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태복음 주석 분류

왕의 표적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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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11월호>

“표적”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적”과는 다르다. 그것은 표적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러한 표적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증거하시고자 하는 것, 즉 백성들이 기다리는 왕국의 왕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청중들에게 입증하시는 데에 의의가 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고전1:22) 예수님께선 이들에게 이적, 특히 “치유”의 이적(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이끌어 낸 구원자 모세와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으로 자신을 증거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복음을 듣고 그 분이 행하신 이적들을 표적으로 알고 예수님을 따랐다(마4:24,25). 예수님께서는 모인 무리들에게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행하신 이후에 8장과 9장에서 계속하여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이 왕이라는 산상설교의 주장을 증명하셨다.


9:1-2 『그리고 주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 자기 고장에 도착하시니라. 그런데, 보라,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주께 데려오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기운을 내라.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하시더라.』

“자기 고장”은 마가복음 2:1- 12을 근거해서 볼 때 카퍼나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이 부분에서도 마가는 마태보다 더 자세한 사건의 묘사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를 지붕을 뜯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놓는다(막2:4).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병을 치유하신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려할 때 그 환자가 병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곤 한다. 그리고 치유가 되지 않으면 그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이다. 이 환자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현대의 흉내내는 은사주의자들과는 다르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시기도 하시지만 그가 믿음이 없더라도 고치실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엘리사에게서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믿기는 커녕 분노에 차서 돌아갔다(왕하5:11, 12). 그러나 그의 종들이 간청하므로 요단 강물에 몸을 담그니 치유가 되었다(왕하5:13,14).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치유는 결코 병자의 믿음에 제한받지 않는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기에 앞서 먼저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와 영적인 문제가 함께 요구될 때는 영적인 문제가 선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다음에 실제적인 요구를 채워주셨다(마4:23; 9:35). 이것은 “천국”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라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마6:33).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에서 좀 더 중요하게 관찰할 것은 주님께서 “인자가 땅 위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것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곧바로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심으로 죄와 육체의 질병을 하나로 취급하셨다는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당시의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문둥병이나 중풍병같은 질병들을 표적으로서 치유하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일이었다. 마가는 이 병자가 치유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즉시 일어나 자기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 앞을 지나가니 모두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우리가 이같은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노라.”고 하니라』(막2:12). 물론 죄를 용서하시는 일 또한 하나님께 속한 일이었다(막2:7). 서기관들은 하나님만이 홀로 이러한 일을 행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 자신은 그 사람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사람을 치유할수도, 그를 용서할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가지 일을 다 하셨는데,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서의 병고침의 사역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만이 이 두가지 일을 다 하신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이 일이 그들의 면전에서 증명되었을 때, 그들의 반응은 “그는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가 아니라 “자, 그를 죽이자”였다(막3:6). 이 문제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는 게으르거나 악한 사람을 납득(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지 “머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9:9 『그 후 예수께서 그 곳을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한 남자가 세무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주를 따라가더라.』

여기의 마태가 이 마태복음의 기자이다. 마가복음 2:14과 누가복음 5:29에서 이 사람은 “레위”라고 불려지는데, 이 사람은 당시에 죄인으로서 경멸받는 세리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셨다는 사실로 볼 때, 마태의 부르심은 은혜에 의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또한 감추어진 신약교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부르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모두가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여, 나로 먼저 가서...』(마8:21)라고 한다. 그러나 마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즉각적으로 “일어나서 주를 따라갔다”(마9:9). 주님께서 당신을 구원으로 부르시거나 또는 사역으로 부르실 때, 당신의 반응은 어떠한가?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드실 때, 보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그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앉았더라.』

“세리들과 죄인들”은 당시 사회의 가장 낮은 위치의 사람들이었다. 누가복음 7:39에서는 죄인인 한 여인이 등장하고, 또 요한복음 9:31-34에서는 소경이 죄인으로 취급당한다. 당시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런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한 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창녀들, 술취한 사람들, 은행강도, 살인자, 아동학대자 등을 죄인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적 의미의 “죄인”은 게으른 자, 탐식하는 자, 자기 의를 자랑하는 자, 교만한 사람, 진리를 알기를 거부하는 자 등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죄인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가 죄인이 아닌가?(롬3:10, 시14:3)

9:13 『“너희는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배우라. 나는 의인
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에프라임과 유다의 죄들을 꾸짖고 계시는 부분인 호세아 6:6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이 인용은 마태복음 12:7에서도 반복되는데, 예수님께선 구약의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 하는 헛된 노력을 꾸짖고 계신다.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특히 로마 카톨릭은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속죄보다 행위로 인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의 의미를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한데(딤후3:16),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고 공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지도 않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지도 못한다(딤후3:17). 그래서
디모데후서 2:15에서는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느니라.”의 참된 의미는 로마서 11:32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자기의 종교적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자비로 베풀어주신다. 로마서 11:32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사람들을 죄에 가두어 두신다고 하셨다.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필요한 의가 있는데, 이 의는 하나님의 의이고, 율법이 “제사”로써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자비”로써 이루시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이 제단에 바치는 동물들의 제사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예수님은 제사와 율법의 행위를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드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며, 그들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과 모두 자비와 용서(단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의)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믿는 죄인들과 함께 이 음식을 드신 것이다.

