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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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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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6월호>

1:27 『그리하여 하나님께서...사람을 창조하시니』

동물들은 “자연발생”이니 “점진적 창조”같은 용어들을 만들어 책을 쓰는 일은 안한다. (“직접적 간접성” “즉각적 점진성” 등과 같은 표현도 곧 동원될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 누구도 동물들이 4부합창을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고, 종일토록 돼지에게 복음을 전하고서 그 어떤 돼지가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떻게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는가?

1:27 『자신의 형상대로』

이 구절은 어째서 인간은 동물이 갖고 있지 않은, 또 앞으로도 갖게 되지 않을 두 가지 능력을 갖고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요1:1)에서 우리는 인간의 말하는 능력을 보게 된다. 『주의 말씀은 처음부터 참되며』(시119:160).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의 글쓰는 능력을 보게 된다. 어째서 참된 하나님의 참된 계시는 기록된 말씀이 책의 형태로 되어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는가?(시 119:89,105,130) 아무리 똑똑한 침팬치 일지라도, 세살이 되어도 말하기를 가르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우둔한 아이라도 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왜 그런가? 1954년 비에너(Wiener)는 이 문제를 인간에게는 “내적 매카니즘”이 있다는 말로 더 이상 거론치 말자고 했다. (마치 다윈이 화석의 기록들을 부주의하게 거절한 것처럼 말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과학적 선언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진화론자들, 즉 라이센코, 배트슨, 데브리스, 골드쉬미트, 심프슨, 드라이크, 베르그송, 미와와, 제우너, 브라우,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의 체면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만 묻고자 한다. 이 “내적 매카니즘”이 무엇이냐고. [아마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을 찾아낸다든가, 시험해 본다든가, 사진을 찍는다든가, 측정한다든가, 정의를 내린다든가, 조립한다든가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이 (비록 타락한 상태에서일지라도)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에 그가 하나님과 누렸던 관계를 기억나게 하므로, 그것을 되찾지 못하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창세기 3:15에서 19장의 설명을 참조할 것.] 진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청나나 사실인 셈이다.

1:27 『자신의 형상대로』

그 형상은 히브리서 1:1-3, 골로새서 2장, 고린도후서 4:4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내려져 있다. 그 형상은 칼빈 (혹은 벌콥)의 정의가 아니다. 성경은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그 형상은 인격이요, 아담은 너무도 “그리스도와 닮았기”(Christ-like)에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고전 15)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형상은 창세기 2:7에 더 잘 정의내려져 있다. 즉 인간의 정확한 구성 특징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이 말씀은 인간이 몸, 혼, 그리고 영(살전5:23)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지 않고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히4:12). 칼빈, 메이첸, 핫지, 댑니, 스트롱 및 벌콥 등이 “이분설”에 매달려 있는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1. 몸은 헬라어로 “소마”(Soma)이고 히브리어로는 “바살”(Basar)이다.
2. 혼은 헬라어로 “프쉬케”(Psuche)이고, 히브리어로는 “네페쉬”(Nphesh)이며, 인간 안에 있는 육체적인 모양으로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 혼은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
3. 영은 헬라어로 “프뉴마”(Pneuma)이고, 히브리어로는 “루아흐”(Ruach)이며,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영은 바람 혹은 공기로 비유된다(겔37:9-14, 요3:6-9).

