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 핵심 구절 연구 분류

인격체로 등장한 “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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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9월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말할 때(히 4:12) 그것은 단지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활력 있게 역사한다는 말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 말씀 자체가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역사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제시되는 구절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마음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로 일언반구의 말도 할 수 없게 할 것이다.

사무엘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주를 섬기더라. 당시에는 주의 말씀이 귀하여,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더라.』
사무엘상 3:7 『사무엘이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고, 주의 말씀이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도 아니하였더라.』
사무엘상 3:21 『주께서 실로에 다시 나타나셨으니, 이는 주께서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음이더라.』

이와 같은 세 구절들에서 성경은 누군가에게 “나타나시며”,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상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spoken) 말씀들(words)은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현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들 가운데서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사무엘이 성장하니 주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분의 말씀들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더라』(삼상 3:19).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연결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의 말씀(삼상 15:23)은 주의 계명(삼상 15:24)과 동일하며, 사무엘은 이것을 “주의 말씀의 음성”이라고 말한다(삼상 15:1)는 것이다.
히브리서 4:12-13의 말씀은 주의 말씀에 대해서 좀더 특별하고 정확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오직 만물이 우리가 회계해야 하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게 되느니라』(히 4:12-13).
여기서 “그분”이 가리키는 대상은 12절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체로 등장하였다. 바로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자신”과 “기록된 말씀들”의 비교는 현대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학자들을 침묵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님께서 선포하신 세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말씀들이 귀하게 된 땅에는 기근이 있게 된다. 이는 그 말씀들이 활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 『주 하나님이 말하노니, 보라, 그 날들이 오리라.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의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라,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니라』(암 8:11).
2.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3.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분의 말씀(word)으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교제는 말씀들로 구성된다(삼상 3:19). 그러므로 누구든지 결국 주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 그는 주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삼상 3:7).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분의 말씀, 말씀들과 분리할 수 없이 묶여 있다(롬 10:17, 요 8:47).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체로 등장한 예를 성경에서 좀더 찾아보자.
갈라디아서 3:8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보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
로마서 9:17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구절들은 신약의 구절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의 몸인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진 사도인 바울이 기록했다. 특히 이 두 구절은 신약의 구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사항들,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의 보장을 받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두 권의 책(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은 살아 있는 인격으로 제시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성경”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에 들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경숭배”(Bibliolatry) 내지는 성경에 대한 광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것인가?
필사본 증거의 역사나 원문비평, 고등비평, 또는 성경신학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창세기 12장에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모세는 아브라함이 죽은 지 200년이 훨씬 지난 뒤까지 창세기 12장을 기록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어떤 것을 전파한 “성경 구절”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갈라디아서 3:8에서 그렇게 “성경숭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가? “미리 보고”(foreseeing)라는 말은 분명히 살아 있는 인격체의 행동이다. 단지 잉크로 기록된 종이조각은 어떤 것을 미리 알 수 없다. “미리 본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속성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전파하기 위해 잉크로 기록된 어떤 종이조각, 즉 파피루스나 양피지나 나무, 또는 점토판 등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에 아브라함에게 어떤 것인가를 전파하고 있는 성경 구절 하나를 제시했다. 왜 바울은 창세기 12장, 14장, 24장, 그리고 모든 다른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전파한 것이 어떤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전파했다고 기록하는 것인가?
만일 바울이 오늘날의 근본주의자들처럼 입술로만 성경의 권위를 믿거나, 최초의 원본만을 권위 있다고 믿었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겠지만, 바울은 결코 그들과 같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를 “기록된 성경”에 속하는 것으로 기록했으며, 그리고 나서 “성경”이라는 용어를 실제적인 전파자인 “하나님”(창 12:1-4)과 대체해서 사용했다. 과연 바울이 입술로만 고백했던 위선자였던가? 바울이 성경숭배를 조장한 이단인가? 아니다. 그는 로마서 9:17에서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롬 9:17). 물론 “성경”이 파라오에게 어떤 것을 말했다는 근거가 되는 구약의 성경 구절은 없다. 바울이 인용한 말씀들은 직접적으로 파라오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인용한 말씀들은 전혀 “성경”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구두로 전하라고 모세에게(파라오에게가 아니다) 말씀하신 것이었다(로마서 9:17에서 기록하고 있는 구약의 인용은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하는 출애굽기 9:13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신약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에 “성경”을 집어넣었다. 이것은 성경에게 대단한 위치, 즉 하나님의 위치를 부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분의 모든 이름 위에 “말씀”을 크게 하심으로써(시 138:2) 이 사실을 인정하셨다. 만약 바울이 “성경숭배자”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주신 권위 아래서 숭배한 것이다. 만일 이런 것을 “성경숭배”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모두 성경숭배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말씀을 크게 하셨고, 바울이 그 말씀에 인격성과 신성을 부여한 것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