9:18 『주께서 이러한 것들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보라, 어떤 관원이 그에게 와서 경배하며 말하기를 “제 딸이 방금 죽었나이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안수하여 주소서. 그러면 그 아이가 살아나겠나이다.”라고 하더라.』

마태복음 2장에서 현자들의 방문 이후로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모습이 처음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경배를 거절치 않으셨다.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경배를 항상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당한 일로서 받으셨다(마14:33, 요9:38; 20:28).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하는 이 관원은 치유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최고의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마태복음 8:4,13,16,32에서 치유받은 사람들에 의해 널리 퍼져있던 증거들을 가졌을 것이다. 23절에서 이어지는 이 관원의 딸의 치유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시는 메시야 왕의 강력한 표적이 된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소녀를 살리실 때 “탈리다쿠미”(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라.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7:14에서 나인 성읍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때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말씀”으로 소녀를 살리셨다. 예수께선 친히 생명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요1:1).

9:20 『보라, 십이 년 동안 유출병을 앓던 한 여인이 주의 뒤로 와서 겉옷 단을 만지니라.』

여러 의사에게서 많은 고통을 받은 12년된 유출병 환자의 치유는, 그녀의 병의 기간이 12년이라는 사실로 중요하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숫자인데, 죽었다가 살아난 관원의 딸도 12살이었다(막5:42). 그러므로 이 사건들의 예언적 적용은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부활과 회복(치유)에 적용된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휴거 이후에 “야곱의 고난”인 대환란을 겪은 이후, 주님이 오실 때 강력한 한 민족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이 사건을 에스겔 37장에서는 한 민족의 부활로, 로마서 11:25,26에서는 하나의 “신비”로 묘사하고 있다.

9:27 『그 후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더라.』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사무엘하 7:12-16에서 예언된 영원한 다윗의 보좌를 계승할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름으로, 예언된 메시야의 공식적인 칭호이다. 두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그들이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를 알았다기 보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된 메시야”로 자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복음과 그 분이 행하시는 왕의 표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그들 민족의 구원자로 알았다. 물론 예수님이 “다윗의 아들”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16:16에서 베드로가 고백할 때까지는 완전히 계시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만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속박 아래 있던 히브리 민족이 모세에 의해 구출될 때 그들은 모세가 행하는 많은 이적들을 보고 따랐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박 아래 있었고, 그들 민족의 구원자는 모세와 같이 이적을 행하면서 그들을 구해야 하며(신18:15, 행7:37), 그 이적이란 특별히 “치유”로서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천년왕국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서 증거한 바이며(겔 34:16, 사33:24; 35:6), 그때에 그는 다윗의 보좌에 대한 정통성을 가진 그들의 왕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다윗의 보좌를 차지하는 다윗의 아들에 대한 강력한 표적이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믿음, 즉 예수님이 그들 민족의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치유받았다(마9:29).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은 32,33절에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벙어리를 치유하신 것을 본 무리의 반응으로도 알 수 있다. 『... 무리가 놀라며 말하기를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도다.”라고 하더라.』(33절) 그러나 유독 바리새인들만은 “위선자”답게 이러한 표적들에 대해서 비평을 가한다. “그 사람은 마귀들의 왕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34절). 이러한 말은 마태복음 7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하신 예수님의 설교를 기억나게 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마7:15)

9:35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성읍과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왕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또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허약함을 고쳐 주시더라.』

마태복음 4:23과 같은 말씀이 여기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왕국복음을 전파하신 후 표적을 행하신다[마태복음 연구 6, 성경대로믿는사람들, 제 27호(94.6) 참조]. 그리고 4장에서의 이러한 사역 이후에는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설교를 전파하시고, 9장에서의 이러한 사역 이후에는 10장에서 제자들에게 왕국복음을 위임하신다. 산상설교나 10장의 왕국복음의 위임은 둘 다 왕국복음의 핵심을 담고있는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괄적으로 묘사한 후에 왕국 복음의 핵심 내용이 제시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단지 4:23에서의 사역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직접” 왕국의 법령을 선포하시지만, 여기 9:35에서의 사역 이후에는 그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신다. 이제부터 왕국복음이 위임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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