구약성경에서는 혼은 몸에 붙어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아담은 그의 몸 안에 혼을 “느슨하게” 담고 창조되었다. 만약 아담이 그의 혼이 몸에 붙은 채로 창조되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의 육신(몸)은 아직 로마서 7:8의 “육신”(Flesh)이다. 골로새서 2:11의 “육신”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 몸, 그리고 영은 마치 바람으로 가득 찬 튜브가 들어 있는 타이어와 같다. 또한 혼은 육체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계6:9-11), 혼은 완전히 타버리지 않은 채 몸의 형태로 영원히 지옥에서 탈 수 있다(고후12:1-4). 혼은 마치 고무 튜브가 타이어에 딱 들어맞듯이 몸에 잘 들어맞는다. 따라서 모든 “혼”은 각각의 다른 특질을 지닌 개인적 피조물이다. 이 혼은 “에고”(έγο)이며 각 개인의 “나”인 것이다. 히브리어를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더이상 그 어떤 새로운 진리도 찾아낼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은 이 “혼”(soul)이라는 단어가 “생명”(life)이라는 단어와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가끔 동물들을 언급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민31:28, 계16:3)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의 이론을 가지고 “혼”이란 땅콩 모양의 자그마한 물체로 몸의 그 어느 곳, 아마도 심장에(장미십자회와 신지학자들에 따르면 왼쪽 심실에 있다고 함), 혹은 뇌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기도 했다. 또한 이 이론은 카톨릭의 “혼”에 대한 기본 이론이기도 하다.
“혼”, 혹은 “나는 ..이다”(I am)는 예표상 하나님 아버지에게 해당되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요1:18,딤전6:16)이다. 인간의 타락 후 이 혼은 “사망의 몸”에 붙어버렸다(창17:9,10 주석참조). 그 결과 구약 성경에서는 “혼”(soul)이란 단어를 몸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창19:20;17:14, 레22 :6; 22:11; 23: 30, 민31:28). 이 사실로 인해 러터포드 판사와 럿셀주의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이 몸과 같이 무덤으로 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이처럼 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지옥행이 되어버렸다. 성경 말씀은, 사람의 혼은 죽을 때 몸을 떠난다고 말씀하신다. 죽은 자의 혼은 흙이 채 닿기 전에 몸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영은 바람 혹은 공기처럼 모두 사람에게 공통되며(고전2:11) 모든 동물에게 있어서도 공통된다(전3:21). 타락 이후 영은 죽은 영이 되었으며(창3:5-7 주석참조), 따라서 그 영은“다시 태어나야” 한다(마27:50-54 주석참조). 구약 성도들은 에녹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 에녹은 예외 인물인데, 이는 그가 결코 죽지 않을 일련의 사람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1:3-6 주석참조). 한 인간이 거듭날 때 “거듭”나는 것은 그의 혼이 아니라 그의 영이다(요3:6 참조). 이 시대에 있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펑크난 타이어와 같다. 그는 죽은 영을 지닌 살아있는 육체일뿐이다(엡2:1-6).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죽은 몸 안에 살아있는 영인 것이다(롬6:2-10 참조).
“몸 혹은 육신”은 몸 혹은 육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은 육신에 대해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육신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는 바울의 계시를 실행하지 않는다(롬6,7장). 수도원에서 육신을 지나치게 학대하자, 개혁자들 특히 칼빈이 앞장서서 아담의 성품을 “영화”(Spiritualized)시켜야 하며 따라서 육신도 영화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상한 신학 이론을 펼치고 나섰다. 이 신학은 필로, 판태누스, 오리겐의 신학인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육신(Flesh)은 “육신”을 의미할 뿐이다.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롬7:18)라고 바울이 말했을 때 말한 그대로를 의미한 것이지 무슨 다른 영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칼빈주의적으로 해석해보면 “육신”(피부 그 자체)은 좋은 것이지만,“그 안”에서 역사하는 그것이(롬7:23) 나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엉터리 이론에 대해서는 무디, 토레이, 피니, 선데이, 카레이, 고폴스, 스터드, 리빙스톤 등과 같은 사람들의 무덤을 쳐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들의 육신(Flesh, Skin)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어떻게 이들의 육신이 썩어버렸으며 벌레가 그 육신을 먹어버렸겠는가? 당신이 덮고 있는 그 육신이 아무 문제 없다면 어째서 새로운 몸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요일3:1-4, 빌3:20,21)
하나님의 말씀(A.V.1611)의 권위를 거부하는 죽은 정통주의자들의 사적인 해석에 갖다 맞추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인간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혼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영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님(Holy Ghost)이시다. 인간은 또한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4:1-8). 아담과 예수님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아담은 어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붉은 갈색의 흙(히브리어로 “아담”)에서 나왔다. 인간의 몸은 14개의 화학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흙의 구성원소와 같다. 반면 그리스도는 “태어나신 아들”(Begotten Son)로 그는 영원 가운데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들(unborn Son)로 존재하고 있었다(사9:6, 잠8:22-32). (그런데 칼빈은 세르베투스(1511- 1553)가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이 히브리서 1:5에 의해 창세기 1:1 이전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화형에 처했던 것이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둘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다(눅 3:38을 보시오). 그러나 문제는 아담은 그의 피를 잘못된 곳에서 얻었던 것이다(창 2:23 주석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 자신의 피였다(행20:28). (이 진리를 말살하려고 거의 모든 새로운 번역 성경들이 이 사도행전 20:28을 변개시키고 있다. 아마 모든 종교가 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의 불가지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피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 믿기 어려운 모양이다. ASV(1901)가 골로새서 1:14에서도 “피”(the blood)를 제거해 버린 것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아담은 살아 있는 혼(창 2:7)을 갖고 있었으나 이 혼이 “상실”(lost)되었고 결국 죄의 몸에 달라붙어 버렸다. 하나님의 엄하신 경고에 따라(창 2:17) 그가 갖고 있던 산 영은 죽은 영이 되어 버렸다. 원래 아담은 그의 창조주와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의 생각(Mind)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날 하나님의 생각(Mind)은 모든 철학자들의 최고의 숭배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이 높고 고귀한 위치에서 타락하여 자기 의를 주장하는 거짓말쟁이 위선자가 되어, 거저 주시는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서 어떻게든 종교적 “방법과 수단”을 찾아내서 스스로를 구원해 보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창 3:1-15 주석 참조).
