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소선지서 주석 분류

음란한 아내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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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4월호>

호세아 1장



1:1-5 『유다의 왕들로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와 히스키야의 시대요, 이스라엘 왕으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주의 말씀이라. 호세아를 통한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 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얻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는 그 땅이 주로부터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았더라. 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있다가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을 것이며, 이스라엘 집의 왕국을 그치게 할 것이요,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더라.』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매춘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2절) 시작된다. 그러나 첫 부분부터 학자들은 합심해서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역사”로 취해서는 안되며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오리겐, 제롬 같은 알렉산드리아 이단뿐 아니라 위대한 개혁자로 알려진 존 칼빈조차도 이러한 이단적인 생각을 했다. 쿠르츠, 델리취, 벨하우젠, G.A. 스미스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성경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주의 날”에 성취될 예언
호세아 1:1-5은 문자적인 역사이다. 만일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얻으라고 말하는 2절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웃시야, 아하스, 히스키야 등의 왕을 열거한 1절은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4절과 5절은 역사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으나(왕하 9:14; 10:14; 15:10, 17) 2절과 3절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파괴적 비평을 일삼는 자들은 열왕기와 역대기에는 이스르엘 골짜기에서의 중요한 전쟁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내세운다. 그러나 주어진 본문은 구약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5절에 대한 성취는 명백하게 호세아 1:11과 2:22에서 발견된다.
5절의 “그 날에”(at that day)라는 표현은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과 관련되는데, 이 표현은 선지서에서 100번 이상 언급된다.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활”(5절)이 꺾여진 후에 기뻐하며(2:22) 다시 모인다(1:11)는 사실을 알 것이다. 신약에서도 반역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다는 교리를 다루고 있다(롬 11:25).

음란한 아내를 얻은 호세아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2절)와 결혼해야만 했다. 호세아의 삶은 에스겔과 마찬가지로(겔 12:4-7)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교훈이 되었다. 디블라임(3절)의 딸 고멜이 “음란한 자식들”(2절)을 낳은 것은 『이는 그 땅이 주로부터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니라.』(2절)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더멜로우는 고멜이 결혼한 후에 음행한 것이며, 호세아는 그녀가 음란한 여인인 줄 모르고 결혼했다고 말함으로써,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주신 하나님의 예언적인 뜻을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가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호세아는 그녀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출산한 아이들이 “음란한 자식들”인 것도 알았다. 호세아는 창녀이며 간음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 여자는 결혼 전에는 매춘부였고, 결혼한 후에는 간음하는 여자였다(3:1).
선지자들은 “평범한” 성도들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가 가서...고멜을 취하였더니...』(3절).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말씀하신 후에 가서 그 여자를 취하였다. 『...그녀가 임신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았더라』(3절). 그 아들은 곧바로 “이스르엘”이라고 불리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 흩으시다”이다. 이 단어는 “이스르엘의 피”(즉 하나님께서 심으셨던 어떤 것에 대한 피)와 관련이 있다. 이 피는 잔인한 예후(왕하 10:31을 볼 것)로 인해 복수를 한다(4절).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은 흩어지게 된다(호 8:8).

이중적으로 성취되는 예언
4절과 5절에서 살펴본 예언이 이중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성경 개정자들과 성경 해석자들이 걸려 넘어진다. 성경 한 구절에 역사적이면서도 예언적인 언급을 기록하신 많은 예들이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전천년 성경해석 체계가 아니면 이해가 불가능하다. 느부캇넷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건(왕하 24장, 대하 36장)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고, 바빌론의 영원한 멸망(렘 51:62-64) 또한 지금까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티투스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은(눅 21:24) 실제 일어날 사건(계 11:1-3)에 대한 예행 연습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과 “그 날에”(in that day)라는 표현은 10-60가지의 사건에 언급되었는데, 이는 B.C. 400년 전에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사 1-39장). 하지만 이러한 예언들은 과거에 성취된 것과 동시에 여전히 미래에도 성취될 예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즉, “과거에 성취되었던” 이 예언들은 이 시대 말에 다시 한 번 성취될 것이다.

4절의 “조금 있다가”는 하나님의 달력에서는 매우 짧은 순간이다. 삼십 년 후에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왕상 18:11). 그러나 므깃도 골짜기의 동남쪽 끝에 있는 므깃도를 팔레스타인 지도에서 확인하지 않고서는 5절의 이스르엘 골짜기로 갈 수 없다. 이것은 계시록 16:16에 언급된 “무리들의 언덕”(아마겟돈)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군대들(계 19:14-21)이(이스라엘의 군대가 아니다.) 멸망의 아들(계 19:19)을 이기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이스르엘의 날”(호 1:11)은 앗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이 패배한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시대와는 별도로 이스라엘이 다시 모여지는 것을 언급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9:25에서 호세아 1:10을 인용한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이스르엘”은 다음 세 가지와 연관이 있다.
1. 열왕기하 17장에서 앗시리아 왕에게 패배한 이스라엘 군대의 사로잡힘.
2. 동쪽으로부터 200만 군대에 가까운 막강한 이스라엘의 멸망.
3. 적그리스도의 패배와 천년왕국에서의 이스라엘의 재집결.

