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출애굽기 주석 분류

홍해를 어떻게 건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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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1년 07월호>

성경에서 처음으로 “거룩하게 하다”(sanctify)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앞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정확한 의미로 계속 사용된다. 헬라어 학자들이나 히브리어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업적에 맞추기 위해 이 말을 어떻게 조작을 하건 상관없다. 성경은 자체가 사전이 되어 설명한다(출 13:12). 카일, 델리취, 헹스턴베르그, 칼리쉬, 하카비, 게세니우스의 책을 뒤져볼 필요가 전혀 없다. A.D. 150-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칠십인역”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거룩하게 하다”는 “따로 떼어 놓다”(set apart)의 의미이다. 이 말이 어근이 되어 다른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이와 다르게 가르친다면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뿐이다.)

『곧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것은 내 것이니라』(2절). 이 구절은 명백하게 12:12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락 없이 파괴자로 하여금 그의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욥 1:6-8). 이스라엘의 첫태생은 이집트의 첫태생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그 구원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져야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도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고전 6:19,20)라고 말한다. 얼마나 유사한지 보라.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집트에서 죽임당한 첫태생은 모두 남자 아이들이었으며 짐승 중에서는 수컷이었다는 것이다. 13:3,5,6,7절은 출애굽기 3:17; 12:15,17,20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주며』(8절) 14절도 같은 말인데 두 구절 모두 11절의 때를 가리킨다.
『이것이 네게는 네 손에 표적이 되고 네 눈 사이에는 기념이 되게 하여 주의 법도가 네 입에 있게 하라』(9절). 구원받은 히브리인이 무엇을 행해야 하고(네 손에), 무엇을 보아야 하고(네 눈 사이에는), 또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네 입에) 가르쳐 준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벗어난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문자적으로 취하라는 지시가 없다. 이들 모두는 “테필린” (tephillin, 마태복음 23:5에서 말하는 성구함)이 여기에도 언급되어지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는 큰 잘못이다. 출애굽기 13장에서는 성구함과 같은 것을 부착하라든지, 메고 다니라는(dress, wear) 말이 없다. 이 주석가들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사고 체제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전형적인 육신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사람들은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말하는 곳에서는(마 15:15; 25:41) 영적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영적으로 말하는 곳에서는(마 26:28; 16:6)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신명기 6:9과 11:20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기록하다”라는 구체적인 말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명기 6:8; 11:18에는 그 어디에도 “기록하라”에 관련된 말이 없다. 영적인 문맥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경우를 예로 들자면 유대인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유대인들은 마음에(heart) 기록된 말씀을 묶어둘 수 없으니까(신 6:6) 마음에 가장 가까운 곳인 왼쪽 팔, 팔꿈치 위 그 안에 성구함을 만들어 넣어 가지고 다닌 것이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구절 전체를 문자적으로 취해야 한다(마 26:27). 마태복음 26:27을 온전히 문자적으로 볼 경우 잔(cup)이 그리스도의 피가 되는 것이다. 잔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아니라 잔 자체 말이다. 마음 가까이에 있는 것과(near the heart) 마음 속에(In the heart) 있는 것이(신 6:6) 같은 말인가? 절대 같을 수가 없다. “NEAR”(눅 18:24)는 “in”이 아니다. 가까이에 다가갔다가도(막 12:34) 벌어질 수 있다.

성구함은 30구절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출애굽기 13장, 신명기 6,11장의 내용이 포함된다. 이 성구함은 작은 종이 조각 위에 쓰여졌다. 이 조각들은 가죽으로 씌어져 이마나 손, 팔에 부착되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 이 성구함을 부착한다. 그러나 안식일이나 명절 동안에는 부착하지 않는다. B.C. 500-A.D. 1900년 사이에는 주문이나 부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유럽인들, 아시아인들, 아프리카인들, 아메리카인들로부터 놀라움과 찬사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떤 이방인들도 이 성구함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은 없고 다만 조롱과 무관심과 멸시만이 있을 뿐이다.
