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태복음 주석 분류

“이스라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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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6월호>

15:1-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나이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하니』

이들은 성령의 사역이 있고 난 후에 예수님을 비방한다. 이러한 일들은 9:3,34과 12:14,24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NCCC는 치유의 기적이나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의 교리와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데,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이브에게 “의문”으로 유혹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보아도 그들의 마귀적인 특성은 드러난다(마4:3,6).

“장로들의 전통”은 마가복음 7장에서 자세히 제시된다. 『또 시장에서 돌아온 후 씻지 않고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 여러 가지 것도 받아서 지켜온 것이 있었으니, 잔과 단지와 놋기명을 씻고 식탁을 닦는 것이라』(막7:4). 탈무드의 전통을 포함하여 “장로들의 전통”은 이러한 하찮은 것들을 세세하게 목록을 만들어 지키게 하였다.
바울도 이에 대해 골로새서 2:8에서 경고하고 있다.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 지금도 성경보다는 플라톤, 요세푸스, 오리겐, 유세비우스, 제롬, 클레멘트, 이레네우스, 웨스트코트, 홀트, 티셴돌프, 아인쉬타인, 홉스... 등의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는 이러한 전통들이 구원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이어받은 너희의 허망한 행실에서 은이나 금처럼 썩어질 것들로 구속받은 것이 아니라』(벧전 1:18). 그 외에도 부활절 달걀, 크리스마스 트리, 촛불 예배, 기도문들, 성인들의 머리에 있는 후광, 유아세례, 십자가 숭배 등의 쓰레기들이 “사람의 전통”이 되어 교계를 더럽히고 있다.
그러나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위생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모세의 율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전통이다. 율법에서 “씻는 것”은 시체를 만진다는가 하는 특별한 때, 특별한 사건에만 주어진 명령이다.

15:3-6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또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말하기를 ‘나로 인하여 유익을 받게 될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라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하니, 그렇게 해서 너희는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기시키고 있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질문을 무시하신다(마21:23,24).
3절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단지 규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포함하는 말이다(막7:13,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전통을 말씀 위에 두는 행위는 공산주의자들이나 무신론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일들은 경건한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행해지는데, 이들은 “건전한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의 말씀의 많은 부분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영감이나 보존, 그리고 성경의 교리 등은 뒷전에 놓고 성경에서 제시하는 것들의 일부, 즉 산상설교의 가르침 등 의로운 행실이나 주기도문, 사도신경, 교단 교리 등에만 머물러 있다.
전통을 성경과 동일하게 여기려는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는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나 너희가 배운 바 전통들을 지키라』(살후2:15). 이들은 이 구절을 들어 이레네우스나 키프리안, 파피아스, 어거스틴, 칼빈 등의 가르침에다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권위로 올려놓는데, 성경에서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전통들을 항상 말씀 “위에” 올려놓는다. 이것은 또한 웨스트코트와 홀트가 RSV와 ASV의 본문을 위한 헬라어 원문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나로 인하여 유익을 받게 될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라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5절). 이 말은 마가복음 7:11에는 “코르반”이라고 제시된다. 이 구절에 대해서 정확하게 해석해 주는 성경구절은 잠언 28:24이다.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의 것을 훔치고 말하기를 “이것은 죄과가 아니라.” 하는 자는 파괴자와 한 패니라.』 또한 신명기 14:22-26에는 십일조와 첫 희생들을 드리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네 가족과 더불어 즐거워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코르반”이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파괴자”의 행위이다.

15:7-9 『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말하기를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또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였느니라.”고 하시더라.』

이사야 19:13에 대한 인용이다. 이들 위선자들은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자신들을 향해 있다. “마음의 문제”에 관해서는 잠언 23:7; 4:23, 로마서 10:9,10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데, 특히 로마서 10장에서는 입으로 고백하기 이전에 마음으로 믿는 문제가 중요함을 설명해 준다.

“위선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6장의 설명을 참조하라. “위선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자주 사용하시던 비난인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되심의 표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는 “악한 세대”(마12: 45)이며 “독사들의 세대”(마12:34)이다(마23:13,14; 6:2,5,16; 눅6:42; 11:14, 막7:6, 마7:5; 15:7; 16:3; 22:18).

