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창세기 주석 분류

“둘째 하늘”의 실체 - 리비야단의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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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2월호>

1:8 『하나님께서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더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은 이 날의 창조시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독자들이 에베소서 6:10-13, 이사야 24:21, 욥기 41:31-32을 잘 살펴 보고서 거기에 나타난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이 표현이 빠져 있는 이유는 분명해 질 것이다. 태양계, 은하계, 성운, 성단, 성좌 등이 존재하는 둘째 하늘에는 귀신적 권세들, 타락한 천사들 및 사탄 자신 역시 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콜롬버스 시대의 옛날 “과학자”들이 우려하던 “괴물”들의 지대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적인 존재들이 태평양과 대서양에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해서 이들의 실제를 몽땅 없애 버린 어리석은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욥기 41:31-32 전에 나오는 바다가 태평양과 대서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 매우 신이나서 “이세상의 신”을 접촉하기 위해 잘못된 통치구역으로 자꾸 위로 올라가고 있다(시115:16).
이사야 27장과 계시록 12: 8,9(계시록 주석 참조)에서 확인되는 욥기 41장의 “바다 괴물”인 “리비야단”(Leviathan)은 지금 물 가운데 있다. 따라서 욥기 41: 31-32은 창세기 1:2의 “깊음”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이 “리비야단”은 고래나, 악아나, 코끼리나, 혹은 소용돌이나,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아무리 주석가들이 이 자를 숨겨 주려고 다른 이름을 붙여줘도 소용없다. 이는 이 “리비어단”은 머리가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시편 74: 14의 영어 문장은 이러한 신비를 벗겨 주기에 충분하다. 그헐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히브리어 학자일지라도[게세니우스(Gesenius), 델리취(Delitgsch), 칼리취(Kalisch), 노블(K- nobel), 크레겔(Kregel), 드 로시(De Rossi), 케니코트(Kennicott) 등 그 누구라도] “리비어단”을 악어라고 주석해 놓고는 자신들이 자격있는 성경 주석가라고 말한다면 그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이 겠는가? 이 리비어단은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용”과 “뱀”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 자는 어찌나 지혜로운지 아주 간단한 영어문장을 성경에서 읽어보기도 전에 5000명이 넘는 성경 학자들을 무너뜨려 버린다. (아주 쉽게 말이다.) (비록 창세기1:31에서 “모든 것이 좋았더라”고 했지만 이 절의 문맥은 분명히 땅 위의 인간과 동물의 창조와 연관 되어 있다.)


바다(sea)와 바다들(seas)의 차이


1:9-10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한 곳”(one place)은 히브리어로 “magon"으로 이 말은 “한 바닥”(one leed)이란 뜻으로 국자 모양으로 솟아오른 해저의 바닥들이 다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염두에 둘 것은 기록자가 태양계 바깥의 창조행위를 더이상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물은 별들이 있는 창공의 “위, 아래”에 있는 물이 아니고 (창세기1:6-8절의 주석을 보시오), 새들이 날아다니는 창공의 위, 아래에 있는 물이다 (창세기 1:20 -23을 보시오.) 이 창공을 스코필드 주석성경 편집위원회, 라킨(Larkin), 펨버(Pember), 데한(Dehcian), 엡스(Epps), 멕클라인(Mcclain) 그리고 모든 보수주의자들은 창세기 1:6-8의 창공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실수가 고의적이란 점이다. 이들은 “과학의 발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제들을 기분 상하게”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9- 10의 “바다들”(seas)은 창세기1:6-8의 “바다”(sea)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후자는 창세기 1:2에서 “거대한 깊음”(The Great Deep)이라고 불리고 있다. (시편 148:3-8절에서 보면 시편기자는 하나님 자신으로 부터 시작하여 그 분의 역사가 세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둘째 하늘에서 첫째 하늘로, 그리고 땅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창조 - 그 종류대로

1:11-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땅 위에 풀과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과실수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땅이 풀과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나무를 내었더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더라.』