영적인 간음
1장은 호세아의 사역에 대한 배경을 설정한다. 호세아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결혼”했다가 “배반”한 한 민족을 강조하고 있다. 영적인 우상숭배는 구약 전체를 볼 때, 간음과 연관된다(민 25:1-8). “영적으로” 마귀를 숭배하는(고전 10:20) 한 행위였던 행음(계 2:20)과 남자 동성연애(왕하 23:7)는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에서(로마, 그리스, 이집트, 바빌론에서처럼) 아주 많았다. 이스라엘은 버림받아(호 4:6) 이혼증서(신 24:1)를 받은 아내 같았다. [마태복음 19:7의 “이혼 증서”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비블리온 아포스타시우”로, “배교한 성경”(apostate bible)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너무도 분명하게 고린도후서 11:1-3의 순결한 신부는 그리스도의 단순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인정해 주는 학위”를 신으로 받아들여 속임당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에게 배교한 성경을 준 것이다. 이 “성경”은 1884년 “구원받은” 영국인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1901년에는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1946년에는 자유주의자들에게, 1969년에는 근본주의 대학들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RV라는 이름으로, ASV로, NIV로, 또 다른 어떤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결국 똑같은 책인 “이혼증서”, 즉 알렉산드리아 이단이 추천하는 이단 교과서인 것이다.]
호세아서에서는 주로 버림받은 아내처럼(2:1,14) 잠시 거부하다가 후에 남편을 만족시키는(사 54:5)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다.

자비의 조건

1:6-7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녀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이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집에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을 완전히 제하여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내가 유다 집에는 자비를 베풀고, 주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활이나 칼이나 전쟁이나 말이나 기병으로 그들을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더라.』

두 번째 태어난 아이는 “로루하마”(“사랑받지 못하는”, “동정받지 못하는”의 뜻)이다. 이 말은 “가엾게 여겨지지 못하는 여자”라는 뜻으로, 6절의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집에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의 본문으로 정의된다.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그의 자비가 영원히 지속됨이라.”(시 136편)고 말씀하신 분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조건(로마서 9:16을 볼 것. 칼빈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했다.)을 만족시켜야만 “영원히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다. 이 시대에 영원한 자비를 위한 하나님의 조건은 로마서 10:9,10과 에베소서 2:1-8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반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조건은 신명기 28:1-14, 레위기 26:1-3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호세아가 설교를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을 위한 잔은 채워져 있었다. 호세아는 “부정적인” 설교를 했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집에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6절).

『그러나 내가 유다 집에는 자비를 베풀고...』(7절). 이스라엘이 죄악을 행하던 이 시기(B.C. 680-B.C. 670년경)에 유다는 아직 북쪽의 열 지파에 만연했던 배교의 극치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유다가 아직도 “성도들과 더불어 신실”(호 11:12)한 것을 주목하라. 이 시기는 히스키야가 왕위에 올랐던 때이다. 『주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7절). 이 구절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히스키야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왕하 19:35)과 연관된다. [이는 재림을 보여주는 모형으로 산헤립은 구약에서 발견되는 아주 강력한 죄의 사람의 예표이다(사 10:5-19).]

1:8-9 『그녀가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더라.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이는 너희가 내 백성이 아니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임이라.』

세 번째 아이는 “로암미”(문자적으로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라고 불려진다. 이것은 9절에 정의되어 있다. 출애굽기 19:1-7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발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2:7에서 모세 앞에서 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버리셨다(출애굽기 주석서를 참조할 것).
그렇다면 북쪽 열 지파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자비를 받았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심겨졌으나, 흩어지게 될 것이다.

심판과 분노에서 사랑과 자비로

1:10-11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정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게 되리라. 전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했던 그곳에서 그들이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리라. 그때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자기들에게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오리니, 이는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라.” 하시더라.』

