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요한복음 주석 분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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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10월호>

1. 엄청난 값을 치루신 하나님

15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 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인 것이다(롬 5:8). 우리들은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 뒤에 감추어진 위대한 희생을 알아야 한다.『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졌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값을 치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요한복음 3:16의 올바른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나타났으며, 그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멸망뿐임을 알려준다. 갈보리에서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사랑을 거부하면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떠드는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 무엇이라 말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한 사람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딤전 2:4, 벧후 3:9, 계 22:17). 그 사랑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좁은 영역에만 제한되지 아니하고 이방의 죄인들에게까지 넘쳐 흘렀다. 하나님은 자기의 가장 좋은 것도 아끼지 아니하셨다.
갈보리의 사랑으로 인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지옥으로 달려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멸망과 영생이 그들 앞에 놓여져 있으며,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것이다.

2. 원치 않는 정죄

17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

믿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롬 8:1).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하여 정죄를 받으셨고,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초림 때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죄인들을 멸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심이다(눅 9:56). 그러나 다시 오실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은 자들에게 불길 가운데서 벌주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살후 1:7-8).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다. 그는 이미 사형이 선고된 죄수와도 같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정죄하실 의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는 그가 구원받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19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인간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두움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빛을 거부한 이유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행위는 마음을 드러내는 통로이다. 그들의 악한 행위는 어두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살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씀(롬 3:10,23)이 명백한 진리임이 즉시 입증될 것이다.

3. 진리를 행하는 자

20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21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자기의 행위를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시더라.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정죄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은 빛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그 길도 모르고, 그 빛의 인도함에 거하지도 아니하는도다』(욥 24:13).

22 이런 일들 후에,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땅으로 와, 주께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침례를 주시더라.

이 말씀을 요한복음 4:2과 함께 참고해 볼 때 주님께서 직접 침례를 베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위로써 그의 종들이 행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행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동일한 원칙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는 것이다(고후 5:20). 우리가 기도드리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진정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간구하시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요 14:13,14).

4. 많은 물과 침례

23 요한도 살림 근처 애논에서 침례를 주고 있었으니, 이는 거기에 물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요한이 그때까지는 감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요한은 신실하게 자기 일을 계속해 나갔다.『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되어 거두리라』(갈 6:9). 침례가 물을 뿌리거나 붓는 형태였다면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이 “에논에 물이 많기 때문에” 거기에서 침례를 주었다는 사실은 침례의 성경적인 형태가 물에 잠그는 것임을 암시한다. (헬라어와 영어 둘 다에서 ) “침례를 주다”에 해당하는 말은 ‘담그다’ 또는 ‘잠그다’라는 의미이다. 침례인 요한은 마태복음 14:3에서 헤로디아의 일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이 시점은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5. 요한 vs. 예수 그리스도

27 요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다만 그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내가 말한 것을 증거해 줄 자는 바로 너희니라.
29 신부를 얻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신랑의 친구는 곁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게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옆에 서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더 좋은 편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마리아와 같이 주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눅 10:38-42).
“신부”는 분명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질 교회를 가리킨다. 이 신부를 얻는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어린 양의 혼인식에서 신부로서 등장할 것이다(엡 4장, 시 45편, 계 19장). 그렇다면 신랑의 친구는 누구인가? 신랑의 친구는 모세로부터 침례인 요한까지 구약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침례인 요한은 신랑의 친구로서의 기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30 그분은 융성해야만 하나, 나는 쇠잔해야만 하리라.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로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사람인 반면에(27절),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들을 그의 손에 주신 분이다(35절).
둘째로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일 뿐이다(28절).
셋째로 그리스도는 신랑이신 반면에, 요한은 신랑의 친구일 뿐이다(29절).
넷째로 요한은 땅에서 난 자인 반면에, 주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며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다(31절),
다섯째 요한은 성령을 제한적으로 받았을 뿐이나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자”라고 증거되어 있다(34절).
여섯째로 요한은 종인 반면에 구세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35절).

6. 위로부터 오신 분의 증거

31 위로부터 오시는 분은 만물 위에 게시고,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있어서 땅에 관한 일을 말하느니라. 그러나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만물 위에 계시느니라.
32 그분이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시나, 아무도 그분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느니라.

이 말씀은 26절에서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고 선언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영적인 결과를 도표로 작성하고자 할 때의 통계적인 숫자는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귀한 교훈을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내용은 참된 것이며, 주님은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므로 직접 보고 들은 일들을 증거하시는 것이다(요 8:23).

33 그분의 증거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느니라.
34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씀하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들을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더라.

그분의 증거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이다.『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일 5:10). 아들을 믿는 자들은 현세의 소유물로서 “영생”을 얻으며,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정죄를 받았고(요 3:18)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진노의 자녀들”이다(엡 2:3;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