이 성구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계 없이 분명한 사실은 출애굽기 13장에서는 무슨 내용을 기록하여 누가 그것을 부착하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9절에서 말하는 “표적”은 유월절의 누룩 없는 빵을 언급한다(6,7절). 이 문맥에는 무엇을 “기록하고,” “잘 만들어서,” “묶고,” “지니고 다니다”라는 말이 없다. 누룩 없는 빵은 손에 대한 표적을 말하는데 그것은 순수한 행위들을 말한다. 누룩 없는 빵은 눈과 관련된 표적을 말하는데 그것은 순결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마 6:22, 욥 31:1). 누룩 없는 빵은 입과 관련되어 표적을 말하는데 그것은 순결한 말을 의미한다(마 12:34-36). 자! 어떤 주석을 읽을 때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아니라면 당장 펜을 들어 그 주석가에게 올바른 내용을 가르쳐 주어 틀린 부분은 바로잡게 하라. 이 “보물”에 대해 눈먼 랍비를 만나거든 책망하고 열심히 타일러서 히브리어 본문에만 집착하지 말고 “진리”로 돌이키도록 하라.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의미이다. 이 의미를 무시하는 그 어떤 “참고서”도 구실이나 핑계를 위한 것일 뿐이다.

출애굽기 13:11-16

16절에서는 9절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물론 여기에도 무엇을 기록하라든지, 읽으라든지, 부착하라든지, 타이핑하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표적이 누룩 없는 빵이 아니라 첫태생을 온전히 드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영적인” 주석가들은(이들은 최종 권위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는 그분 자신의 책을 찢어버리는 자들이다.) 영적인 보화를 잃어 버린다. 13절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 머리, 귀, 모두를 말한다(욥 11:12과 잠 26:3을 보라). 마태복음 21:2-9에서 말하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는 위대한 예표로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매달려 있어”(갈 3:13) “저주 받았다.” 그 어린양은 나귀(갈 3:13) 대신 매달리신 것이다. 『네가 그것을 대속하지 않으려면 너는 그 목을 꺾을 것이며!』 성경에서 동물들은 목이 베어지는데(레 1-5장) 목이 부러지는 네 발 달린 짐승이 보수주의 주석가들 앞에 놓여진다!
구속을 위해서는 어린 양이 필요하다(골 1:14). 유월절 어린 양이 본문에 다시 나타난다(출 12:46). 윌리엄스, 더멜로우, 클라크, 랑게, 헨리, 엘리코트, 카일, 델리취, 존슨, 샤프, 바이글, 휫트로, 게세니우스, 헹스턴베르그, 벌링거, 스코필드 편집 이사진들 모두 핵심에서 벗어난다. [윌리엄스는 근처까지는 다가갔지만 나귀를 이미 목이 부러진 죽은 나귀에 연결시킴으로 빗나갔다. 욥기 11:12조차 찾지 못했다. 이 구절은 태어난 첫태생을 언급하는 구절이다. 남자 아이는 반드시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13절). 그러나 나귀의 경우처럼 목이 부러지는 것에 대한 내용은 없다. 인간 제물은 율법 아래에서 금해 졌다(미 6:7). 입다의 경우가 어떠했건 취소한 “규칙”은 변경되지 않는다.]
