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태복음 주석 분류

하늘로부터 온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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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7월호>

이제부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사역을 하신다. 왕국의 거부와 자신의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들에게 하나씩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1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죽으셔야 될 것을 가르쳐 주시는 장이다.

요나의 표적

16:1-4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께 와서 주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더라.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녁이 되어 하늘이 붉으면 ‘날씨가 좋겠구나.’라고 말하고 또 아침에 하늘이 붉고 찌푸리면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하나니, 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하늘의 현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줄 표적이 없구나.”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마태복음 12:38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와 똑같은 요구를 한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하는데, 이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특별히 하늘의 기상과 관련되어 설명된다. “표적”이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냈을 때 이후로(출 4-12장) 이스라엘이 구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2에서 정당화된다. 특별히 “하늘로부터” 온 표적은 엘리야가 칼멜산에서 불을 “하늘로부터” 내렸다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표적과 기적은 모방이 가능한데, 계시록 13:13에서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드러내기 위해 “불을 하늘에서 땅 위로 내려오게” 한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꾸짖으신 것은 오늘날 시대의 징조를 알지 못하는 무천년주의자들에게 하시는 것과 같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데살로니가전서 5:1-6에 따라서 시대의 징조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주의 날이 가까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그 징조를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날씨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씨가 좋고, 아침에 하늘이 붉으면 날씨가 궂다. 이들은 이러한 하늘의 현상들을 분별할 줄 알지만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할 줄 몰랐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의 날이 임하는 징조를 안다. 요엘서 2장에 따라서 그 날에는 하늘의 현상들이 변할 것이다. 『흑암과 암영의 날, 구름과 짙은 어두움의 날이 마치 아침이 산들 위에 펼쳐진 것 같으니, 많고 강한 사람들이라. 이 같은 일은 전에도 없었고 또 이후, 곧 많은 세대들의 연수에까지도 다시 없으리라. 불이 그들 앞에서 삼키며, 그들 뒤에서는 화염이 불타는도다. 그 땅은 그들 앞에서는 에덴의 동산 같으나 그들 뒤에는 황량한 광야 같으니, 정녕, 어떤 것도 그것들을 피하지 못하리라』(욜2:2-3). 이 때 “하늘로부터” 위대한 한 표적이 나타나니, 곧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이다(마24:30).

『오 너희 위선자들아』(3절)

“위선자”는 “극단적인 비평가”들이다(마태복음 6장 참조). 그들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고, 4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서도 주님을 시험했다(16:1). 이들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이 표적을 요구하는 것처럼 정당화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표적을 행하시더라도 거부할 마음의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39에서와 마찬가지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꾸짖으신다. 그들은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고,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의 심판은 12:40-42에서 니느웨 사람보다 남방의 여왕보다 더 심하게 주어질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제시하신다. 이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알려주는 표적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 표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표적과 기적들은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더러(요4:48), 종교지도자들은 이 일들을 보고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이때 요나의 표적이 제시되는데, 이 표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서 죄 없으신 분의 육체적 부활과 다시 죽지 않음을 지적한다(롬6:9). 로마서 6: 3-12의 침례의 모형에 따라서 이 표적은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표적으로 제시된다. 그는 이 모형에 따라서 죄가 되시어(고후5:21) “비방받는 표적”을 위해 세워지셨다(눅2:34). 그 분은 “비방받는” 요나의 표적을 제시하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야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표적을 제시하시면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나의 표적은 신약교리를 시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표적은 죄문제를 지적하는 유일한 표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관계가 있으며, 이 표적 외에는 “줄 표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신약교리에는 표적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무리들이 진정한 표적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비록 모세와 아론의 표적들과 함께 시작된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표적을 주셔야함에도 불구하고 “표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예언들을 파기시키지 않고 성경을 이루시면서 신약의 구원계획을 시사하신다.


1세기 에큐메니칼 연합

16:5-6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 빵을 가져가는 것을 잊었더라.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삼가고 조심하라.”고 하시니』

