝이 없는 것이다(계10:9,10).

마지막 “아침”은 재림과 더불어 시작되기 때문에 이 날은 “저녁과 아침”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한 하루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더이상 그 어떤 날도 뒤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시록 20:10에서 영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말4:2, 마13:43, 계20: 7, 계21,22장). 이와 같이 전천년주의 해석 체계는 성경 해석에 정확히 맞아떨어진다(창1:20절 주석 참조). 만약 이 사실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처럼 보이면, 다음 사실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인간의 전통”은, 지난 500년간의 보수주의 학자들을 포함해, 창세기1:6에서 이미 성경적 해석에서 빗나가버렸다.

『자신의 하시던 자신의 일』

이 구절을 놓고 많은 학자들은 “창조하다(created)”(히브리어 Barah)와 “만들다(made)”(히브리어 Banah) 사이에 구별을 지어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즉 “창조(creating)”란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만들다(making)”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부터 무언가를 만든다는 뜻이라고들 한다. 사실 이 구별은 그럴싸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스토아”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없나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이다(행17:21). 그러나 히브리어 어간을 찾아내 뭔가 규명해 보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했는데(창5:1,2), 실은 그 분께서는 아담을 이미 있던 재료, 곧 적갈색의 먼지 혹은 진흙을 가지고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2:7).
주님께서는 6일 간의 창조를 끝내셨을 때 너무 힘들어 지치셔서 쉬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창조의 능력을 행사하기를 멈추신 것뿐이다.
이 구절(창2:1-3)들은 1827-1915년 사이에 메리 엘렌 화이트(Mery Ellen White)를 사로잡은 한 사상이 나오게 된 동기였다. (이 사람의 정확한 이름은 Mrs. Ellen Gould Harmon James White이다.) 화이트 여사는 “제 7일 침례교도”(Seventh Day Baptists)의 도움을 받아 “제 7일 재림교”(Seventh Day Adventism)라는 그릇된 교리를 고안해 내게 된다. 그녀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교묘하게도 “예언의 시간”(the Hour of Proph- ecy)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 시간의 강사들 그 누구도 자신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확실히 모르면서 예언의 시간을 방송하고 있다. 제 7일 재림교도들은 이 이름으로 불려지기보다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Bible Believing Christian)으로 불려지고 싶어한다. 이들은 다음의 열 가지 이유로 인해 그들의 명칭을 정직하게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 모세는 B.C. 1450년경에 창세기를 기록했는데, 그는 창세기 2:1-3을 기록할 때, 율법이 시내 산에서 주어질 때까지 이 지구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 무엇에 대하여 기록했던 것이다. (겔20:12,20과 느9:14은 이에 관해 매우 분명하며, 더이상의 해석이 필요없다.)
2. 창세기에 나오는 그 어떤 이방인에게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았다. 노아, 아담, 에녹,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그 누구도 안식일을 문제삼은 적이 없다.
3. 아담은 창세기 2:15-17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안식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명령도 받은 바 없다.
4.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안식일에 관한 명령을 주셨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창세기 3:19,20까지 안식을 위해 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5. 하나님께는 “도덕법”(십계명)과 “의식법”(레위기 등)의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의식에 속하는 안식일 규정이 돌판 위에서 발견된다면(출20:8), 안식일 다음의 계명들 역시 같은 돌판 위에서 발견되며(출20:12) 그것들은 또한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법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레19:3).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세번째 도덕법(출20:15)도 레위기 19:11의 의식법에서 발견된다.
6.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전체를 범하는 자가 되나니”(약2:10) 이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금요일 오후6시에서 토요일 오후6시까지 안식일을 지키면서 가스렌지에다 음식을 조리하는 제 7일 재림교도는 민수기 15:33에서 돌에 맞아 죽은 자처럼 버림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가스렌지에 불을 붙일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출35:3).
7. 신약에서의 계명은 두 개로(요15:10,12) 구약 성경의 십계명을 대신한다. 이 사실은 이방인의 사도에 의해 명백히 증거되었다(롬13:9-11). 고린도후서 3장에 따르면 돌판에 새겨진 것(법문)은 “제거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 아래 있다(롬6:14). 신약 시대의 “믿는 자”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는 “은혜로부터 떨어져버린 것이다”(갈5:4).
8. 팔레스타인으로부터 136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안식일을 범하는 셈이다. 팔레스타인 지방 그 외의 곳에서는 안식일이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창세기 2장에도 안식일은 언급되지 않는다(8-14절의 주석 참조).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 “안식”하는 사람은 일요일날 가게 문을 열고 돈은 많이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미국에서의 금요일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자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적으로 주신 그 땅에서는 이미 토요일이기 때문이다.(느헤미야 9장과 에스겔 20:12,20을 보시오.)
9.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의 첫째날에 모이며(행20:7), 일주일의 첫째 날에 빵을 떼어 먹으며, 일주일의 첫째날에 말씀을 전파하고, 일주일의 첫째 날에 연보를 거두며(고전16:1,2), 일주일의 첫째 날에 그들의 구세주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요20:10, 마28:10, 눅24:1), 일주일의 첫째 날에 성령을 받았다(행2:1-4). 결과적으로 “제 7일 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가 일주일의 첫째 날이 아닌 일곱째 날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미친 짓에 대해서 성령께서 뭐라고 경고하고 계시는가 알려면 다음 구절들을 읽어 보라(롬9:31-33; 10: 1-4; 3:20; 3:28).
10. 초기의 “제 7일 재림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표시로서 구약 시대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만약 이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이들은 마귀가 “속죄염소”(scapegoat)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가져갔으며 따라서 사탄이 최후의 속죄제물이었다고 가르쳤다(마12:40 주석 참조). 이뿐 아니라 이들 초기 재림교도들은 혼의 수면, 악인의 멸절(annihilation),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루시퍼에 의한 지구에서의 천년 통치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다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서 잘못이 수없이 드러나자 요즈음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바꾸었다고 한다.
(1) 사람은 피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2)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모세에게 준 구약의 계명들(그리스도의 계명들이 아니고)을 지킬 것이다.
(3) 예전에는 계시록 13:16,17을 좋아하더니 지금은 요한일서 2:4로 바뀌었다. 원래 그들의 가르침은 “짐승의 표”란 일요일날 교회에 가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히5:13) 어린 아이들에게 “제 7일 재림교” 문제는 남겨 두고 우리는 출애굽기 12: 16로 가보자. 이 놀라운 구절에 따르면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제 7일 안식일이 주어지기 전에(느9:14) 그들에게는 일주일의 “첫째날”이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날로 주어졌던 것이다. 출애굽기 12장의 문맥은 명백히 피값으로 산 바 된 믿는 자들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 은혜 아래에서 구원받는 장면이다(말씀본존학회 간, 요한계시록 주석, 계시록 12:17; 14:12의 주석 참조).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