『모든 첫태생들...』(13절) 이 구절은 은혜를 가리킨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도 없는데 주어지는 은혜인 것이다. 이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기 원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미리 정해진 “선택된” 사람들만 한정되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첫태생의 “모든” 사람은 어떤 특정 그룹으로부터 분리된 선택된 첫태생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첫태생”은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들을 말할 경우도 있다(삼상 2:12). “첫태생”에게 무슨 “선택적인 권리들”(삼상 1:3)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출애굽기 13:17-22

어떤 주석가도 감히 17절을 정면 돌파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원어사전도 신뢰하지 않고 원어에 대해 맹신해 왔던 권위를 내팽개친다. 출애굽기 9:14; 12:37에서 보였던 태도와 마찬가지로 지레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내려 버린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이 대학교의 교수진들은 즉시 휴학을 결정하고 학생들을 봉사활동으로 내몬다. 클라크와 J.P. 랑게도 속수무책이고 토마스 휘트로(강단주석)도 이 구절을 건드리지조차 못한다. 존슨 박사는(위클리프 주석) 이미 기록했던 내용만 되풀이 할 뿐이다. 『백성이 전쟁을 보면 후회하여, 이집트로 돌아갈까 함이라.』 그 외의 주석가들은 영적 적용에 안주해 버린다. 즉 하나님께서는 새로 믿게 된 신자들을 아주 부드럽게 대하셔서 이집트에서 갓 나온 신자들이 성장하고 무장할 수 있을 때까지는(히 5:14) 전쟁에(엡 6:10) 가담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훌륭한 설교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근본 취지는 놓쳐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의 땅의 길이 가까울지라도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17절) 이스라엘 민족은 카나안 땅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는다(출 3:12). 이들은 어디로 가기로 되어 있든지 간에 남쪽으로 먼저 내려가야만 한다(출 19:2). 이들은 “Via Maris”(가자에 이르는 해안 길)을 통과해 가지도 않았다. 설령 이곳에서 군대들을 만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150마일도 더 떨어져 있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만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모압에서 회고하는 내용이 아니다(민 22-25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산에 도착한 이후에 해안 길을 따라 위쪽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1. 이스라엘 자손은 요단 강 동쪽에서도 서쪽에서와 마찬가지로(민 21-31장) 많은 전쟁을 치른다.
2.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으로 출발했을 때(민 13,14장) 이들은 필리스티아인들의 땅 바로 옆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후에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필리스티아인 거인들을 모두 죽였다(민 13:33, 삼상 17:4).
여기에서 문제의 본질을 만난다. 출애굽기 3:22; 4:26; 3:14; 9:14을 뜯어고친 경솔한 보수주의 학자들이 왜 17절을 피해 버린 것인지 그 이유를 18절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이 구절에 와서는 보수주의 학자들이 불신자들인 자유주의 집단과 제휴를 맺는다.

『홍해의 광야 길을 통과하도록 인도하셨으니』(18절). 17절에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대학교가 휴학에 들어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갈대 바다”에 대한 논쟁은 모세 자신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다. 지금까지 성경을 제대로 믿어 보고자 한 사람들은 “Red”라는 말을 히브리어 “수프”(Suph)에서 발견된다는 되먹지도 않은 박사들의 말에 잠잠해 왔다. 이 주장은 마치 창세기 3장에서 “아프리코트”(apricot)라는 말을 가지고 “사과”라느니 “오렌지”라느니 하며 장난치는 것과 같다. “갈대들의 바다”(Sea of Reeds)라는 말은 자기 중심적인 아테네인들(행 17:21)의 귀를 간지럽혀 주기에 충분하다. 결국 이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렘 23:36)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팀사 호수나 멘잘레 호수(라메세스 근처에 있는)를 건넜다는 말은 창세기 3:1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다. 이에 관련된 근거 자료를 말하면 입다가 자기 딸을 결혼시키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판 11:21)만큼도 되지 않는다.
불신은 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요일에 못박히셨다고 쓴 A.T. 로버트슨의 글에서 죄를 발견할 수 있다. <킹제임스성경>을 공격한 벤자민 와필드의 글에서 죄를 발견할 수 있다.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지옥으로부터 스스로 구원시켜보고자 한 톰 페인의 말에서 죄를 발견할 수 있다. 절대 진리를 제거하고 자신의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한 아인슈타인의 책들에서 죄를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불신으로 존 R. 라이스는 부패한 카톨릭 성경인 New ASV를 추천하여 그 책을 선호하게 만든다. 이같은 불신으로 노만 빈센트 필은 지옥에 대해서도, 재림에 대해서도 설교하지 않는다. 둘 다 믿지 않기 때문이다.