15:12-14 『그때에 제자들이 와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감정이 상한 것을 아시나이까?”라고 하니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모든 초목은 뽑힐 것이라. 그대로 두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여러 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들은 항상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위선자”로(2,5,16절), 7장에서는 개(6절)와 거짓 선지자(15절)와 약탈하는 이리(15절)와 가시나무와 엉겅퀴(16절)와 찍혀서 불에 던져지는 나쁜 나무(19절)로, 12장에서는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독사들의 세대”(34절)와 믿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서도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39절)로, 23장에서는 다시 위선자(13,14,15,23절)로 나타난다. 특히 이들은 임하는 왕국을 앞장서서 막았던 사람들이며 자기들뿐 아니라 백성들도 왕을 거부하도록 악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다(마15:14, 막15:11). 이들은 결코 회개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지상사역 동안에도,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물론 니코데모 같은 “개인적인” 예외는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언급하면서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하셨다. 이들이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분명해진다. 『눈 먼 안내자들아』(16절), 『너희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17,19절). 개심하지도 않고(요12:40), 지옥에 묶여있으며(마23:15), 회칠한 무덤이고(마23:27), 자기 의를 드러내며(눅18:11), 겉은 깨끗하게 하려고 하나 속은 더럽고(마23:26) 뱀(마23:33)인 이들은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이기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는(마12:20) 약속을 받지 못하고 결국 뽑혀질 것이며, 성령을 모독한 죄를 지었으므로 회개할 기회도 없이 그들의 아비인 마귀(요8:44)를 따라서 불 가운데로 들어갈 것이다. 이들은 마지막 날들에 다시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들의 모형으로 등장한다(벧후 2장).
“심는다”는 것은 예레미야 32:41과 사무엘하 7:10에 나타난 것과 같은데, 출애굽 때의 언약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땅에다 확고하게 “심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멀리 흩어졌었다. 그들은 앗시리아로, 바빌론으로 흩어졌었고(신29:28), 그들의 왕을 거부함으로 인해 다시 2,000년 동안 흩어졌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와서 심겨질 것이다. 단지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들은 잠언 2:22과 같이 뽑혀질 것이다.

15:15-16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이 비유를 설명하여 주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베드로는 실수했다. 예수님께서 13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염두에 두었던지 그는 “이 비유를 설명하여 주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유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베드로가 여기서 염두에 둔 것은 11절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느니라』는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은 전혀 비유가 아니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아마도 주님은 여기서 그들의 답답함에 큰 소리로 책망하셨을 것이다. 17-20절의 설명은 해석이 필요없이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부분이다.

15:21-24 『그때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투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니라. 그런데, 보라, 한 카나안 여인이 그 지경에서 나오며 그에게 소리질러 말하기를 “오 다윗의 아들이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심히 고통받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주께서는 그녀에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주께 간청하기를 “여인이 우리 뒤에서 소리지르니 보내소서.”라고 하더라.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시니』

『한 카나안 여인』(22절)은 마가복음 7:26에 따르면 헬라인이고, 또 수로페니키아 종족이다. 그녀는 시리아계 함족이었는데(창세기 10장 참조), 이 여인은 이방의 죄인(갈2:15)일 뿐만 아니라 창세기 9:25에 따라서 “종들의 종”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종된 위치 답게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으며, 바리새인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었던지 예수님을 메시야의 호칭, 즉 “다윗의 아들”로 불렀다.
그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누가복음 18장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과 같았다. 『“...이 과부가 나를 귀찮게 하므로 내가 그녀의 원한을 갚아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여인이 계속 와서 나를 귀찮게 하리라”』(눅18:5). 제자들은 그녀가 소리지르는 것을 보고 그녀를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그녀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아주 단호히 말씀하신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예수님은 10:5에서도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즉 유대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다(마1:21).