이 귀절에서는 세 가지 사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모두가 다윈의 추종자들, 즉 윌리암 팔리(William Paley, 1934-1829), 진 뱁타이스트 라마크(Jean Baptiste Lamarck, 1944-1829), 로버트 챰버(Robert Chambers, 1844) 및 라일(Lyell, 1797-1875) 등의 과격한 이론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첫번째로 식물 창조는 24시간 안에 일어났다. “날”(day)이라는 말 대신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것이 24시간인 것을 알 수 있다. 1:8과 1:13의 날을 “일 천년”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창세기 1:5의 주석을 보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식물이 햇빛 없이 천년 동안 살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15,16절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태양이 나타나지 않는다.)
두번째 사항은 식물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냉각 물질에서부터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물은 “미행설설”(Planetesimal theory), “성운가설”(Nebular Hypothesis)혹은 “해진 이론”(Tidal theory)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식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관점을 택하셨다(막13:19). 주님의 추종자라는 자들 중 비록 주님보다 자기가 더 안다고 딴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쓸때 없는 짓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식물을 만들어 내고자 할 경우, 당연히 “창조”는 “자연 발생”(spontaneus geneeiayian)에 의해서나, 우주적 배종 광포(panspermua)로 인해, 세포 모델들,교질(colloids), 효소 그리고 바이러스 등으로부터 진화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만큼이나 똑똑하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겨우 인정해 주고자 하는 짓일 뿐이다. (로마서 1장을 보시오.) 창세기 1:12의 창조는 1:11의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결과일 뿐이다.
램(Ramm)이 쓴 <과학과 성경에 관한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책에 보면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충실한 자들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소위 “점진적 창조설”(progressive creationsim)로 창조에 관한 혼합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모순되는 것을 해석해 놓은 “잡탕”에 불과한 것으로 “점진적 교육” 혹은 “점진적 째즈”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버나드 램(Bornsand Ramm)에게 있어서는 다원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 점진적인 행위들”의 기록인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 창조설”(전에는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불리웠음)은 잔(Zahn), 미바트(Mivart) 그리고 돌로돝과 같은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전형적으로 가르치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용어들은 진화론자들과 타협하는 행위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진화론자들은 진 애스트럭(Jean Astruc, 1684-1706)에서부터 아인슈타인(Einstein , 1879-1955)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식의 “점진적 창조설”은 유신론적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다. “점진적 창조설”은 반공주의 대신 “제국주의”를, 종교적 파시즘 대신에 “카톨릭”을, 타협 대신에 “에큐메니컬”을, 자유의 포기 대신에 “협력”을, 인종혼혈대신에 “통합”을, 뻔뻔한 불신 대신에 “신정통주의”를, 술 주정뱅이 대신에 “만년 알콜중독자”를, 부랑자 대신에 “통과승객”을,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불신 대신에 “신적 잉태”를, 거듭남의 체험 대신에 “완전히 내어맡김”을, 피로 씻음 대신에 “당신의 삶을 그리스도에게”를, 성경 말씀의 거부 대신에 “목회 심리학”을, 그리고 부흥회 대신에 “종교 강조 주간” 등을 사용하여 진실을 호도하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건전한 교리에 모순되는 그 어떤 것이 우리를 미혹하는 경우 그것이 과학이든, 교육이든, 종교이든, TV든, 잡지든 간에 성경에 어긋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자 한다.

본 귀절에서 주목할 세번째 사항은 하나님의 창조는 “그 종류대로” 번식함으로써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론 넬슨(Byron Nelson)이 1952년 어거스버그에서 출판한 책을 참조하시요.] 현명한 독자라면 창세기 1:11 -13절을 읽을 때 민들레는 피투니아를 퍼뜨릴리 없고, 백합이 장미를, 감자가 오렌지를, 사과가 바나나를, 밀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라면) 수박을 번식할 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잡종이 나오는 것은 다른 종끼리 교배함으로써 나오게 되는데 버반크(Burbank, 1849- 1926)라는 학자는 “순종의 선택적 번식”은 “분리”(Segrsegation)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오래전에 입증한 바 있다. 이것은 개나 고양이의 번식은 전문으로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자연법칙인 것이다. 이 상식은 모르는 자들은 전미 흑인 향상협회(NAACP), 대법원 및 로마 카톨릭 사제들이나 찰스 다윈 뿐이다. 레몬과 비슷한 불수감(Citron)을 참외 곁에 심어놓으면 참외가 레몬 빛깔을 띄게 된다. 벤탐 옥수수를 일반 옥수수 곁에 심어 놓으면 두 식물을 합해 놓은 맛이 나게 된다. 인간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혼혈과 변이는 순수혈통보다 열등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모든 씨는 “그 종류를 따라” 생산하게 되어 있다.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진화론자들의 독선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독자들에게는 헨리 모리스(Henry Morris)의 <성경과 현대과학, Moody Press, 1951> - 우리말 번역본 있음 - 이나 윌버 스미스(Wilbur Smith)의 을 읽도록 권하는 바이다.

모팻(Moffat)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견해에 일치시키기 위해) “그 종류를 따라”(after his kind)를 “of every kind”로 번역함으로써 다윈과 그 일당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슬쩍 피해 버리고자 했다. 사실 “Fruit of every kind" 한 말은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신학적 교리에 대한 하나의 입장 표명인 것이다. 히브리어의 “라미나”(Laminah)는 모팻의 번역이 나올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Laminah”와 “Min”은 히브리어에서 분리될 수 없는 전치사로 “to and for” 혹은 “from and than”이란 뜻이다. 반면“every”는 히브리어로 Col(kol)로 본문 그 어디에도 그러한 단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모팻의 번역은 미국표준역본(ASV, 1901)과 개역표준역본(RSV, 1952)의 번역 위원회가 취한 전형적인 태도요, 이것은 이미 고물이 되어버린 다윈의 이론을 성경에 억지로 집어넣어 성경기록의 과학적 사실을 무너뜨리려는 의도 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짓은 과학이나 학문이라 할 수 없고 거짓 교리의 주입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