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창세기 주석 분류

“네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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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2월호>

3:9,10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하니

이 구절은 피조물을 찾으시는 창조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롬3:11)라고 말씀하신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신학교재들에 보면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역사”기록이라고 성경을 정의내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빗나간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개인적 취향과 본질에 잘 들어맞는 종교만을 찾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을 찾아나서지 않으시면 인간은 계속 타락해 갈 뿐이다(겔34:11,16).

누가복음 15: 4-6에 나오는 선한 목자는 양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목자가 집에 돌아와보니 양우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주장하는 양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수년동안 목자를 찾으려고 기도하면서 애를 썼는데 이제 드디어 목자를 찾게 되었다. 나는 그 때부터 선한 생활을 하며 끝까지 그 분에게 붙어있음으로써 ...을 할 수 있었다.” 이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의 간증에서 “나”가 자주나오는 것은 아담의 타락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일전에 한 흑인 목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 중에는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은 당신들이 있어서는 안되는 곳이다. 계속 그곳에 머물면 당신들이 있기 원치 않는 그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있게 될 줄 알라.” 그렇다. 문제는 “하나님의 눈에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의 친척, 가족, 회사동료, 사제, 혹은 당신의 거울 말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모른다면 로마서 1, 2, 3장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처한 곳을 잘 알려 주실 것이다.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적어도 아담의 고백 중 이 부분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 뒤에 따르는 12절은 그렇게 정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앞부분의 고백은 “올바른” 고백같다.

다윈, 프로이트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할 만큼 정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조상 아담이 하는 말을 듣기로 하겠다. 대학교수란 대개는 젊었을때 성경구절이나 “지옥불과 저주에 관한 설교”로 인해 심히 당황해 하던 자들로 매우 자부심이 강한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나머지 인생 전부를 젊었을때 지니게 된 진리에 대한 확신을 없애주는 책들을 읽고 연구하는 데 바쳐버리는 것이다. 소위 대학교수들이 말하는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 같은 것을 극복하는 단계라고들 말하지만 이때 두려움은 십중 팔구가 심판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아담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두려워...숨었나이다.” 창세기 3장을 잘 읽어보면 19, 20세기의 성경비평가들의 사고과정을 꿰뚫어볼 수 있으며 이 사실이 이들 비평가들을 몹시도 괴롭히는 것이다. 이들 교수님들은 그들의 강의실에서 “양심을(그들이 지니고 있는 동물적 본성의 잔유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구실하에(유19, 벧후2:14-21) 이렇게 주장한다. “성경적 기독교란 교수들이 수행하는 수준 높은 학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약한 사람들을 도와 그들이 “무지” 가운데서도 견고히 설 수 있도록 해주는 “유용한” 종교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실상은 현대 심리학이래야 나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화인으로 마비시킨 후(딤전4:1-5) 심판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그 뒤에 숨어버리는 “안전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지옥과 심판의 두려움을 없애려면 맑스, 쇼펜하우어, 헤겔, 헉슬리, 라디오, 포크너, TV, 헤밍웨이, 명화극장, 혹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자들에게 도피하는 것보다 생명의 주이신 그 분께(막10:17)로 달려가서 영원한 반석이신 그분에게로 숨는 것이 나을 것이다(시17:8; 27:5).