15:25-28 『그 여인이 와서 주께 경배하며 말씀드리기를 “주여, 나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더라.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도다.”라고 하시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하옵니다, 주여, 그러나 개들도 그들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자 그 여인의 딸이 그 시각으로 나으니라.』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왕께 “경배”했다. 그리고 “주여, 나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구했다. 그녀의 기도는 14장에서 물에 빠질 때의 베드로의 기도와 똑같았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신 반면, 이 여인에게는 바로 응답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거절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도다』(26절).
여기서 “개”는 이방인을 말하며(시22:16),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이 여인에게 사용하셨다. “개”를 뜻하는 헬라어가 남성명사라고 해서 이 “개”를 이 여인에게 적용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개”는 “검둥이”라고 하는 말처럼 심한 욕이다. 예수님은 이 흑인 여자에게 “인종차별”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여인의 믿음을 본다. 그녀는 자기를 개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솔로몬의 지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가 저주를 받았다면 저주받은 대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이 나를 개로 취급하신다면, 의로운 사람은 자기 짐승의 생명을 돌보지 않습니까?” 『의로운 사람은 자기 짐승의 생명을 돌보아 주나, 악인의 온유한 자비들은 잔인하니라』(잠12:10). 이 여인은 자신이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주여, 그러나 개들도 그들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이 믿음의 간구는 바로 그 시간에 딸에게서 마귀를 떠나가게 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기도에 관한 영적인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의 위치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2. 우리의 기도에서 이기적인 요소들을 버려야 한다.
3.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4. 끊임없는 간구는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

15:29-31 『그 후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갈릴리 바다 가까이 오셨다가 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름발이와 소경과 벙어리와 불구자들과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니 주께서 그들을 고쳐 주시더라.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온전해지며,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무리가 놀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이 부분을 8:16과 11:5과 비교하라.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왕국의 표적을 행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치유의 하나님이시다(출15:26). 그 분은 이스라엘을 다루실 때 표적으로 다루셨다. 그 표적은 출애굽기에서 시작하는데, 주로 치유의 표적이며,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속과 관계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왕국으로 들어갈 때 이 표적은 메시야에 의해 다시 행해지게 된다(겔34:16, 사33:24; 35: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이방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련이 있다면 왕국 기간 중에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비추시는 메시야 왕의 빛 아래에서 그 분께 경배하는 일이다. 그 외에 이방인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시2:1-2) 이방인의 결말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양”에 속한 민족을 제외하고는, 시편 2:9과 같이 철장으로 깨뜨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마태복음 15장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종교지도자들에게 거부를 당하셨지만 아직 완전히 거부당해 십자가에 처형되시기까지는 표적과 더불어 계속 왕국복음을 전파하신다. 아직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수님은 아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과만 관계하시고, 이방인에게는 “개”에게 부스러기를 주시듯이 은혜를 베풀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국의 연기를 이미 알려주신 바 있다(마 13장). 침례인 요한이 목베임 당해 죽으면서 “대환란”은 경고되었고, 목자 없는 양같은 백성들에게 연민을 느끼시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그것은 대환란 중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부양받는 모습의 예표가 되었다.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표적을 행하시면서 백성들을 돌보신다.

(시내사본에는 31절에서 『불구자가 온전해지며』라는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아마도 시내사본의 필사자는 불구자를 온전케 하셨다는 영광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돌려지기에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15:32-34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무리를 가엾게 여기노니 그들이 나와 함께 이미 사흘을 머물렀으나 먹을 것이 없고, 혹 그들이 도중에 기진할까 하여 굶겨서 보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시니라. 제자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이 광야 어디에서 우리가 이처럼 큰 무리를 배부르게 할 만한 충분한 빵을 구할 수 있겠나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빵이 몇 덩어리나 있느냐?”고 하시니,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일곱 덩어리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하더라.』

예수님은 여기서도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예수님의 연민과 무리에게 빵을 먹이시는 일에 대해서는 14장의 ‘오병이어의 이적’을 참조하라. 이 연민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관계되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원들, 그 밖에 어누 누구에게도 사용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으셨고, 이들도 참 목자가 아니기에 백성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백성에게 연민을 느끼신다(막1:41; 5:19, 눅7:13, 사49:15, 미7:19). 『여인이 자기의 젖먹는 아이를 잊을 수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에게 연민을 갖지 않겠느냐? 정녕,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그리고 이 연민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관심이시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했을지라도 그 분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는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이적에서처럼 “그러나 이것들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요6:9)라고 다시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들은 적어도 주님께는 이 일을 행하실 만한 능력이 있다는 한 가지는 배웠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이었고, 16장에서 그들은 빵이 없음을 다시 의논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1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무리를 먹이셨다. 그리고 막달라 지방으로 가셨다. 막달라는 갈릴리 서쪽 해안에 위치한 마을로서, 카퍼나움보다 10마일 남쪽에 위치하고, 티베랴보다는 5마일 북쪽에 위치하는 곳인데, 본래 스불룬 지파가 받은 유업의 일부였다. BB

마태복음 주석 20 /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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