파라오가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늪에서 조류 때문에 빠져 죽었다고 믿는 것이 보수주의 학자들이다. 이들의 어리석음은 진리를 찾고자 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성경을 아주 간단히만 살펴보아도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의 여정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고센에 있는 홍해 바다(오늘날 수에즈 운하가 있는곳)를 건넜다고 입증하는 데 얼마큼의 성경을 근거로 했는지 살펴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홍해 바다가 고센에 있는 갈대 바다를 말한다면 고센 지역에서 고센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밤낮으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필요했던 사실이(13:21) 의아스러울 뿐이다. 어떤 군대라도 고센에서 고센으로 이동하는 데 열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고센은 수에즈 운하가 위치한 지역의 바로 서쪽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센을 떠났고, 17절은 이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17절에서 말하는 바는 이렇다.
1. 이스라엘 자손은 카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시내로 가야만 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2. 그렇다면 시내 산으로 가는 길 가운데 어떤 여정을 택할 것인가?
3. 시내 반도의 서쪽 연안을 따라 내려가는 한 길이 분명히 있다.
4. 믹돌을 통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올라가는(Via Maris) 분명한 한 길이 있다. 14:3에서 이 도시에 대해 “필리스티아인들의 길”과 관련하여 살펴볼 것이다.
5. 지금까지의 결과를 정리해 보면 이스라엘은 “Via Maris”쪽으로 50-75마일 거슬러 올라가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내쪽으로 내려갔다.
17절을 살펴볼 때 이집트에서 7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필리스티아인 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필리스티아인들은 카슬루힘에게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창 10:14). 이 카슬루힘은 이집트의 창설자의 아들이었다(창 10:13, 암 9:7). 자, 자유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홍해”가 수에즈 운하 지역에 있거나, 라메세스와 피돔 북쪽의 “늪 지역인 호수”를 말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지역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다(17절). 고센 지역에서 동쪽 방향으로 어떻게 이동하든 간에 이 필리스티아인의 땅의 길에 들어서고 만다.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은 방향을 바꾸어 돌아섰고(Turn, 출 14:2)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서서 바다를 건너기 위해 걸어간 시간은 그 어떤 바다를 건너갔건 간에 24시간이 족히 걸린다. 출애굽기 14:19,20을 살펴보라. 고센 남쪽으로 50-70마일 가로질렀다는 증거가 고센 동쪽으로 5-15마일 가로질렀다는 증거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성경을 통하여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릴 때 이스라엘이 수에즈 근처에 있는 늪 지대를 지나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거부하는 불신자이다. 그 사람이 믿음에 대해 무어라고 중얼거리던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A. 이스라엘 자손이 건넜던 바다에는 그 해안에 에시온게벨이 있다(왕상 9:26). 이곳에도 “늪 지역”이 약간 있다. 에시온게벨은 아카바 만에 있는 “엘랏”(Elath)으로 수에즈 운하로부터 해상으로 200마일 이상 떨어져 있다.
B. 이스라엘 자손이 건넜던 바다를 따라가면 에돔의 해변이 나온다(신 1:40; 2:1). 에돔의 경계는 수에즈 지역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50마일 이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C.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후 바다를 건넜을 때 진을 쳤었다(민 14:25; 21:4; 33:11). 이스라엘 자손이 건넜던 바다가 고센 지역에 있는 바다라면 고센 지역을 떠난 후 2백만 명이 40년 동안 진을 치기 위해 고센의 늪 호수들로 되돌아 왔다는 말인데 이 부분은 어떻게 설명을 하시겠소, 박사 양반?