잘못된 죄의 ‘전가’
3:11,1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벌거벗었다고 누가 네게 말해 주더냐? 내가 네게 먹지말라고 명령했던 그 나무의 과실을 네가 먹었느냐?” 하시니 그 남자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도록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내게 주기에 내가 먹었나이다” 하더라.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은 아담에게 있어서는 실로 소름이 끼치는 질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담은 자기가 “벌거벗었다”고 고백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만 셈이다. 자기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면 무엇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겠는가? “누가 네게 말해 주더냐?” 우리 조상에게 하나님께서 던지신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뒤이어 매우 불길한 질문이 던져짐을 잊지말라. “네가 먹었느냐?” 이 질문에 당황한 아담은 책임을 전가한다. 12절에 보면 군대에서 흔히 발생하는 그 사건이 벌어진다. 대령은 중령에게, 중령은 소령에게, 소령은 대위에게, 대위는 중위에게, 중위는 소위에게, 소위는 상사에게, 상사는 중사에게, 중사는 하사에게, 하사는 병장에게, 병장은 상병에게, 상병은 일병에게, 그리고 일병은 이병에게 잘못을 전가시킨다. 마지막 이병은 애꿎은 깡통을 발로 걷어차면서 욕지거리를 퍼붓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도록 주신 그 여자가” 자, 이 발언을 주목해 보자. 아담은 실로 매우 “고상”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여자만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여자를 자기에게 주신 창조주를 먼저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첫눈에 반했던” 그 사랑은 신혼여행과 더불어 사라지고, “오, 하나님, 저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사랑스러운 친절과 부드러운 자비를 따라 긍휼을 베푸소서...저의 허물들을 지워주소서...”와 같은 기도대신에 “그 여자가 그렇게 했어요. 주님께서 그녀를 만드셨으니 책임지세요” 라고 하면서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여기서 다섯번째의 보편적 사실을 접하게 된다. 한 가정에서 형제 자매들간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어린아이들은 하지말라고 경고를 받은 그 일을 저지른 후 도망가서 숨는다. 그러다가 들키면 핑계를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모든 아이들은 창세기의 처음 세장의 유형을 그대로 따라 행하고 있는 셈이다. 입, 먹는 것, 벌거벗음, 벌거벗음과 동반된 술(합2:15, 애4:21), 숨어버림, 거짓말, 자기의 등과 같은 보편적 상징들과 예표들이 성경 처음 세장에 너무도 잘 다루어져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성경이 뒤에 가서는 외계인, 계속되는 세계제국들, 한 민족의 4000년간에 걸친 보존, 유엔을 장악하게 될 세계적인 독재자,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구원계획 등을 다루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세계에는 무려 4000여권이 넘는 종교서적이 있는데 어째서 오직 한 권의 책만이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해 처음부터 그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나머지 모든 책들은 이 성경을 모방하거나 흉내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절대적인 정의를 내리고 출발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이 정의 내려진 사실들을 입증해가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은 사건이 발생한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다.

인간은 그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다른 사람을 탓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비난하고 나선다(롬 9:19-21). (러시아의 경우는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아예 하나님을 불법화 시켰으며 알티저는 그의 우상 니체를 신봉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심장마비에 걸려 그 어딘가에서 죽었다고 선언했다). 니체는 한때 지나치게 대담성을 발휘한 나머지 벽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죽었다. 니체씀” 그런데 1년도 못되어 니체는 죽었고 한 재미있는 사람이 니체가 쓴 것을 지워버리고 거기에다 “니체는 죽었다. 하나님씀”이라고 써 넣었다.

3:13 주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행한 이일이 어찌된 것이냐?” 하시니 그 여자가 말하기를 “그 뱀이 나를 속여, 내가 먹었나이다” 하더라.

이브역시 아담에게 전염되어서 그런지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녀는 뱀때문이었다고 발뺌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행한 이일이 어찌된 것이냐?”라고 물으셨는데 그 질문의 촛점은 이브가 무슨 일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마땅한 답변은 “제가 하나님께 불순종 했어요”이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도 그의 아내도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브는 그녀의 불순종에 대해 인정하기 보다는 왜 불순종하게 되었는지를 변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 모습은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래의 무섭고 두려운 그날에(계 20; 벧후 3) 이땅의 거민 수백만이 그들의 창조주 앞에 서서 그들이 몸으로 행한 모든 행위를 직고하게 될때(전12:13,14, 롬2:13) 그들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변명하고 나설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그 누구도 다음과 같이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시51:1-1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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