이 사실이야말로 오늘날도 여전히 과학자, 교육자, 그리고 지성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만약 창세기 1-3장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그 의도가 그 기록대로라고 한다면 타락한 죄인이 되어 버린 인류에게는 저주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옳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따른다 할지라도 저주에는 변함이 없다(잠14:12을 볼 것). 가드너가 말하기를 “만약 인간이 자기가 믿고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해 실행하고 살았는데 죽고 보니 지옥에 와 있다면 그는 누구에게 화를 낼 것인가?”라고 했는데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그는 당연히 하나님께 화를 낼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마13:42)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지금도 하나님께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죽는 순간 깨어 보니 불못에 처해 있다면 이에 대해 얼마나 하나님을 비난할 것인가는 뻔한 일이다. 창세기 1-3장의 진리는 성경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이교 철학자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해 낼 수 있다는(창4:1-6에서 카인을 보시오)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만약 인간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진실되게 추구하면 그는 “목표를 이룰 것이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들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는 목표를 달성했는가를 확신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불교, 도교, 유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은 목표수행에 적절치 못한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필요로하는 것은, 창세기 1-3장이 옳다면, 한 형상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침, 기도, “업보”(karma) 제거, 물레잦기, 염주 굴리기, 황금률 실천하기, “성체” 받기 등 그 어떤 것도 장난감 종교일 뿐이다. 성경이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엡2:1-6)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타락한 형상을 되찾는 새로운 출생이 없이는(사람을 어떤 한 교회에서 집어넣는 행위에 불과한 어린 아이에게 물뿌리는 것과 같은 장난 말고) 인간은 버려진 존재(lost)라고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학체계는 칼빈주의와 마찬가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패한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골2:8). 이들은 서양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만약 인간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 대신 종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가르침을 잘 믿고 따르면 그는 자기의 믿는 체계에 부합되도록 성경의 의미하는 바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바로 이와같은 철학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 로마 카톨릭이다. 오늘날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여전히 이 원칙 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마16:16-18 주석을 참조할 것).
성경에서부터 종교 체계를 발전시켜 보려는 모든 시도는 (곧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대치해 버리는 셈인데) 그들의 예정된 목적지인 지옥으로 귀착될 것이다(벧전2:8, 벧후3:16). 왜냐하면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지 않고는 인간은 다윈과 헉슬리가 상상했던 그대로 동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있다는 자들이 한 가지 면에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새로운 출생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들은 교육받은 원숭이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 이 구절 역시 진화론자들에게는 “두개골”이나 “화석” 문제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를 던져 준다. 도대체 “성”(性)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단세포 동물은 성의 구별이 없고 그 어떤 “성”으로도 발전되지 않는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온갖 것을 꾸며내고 발명해 내야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답이 있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제발 그 책만은 들먹거리지 말아 달라. 그 어떤 엉터리 같은 이론도 좋지만 그 책만은 제발 언급 말아 달라고 한다(기가막힌 노릇이다. 여러분이 짐작하다시피 “과학적 진보”라는 것은 결국 알지 못하는 위험의 원천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 매카니즘일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How Life Began, 저자가 당혹해할까봐 그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라는 책을 살펴봄으로써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현대 과학 연구가 어떤 것인지 정체를 살펴 보도록 하자. 최초의 세포가 창조되기 전 - “어쩌면” 수십억 년 전쯤일텐데 - 여러번에 걸친 시험과 실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 있어서는 여러 단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원형질 분자들이 중간적 형태로부터 발생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분자들은 “그 어떤 과정을 통해” 스스로 번식을 하게 되었고 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이들은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구분짓는 경계선 근방에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바로 이들이 최초의...”
도대체 이따위 이론을 박사라고 하는 분들이 제시하다니, 이것이 지름길인지 우회로인지 구분이 안간다. 이것은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상상에 불과하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 어떤가 보자. “최초의 세포가 창조되기 전 - 이 창조는 아마 하나님 자신에 의해 되었을 것임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셨을 것이다. 그 분들이 계셔서 창조를 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창세기 기록은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세가 기록한 그대로가 사실일 것이다.” 위의 이론과 지금의 추정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보라. 도대체 첫번째 주장이 두번째 것보다 더 과학적이고 낫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진화론자들 마저도 창세기 1장의 재창조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즉 생명이 물에서부터 나왔고 식물은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이다.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증거가 창세기 기록을 확인해 준다고 인정한다면 그들 스스로의 주장을 확인해 주는 증거는 무엇인가?(창1:27 주석참조). 규조와 아메바는 성이 없으며 더군다나 두 개 혹은 세 개의 세포로 된 동물은 이제껏 존재해 본 적이 없다. 단세포 동물과 다세포 동물과의 차이는 최초의 박테리아가 거대한 뇌룡에게 독감을 옮긴 이래로 존재해 오고 있는 진화의 틈새(gap)인 것이다. 이것은 절대 불변의 진리로 아무리 “용어를 바꾸는” 꾀를 써봐야 이 진리를 변개할 수는 없다(용어 바꿔치기는 절대 진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현대인들에 의해 사용되는 흔한 수법이다).
성 구별이 없는 단세포 동물은 열을 가해도, 압력을 가해도, 습도를 바꿔도 절대로 스스로 양성의 두 개의 세포를 가진 동물로 진화하지 않는다(한번 당신 평생을, 그리고 당신 자식과 손자들에게 그들의 평생을 바쳐 이 실험을 해 보도록 하라. 두 개의 세포를 가진 동물이 단세포 생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결론은 아무리해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