“누룩”에 대해서는 13:33에 관한 설명을 참조하라. 누룩은 기독교계에 퍼진, 또는 교회 안에 퍼진 거짓 교리이다. 특별히 마지막 때인 라오디케아 교회시대에는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들도 이 누룩으로 잔뜩 부풀어 있음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거짓 교리에 대해서 경고하시고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① 바리새인들은 자선을 행하며, 십일조도 하고, 의롭고, 금식도 하며, 기도도 하고 영과 천사와 부활을 모두 믿는 정통주의자에다가 긴 옷을 입은 “아버지”들이다(마 23장, 눅 18장, 행 23장). 이들은 보수주의자들과도 같고 로마 카톨릭과도 같으며,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자기들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자들이다(마23:15).
② 사두개인들도 자선을 행하며, 십일조도 하고, 의롭고, 금식도 하며, 기도도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영적 존재나 육체적 부활도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이며, 긴 옷을 입은 “회의론자”들이다(마 23장, 행 23장, 마 22장).
그들은 이러한 교리적인 차이 때문에 사도행전 23장에서 바울 앞에서 서로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이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갈리지만 한가지 목표,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다는 목표 아래서는 서로 합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에큐메니칼 연합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믿음의 “근본사항”들을 믿는 로마 카톨릭이나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연합을 하는 일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요즘은 복음주의자들과 카톨릭이 연합하는 것이 대 유행이다(Evangelical Catholic Together). 그들은 때때로 교리가 비슷한 보수주의자들끼리 연합한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커다란 목표”, 이를테면 한국 교회가 하나가 되어 추진해야할 문제, 세계 교회들이 연합하여 이루어야 할 주님의 “명령”(지상명령 뿐만 아니라 창세기 1:28을 왜곡한 문화명령 등)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연합”을 한다. 물론 그들은 아무런 공통점도 없이 서로 다른 교회들을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아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도 가릴 것 없이, 은사주의도 관계없이, 사회개혁을 외치든지 민중신학을 외치든지 아무런 관계없이 단 하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는 “근본적인 정통사항”으로 인해 서로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해아래 새 것은 없다(전1:9). 지금 행해지고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미 이천년 전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연합한 것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이천년 교회사를 통해 보더라도 연합하고, “공회”를 소집하는 일들은 성경대로 믿지 않는 교회들이 좋아했던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합은 더 나아가서 타종교와도 함께 모이고, 여타의 사회단체와도 함께 모여,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실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하는 후천년주의, 무천년주의 운동으로 나아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평화를 목표로 하는 뉴에이지 운동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운동의 결말은 “단으로 묶어 불사르는” 것이다(마13:30). 만약 이러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의 일한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불타버릴” 것이다(고전3:15).


거짓 교리에 대한 주의

16:7-12 『그들이 서로 의논하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예수께서 이를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너희가 서로 의논하느냐? 빵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냐? 너희는 아직도 빵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몇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또 빵 일곱 덩어리로 사천 명을 먹이고 몇 광주리를 거두었는지 깨닫지도 못하며 기억하지도 못하느냐? 너희는 내가 너희들에게 빵에 관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임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니 그때서야 그들은 주께서 빵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조심하라 하신 것임을 깨닫더라.』

여기서 제자들의 문제는 먹는 문제로 귀착이 되었다. “먹는 문제”는 창세기 3장에서 인류가 최초로 직면한 문제였고(창세기 3장 주석 참조) 인류가 지속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로, 요한일서 2장에서도 “육신의 정욕”이 제일 먼저 대두된다(요일2:16).
그러나 제자들이 갖고 있던 문제는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의 문제는 로마 카톨릭이 성만찬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이었는데, 성만찬이 다루어지는 마태복음 26:26은 요한복음 6:50,55와 더불어 카톨릭 교회가 유일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구절이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곳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곳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을 때 문자적인 빵으로 받아들였고, 15: 15에서는 문자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비유적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63에서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실제적으로 받아들이듯이, 제자들은 영적인 해석과 문자적인 해석을 혼동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배워야 하는데, 그것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일차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을 때에는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이러한 비유적 해석 마저도 문자적인 해석방법이 뒷받혀 줄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말해서 그 비유를 성경이 직접 “문자적으로” 해석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13:33에서 “누룩”의 비유를 배웠다. 이 누룩은 실제적인 누룩이 아니라 비유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누룩이 무엇인지 “문자적으로” 해석해 준다. 마태복음 16:6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삼가고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는데, 12절에서는 『그때서야 그들은 주께서 빵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조심하라 하신 것임을 깨닫더라』고 기록된다. 다시말해서 “누룩”이라는 비유는 “거짓 교리”라는 문자적인 해석으로 증명되었다. 13:32에서 “공중의 새”들도 4절과 19절에서 “마귀의 세력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살며 나도 그 사람 안에 사느니라』(요 6:56)는 말씀이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는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라는 이 말씀은 영적인 진리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다.

누룩은 거짓 교리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의 누룩도 거짓 교리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먹는 문제보다 교리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거짓 교리에 빠지는 것은 먹는 것이 갖고 있는 문제보다 더 위험하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 디모데전서 4:15,16과 에베소서 4:14, 로마서 16: 17,18에서도 거짓 교리를 주의하며 건전한 교리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더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니 사람들의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그들이 속이려고 기다리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지 아니하고』(엡4:14),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딤전 4:16). 그래서 디모데후서 2:15에서는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마지막 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함부로 영적으로 해석해버리는 설교자나 교사들을 주의해야 하며, 자기들의 교리에 맞추기 위해서 말씀에 첨가시키거나 말씀을 대체해버리거나 문맥에서 한 구절을 빼버리는 해석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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