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소선지서 주석 분류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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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0월호>

호세아 2:9-23



2:9-13 그러므로 내가 돌아가서 그때에 내 곡식을, 그 시기에 내 포도주를 제하여 버리고 그녀의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주었던 내 양모와 내 아마를 회수하리라. 이제 내가 그녀와 연애했던 자들 앞에서 그녀의 추잡함을 드러내리니, 아무도 그녀를 내 손에서 건져 내지 못하리라. 내가 또한 그녀의 모든 환희를 그치게 하리니, 그녀의 명절날들과 그녀의 새 달들과 그녀의 안식일들과 그녀의 모든 엄숙한 명절들이라. 내가 그녀의 포도나무와 그녀의 무화과나무들을 멸하리니, 그것들에 대해서 그녀가 말하기를 “이것들은 나와 연애했던 자들이 내게 준 보상이라.” 한 것이라. 내가 그것들로 삼림이 되게 하여 들의 짐승들로 그것들을 먹게 하리라. 그녀가 귀고리와 보석으로 단장하고 그녀가 연애했던 자들을 따라가며 나를 잊어버리고 바알들에게 분향했던 바알의 날들에 그녀를 감찰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양모와 아마는 이스라엘의 벌거벗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 민족에게 주신 일종의 가리개이다(겔16:36; 23:18). 9절의 이 예언은 지금 이스라엘 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민족에게도 성취되고 해당되는데, 누드사진이나 달력들, 매거진의 표지, 빌보드챠트, 영화광고, 반누드 패션들, 그리고 모든 방송에 이르기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주께서 변절한 민족의 종교적인 의식을 얼마나 주시하며 말씀하시는가 11절을 주의깊게 보라. 『... 그녀의 새 달들과 그녀의 안식일들과 그녀의 모든 엄숙한 명절들』 이러한 종교적인 의식이 거행되는 것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새 달들과 안식일들과 집회들을 모으는 것도 내가 견딜 수 없으며 심지어 엄숙한 모임까지도 악한 것이니라. 너희의 새 달들과 정한 명절들을 내 혼이 싫어하노라. 그것들은 내게 짐이요, 내가 지기에 피곤하노라』(사1:13,14).
이스라엘이 행하던 것처럼 집회들을 모으는 것은 이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행하는 가증함이다. 인간들은 악해질 때면 항상 종교인이 되는데(왕상21:9) 그들이 더욱 열성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인이 되면 될수록 자신들의 추잡하고 위선으로 가득찬 속사람을 드러낼 뿐이다(마23:28,29).

2장에서 13절에 들어서야 비로서 ‘주’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앞 문장에 바알의 이름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뜻은 “마스터”(master) 또는 “주”(lord)이다. 그 이름은 성경의 많은 곳에 다른 이름으로도 기록된다. 예를 들면 바알세불(왕하1:2), 바알프올(민25:3), 바알브릿(판8:33) 등이다. 바알 숭배는 성(性)을 숭배하는 종교다. 농사를 짓는데 가뭄이 가장 큰 걱정이어서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던 대상의 신이 바알이었는데, 그들에게는 바알이 내려주는 비가 결실케 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한 의식이 있던 신전의 주위에는 매음하는 창녀와 창남까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것은 사제들과 성창(聖娼)들 뿐 아니라 일반 평민들 가운데서도 흔히 행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는 현대에 이르러서 더욱 발전하여 섹스문화로 일컬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왜 그리 무자비하실 정도로 타민족들을 진멸케 하셨는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 바알 의식은 어느 유럽인이나 아시아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여기듯이 모든 이방인의 종교였던 셈이다.

2:14-23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녀를 꾀어 광야로 데려가서 그녀에게 위로하여 말하리라. 또 내가 거기에서 그녀에게 그녀의 포도원을 주고 아콜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으리니 그녀가 거기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처럼, 또한 그녀가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처럼 노래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그 날이 이르리니 너는 나를 이쉬라 부르고, 다시는 나를 바알리라 부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녀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들을 제거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들의 이름으로 기억됨이 없으리라.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의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언약을 세우며, 또 활과 칼을 꺾어 땅에서 전쟁을 없게 하고, 그들로 평안하게 눕게 하리라. 또 내가 너를 내게 영원히 정혼시키리니, 정녕, 내가 너를 의와 공의와 자애와 자비들로 내게 정혼시키리라. 내가 신실함으로 너를 내게 정혼시킬 것이니, 네가 주를 알게 되리라. 그 날에 내가 들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나는 하늘들을 들을 것이요, 그들은 땅을 들으리라. 또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들을 것이요, 그들은 이스르엘을 들으리라. 내가 땅에서 나를 위하여 그녀를 심고, 내가 자비를 얻지 못하였던 그녀를 위하여 자비를 베풀리라. 또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리라.』