D. 이스라엘 자손이 건넜던 바다가 말랐던 것은 요단 강이 말랐던 것과 똑같다(수 4:23). 만조(high tide)의 영향으로 요단 강이 말랐었다는 주장처럼(수 4장) 물이 되돌아 오기 전의 늪 지역도 요단 강처럼 그렇게 된 순간이 잠시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앞에서 너희가 건널 때까지 요단 물을 마르게 하셨으니, 이것은 주 너희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서 우리가 건널 때까지 홍해를 마르게 하셨던 것처럼 하신 것이라』(수 4:23).
E. 이스라엘 자손이 건넜던 바다는 이집트 군대가 빠져 익사할(15:4) 정도로 깊었다(15:5). 물무더기가 수직으로 멈춰서서(15:8) 홍수처럼 이들을 쓸어버렸던 것이다. <킹제임스성경>에서 성령께서 기록하신 정확한 내용이 여호수아 3:16,17에 기록되어 있다.
교훈 : 학자들이 히브리어 본문을 가지고 영어 본문을 고치려고 한다면 - 이번 경우는 “Suph”와 “reeds” - 영어 본문을 가지고 히브리어 본문을 바로잡으라. “갈대 바다”(sea of Reeds, 히브리어로 “Suph”)가 홍해(Red Sea)를 말한다고 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드라이버는 “수프”(Suph)가 갈대의 무슨 “종류”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사야 19:1-6; 18:2은 왜 홍해가 갈대 바다로 불리우는지 말해 준다. 갈대로 만든 배들이 많이 다녔기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이 사실이 의심스럽다면 모든 주석서들을 팽개쳐 버리라.)
이스라엘 자손은 고센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내려와 홍해의 북단 끝에 진을 친다(13:20). 에담까지 내려온다. 함성을 지르며 자정이 넘어서야 이집트 평원에 자리잡는다. 불 기둥으로 인도받는다(22절). 이 기둥은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있다(느 9:19). 벧여시못까지 이 현상은 계속된다(민 33:49).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불 기둥은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빛이다(살전 5:1-6).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깜깜한 흑암이다(요 9:39-41). 『악인의 길은 암흑과 같아서 사람이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잠 4:19).
에담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필리스티아인들의 길”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더군다나 동쪽으로 간다면 홍해를 건너지 않고서도 시내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이란 종종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측량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음의 두 가지 일을 행하시기 전에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완전히 구해내실 의향이 없으시다.
1. 파라오와 그 군대를 멸망시키는 것.
2.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서라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
이 장을 마치면서 주석가들이 놓쳐버린 19절의 영적 진리를 살펴보자.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이다. (Pink의 에서 152가지의 유사한 점을 참조하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뼈들은 이 지상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뼈들은 모두 휴거되었다(눅 24:39, 행 1:9,10). 이집트는 이 세상의 예표이기에 요셉의 뼈들은 타니스에 있는 국립 묘지에 남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골 1:27).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에 뼈들도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든 죽은 그리스도인들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뼈들은 휴거될 것이다(고전 15:41-52).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뼈들은 “이집트”에서 옮겨졌다(행 1:9,10). 로마는 요한계시록 11:1-5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인의 뼈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살전 5:1-9) 이 땅을 떠날 것이다.
출애굽기 13:19은 단순히 창세기 50:25의 성취만이 아니다(히 11:22). 그리스도인과 관련되어 하나님의 나팔과 천사장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출애굽기 14장과 15장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요 11:25,26) 휴거되어 깊음을 통과하는 사실을 예표한다(창 1장, 합 3장, 판 5장, 출 14장). 정사들과 어두움의 주관자들을(엡 6:12) 지나 깊음을 통과할 때 적들에게는 그 문이 닫혀져서(요 10:2,6) 깊음 가운데로 돌처럼 가라앉듯이 가라앉는 것을(출 15:1-10) 분명히 보게 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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