이야기는 10절에서 180도 거꾸로 돌아간다. 9절에서는 『이는 너희가 내 백성이 아니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10절에서는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어두운 심판과 분노의 장면에서 가장 밝은 사랑과 자비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이보다 더 선명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란 어렵다. (시편 89:37-38과 22:16,23에서 같은 표현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진노를 배제시킨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심판을 배제시킨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을 배제시킨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하나님의 책에 계시된 하나님은 “현대인”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현대인”은 자신이 묵인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묵인해 줄 수 있는, 자신과 같은 죄인(요 18:40)을 원한다. 현대인은 기준도 없고 원리도 없고 윤리도 없으며 도덕도 없고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애매모호한 “에너지의 전자장”을 원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현대의 교육받은 바보 천치에게는 부적합하다. 그래서 현대의 교육받은 바보 천치들은 니체와 더불어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자들이 죽었다(엡 2:1-6).
10절과 11절은 다니엘의 70째 주 끝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한 우두머리”(11절)는 다윗(겔 34:23)이 될 것이다. “함께” 모이는 것(11절)은 두 집들과 세워진 언약(히 8:10)이 되어 하나의 막대기(겔 37:16)처럼 그들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통치기간(왕하 4:25)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메시야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10절) 될 것이다.
<강단 주석>을 쓴 주석가들은 후천년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10절과 11절은 “복음시대”에 대한 언급이고, “그 땅에서 올라오리니”(11절)라는 말은 이 시대에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그리스도께로 회심한다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또 더멜로우는 “함께 모이는 것”을 이스라엘 전체가 신약교회에 모이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모두 틀렸다. 이스라엘은 신약의 “복음시대”에 영적으로 그리스도께로 회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문자적이고 실제적이며 가시적인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하게(암 9:15) 될 때인 “그 날들 이후”(히 8:9-12)까지는 그리스도께로 영적으로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겔 36:26).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신약교회에 들어온 적이 결코 없다.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잘못을 범하는 이유는 바울이 대환란 기간 중에 유대인의 남는 자(Jewish tribulation remnant)를 다루는 구절(10절)을 구원받은 이방인을 설명하는데 적용하기 때문이다(롬 9:26). 이것이 제미에슨, 포셋, 브라운, 더멜로우와 그밖의 다른 사람들이 그 구절에서 걸려 넘어지는 이유이며, 이들은 10절과 11절(그리고 2:23)은 과거에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고 또 앞으로 살펴볼 것이지만 “이중적 성취”(dual fufillment)는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을 다룰 때 적용되는 구약에서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아래의 ‘성서’들에서는 방금 읽은 구절이 다음과 같이 바뀌어져 있다.
1. NASV : “말씀의 시작이라”(1:2)를 “주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셨을 때”로 바꾸었다. 6절에서는 “그들을 완전히 제하여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를 뜯어내 버렸다. 원어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줘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로크만 재단은 히브리어 “베나이 이스라엘”을 “아들들”로 번역한 정통 유대학자나 랍비가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을 “아들들”로 오역하였다.
2. ASV(1901)는 전체 구절에서 “주”라는 말을 빼버리고 대신 “여호와”(1절, 2절, 4절, 6절, 9절)를 집어 넣음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을 도와주고 있다. 양심적으로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한 학생은 물론 “여호와”라는 말이 ASV 신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구약에서의 “주”(LORD)와 신약에서의 “주”(Lord)가 분리되었음을 말해 준다. 러더포드 판사나 럿셀 목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면 ASV(1901)가 말하는 요한복음 9:38의 난외주를 보라. 거기에는 그리스도는 “창조주”(Creator)가 아니라 “피조물”(Creature)이라고 쓰여져 있다.
3. 돗 역본(NEB)은 그 “거룩한” 손으로 “음란”(whoredom)이라는 말을 건드려 “바람둥이를 아내로 얻어”(2절)와 “가치없는 여자”(3절)로 대체시켰다. 3절의 “디블라임”은 본문에서 예후디의 손칼로 잘려 나갔다. 그리고 나서 돗(Dodd)은 자신의 사사로운 해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결코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실 것”(6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후천년주의 입장이다.
게다가 NEB는 슬며시 7절을 삭제시켜 버리고, “히브리어로는 이렇게 기록되었다.”라는 난외주를 달았다.
4. RSV는 NASV가 2절에서 잘못한 것처럼 큰 실수를 계속 반복한다. “음란”(whoredom)을 “매춘”(harlotry)으로 바꾸고, 히브리어 “베나이”를 “자손”(children)으로 번역하지 않고 “사람들”(people)로 오역했다. 그리고 6절과 8절에서 자손들의 이름을 삭제시켰다.
5. 끝으로 <리빙바이블>은 1절의 “주의 말씀”(the word of the Lord)과 2절의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는 구절을 본문에서 삭제시켰고, 그 다음 여덟 구절에서 약 25단어를 오역하였다.
그래도 이것은 나은 편이다. 결론적으로, <리빙바이블>은 도저히 성경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진리를 풍자한 만화”일 뿐이다. “주의 말씀”, “주의 말씀의 시작”에 관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빙바이블>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인기가 있다.
1) 이것은 로마 카톨릭 성경이다(마 16:18, 벧전 5:13).
2) 이것은 종교개혁과는 거리가 멀다(약 5:16, 눅 2:33).
3) 이것으로는 아무에게도 죄에 대한 찔림을 줄 수 없다.
4)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끊임없이 이 책을 읽어도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