이제 우리는 성경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가장 위대한 장을 여기서 만나게 된다.
1. 민수기는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방황을 여실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제 다시 그 때의 그 장소에서 방황해야 한다. 14절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보라. 이 ‘광야’란 단어는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적인 장소인 것처럼 요한 계시록 12:14의 그 광야이다. 그러나 이 문자적인 단어 ‘광야’를 무천년주의자인 캘빈, 케년, 마티, 벌코프, 제롬 등과 로마 카톨릭인 제롬, 어거스틴, 교황 바울 등은 꿈에서도 부인했던 것이다. 시편 78편은 창세기부터 여호수아까지가 그리스도의 재림임을 예시하는 것과 동시에 광야의 여정을 한 편의 시로 기록했다.
2.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15장과 민수기 23장 사이에서 겪었던 사건들을 다시 한 번 겪게 되는데, 이것이 반드시 필요함은 그들이 천년왕국이라는 그들의 고향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를 거역한 자들을 걸러내기 위해서이다(겔20:38).
3. 이 때에 이스라엘은 본문 19절의 말씀처럼 그녀의 남편인 주와 정혼하여 영원토록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암9:15). 이 약속이 이루어질 때 이 땅을 비롯한 자연은 중생할 것이며, 동물들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사11:6-9, 롬8:19-21).[“중생”이라는 단어는 첫째로 당신이 구원받는 것(딛3:5)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의 이 땅의 변화를 의미한다(민19:28)].
4. 이 때에, 그곳은 1000년 동안의 평화가 있을 것이며, 민족들이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다(사2:4).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까지 이 땅의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세상은 계시록 20:1의 때까지 피흘림의 역사가 계속되도록 운명되어져 있고 끊임없는 전쟁의 저주가 거두어지지 않은 것이다. 당신이나 당신의 종교나 그리고 당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의 정책이나 공약도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못하게 하라. 다 부질없는 노고이기 때문이다. 더 크고 더 어마어마한 전쟁을 위해서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지금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얼간이거나 신문을 전혀 읽지 않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로마서 9:25을 보라. 절대 다수의 주석가들이 본문 14-23절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이 신약교회 안에서 그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해석해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예언의 이중적 성취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호세아는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과 여호수아가 재림의 때에 그 땅에 들어갈 예수의 모형이라는 사실(행7:45)을 어째서 주석가들은 간과하는 것일까? 여호수아가 저주받은 성읍을 공격했듯이 예수님도 한 성읍을 공격할 것이고(계 17,18장), 대환란이 7년간 지속하듯이 여호수아도 그의 성읍을 일곱 번 공격했던 것이다. 여호수아 7:25,26에서는 아콜 골짜기를 왜 언급하며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본문은 아콜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일컬어진다는데 말이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 마저 분노케 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옛날의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의 저주받은 소유물을 탐하지 못하도록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교훈인 것이다.

이사야 54:5과 예레미야 3:12-14은 호세아 2:17,18의 때를 말한다. 16절의 ‘이쉬라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남편으로 호칭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나의 남자’인데 독일인들은 자기 남편을 부를 때 천년이 넘도록 그렇게 사용해 오고 있다. ‘다시는 나를 바알리라 부르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들 이스라엘이 더이상 그들의 하나님을 이방신인 바알의 이름과 그 뜻으로 부르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이미 그들의 친구(요15:15)가 되시기 때문이다. 21절의 ‘하늘들을 듣는다’는 것은 사무엘하 23:4과 요엘 2:23, 열왕기상 18:45, 그리고 시편 68:9에 성취되는 약속처럼 ‘비’를 지칭한다. 이 비는 장막절 바로 전에 내릴 것이며, 곧 주의 재림으로 이어짐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