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태복음 주석 분류

믿음이 없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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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0월호>

마태복음 17:14-27



17:14-21 『그들이 무리에게 오자 한 사람이 주께 와서 무릎을 꿇고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 아이가 미쳐서 몹시 고통을 겪고 있나이다. 그가 종종 불 속에도 넘어지고 여러 번 물 속에도 빠졌나이다. 그래서 그를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그들이 고치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언제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시더라.』


1. 마귀들린 아이
『“그 아이가 미쳐서 몹시 고통을 겪고 있나이다.”』(15절)

“미쳤다”는 말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lunatick”이라고 표현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달에 의해 괴롭힘당하는 것을 뜻한다. (“luna”라는 말은 라틴어와 스페인어에서 달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대중음악들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부추기기 위해 “밤”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아도 관련성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또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특성이다. 많은 세속문화에서 우리는 정신병원에 가지 않는 “미친 사람들”을 본다. 그래서 “lunatick”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미친 것을 말한다.
우리는 질병이 단순한 육체적인 질병과 마귀의 영향으로 생긴 질병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배웠다(마4:24; 8:16,28; 9:32). 이 아이가 겪는 질병은 단순한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질병이다. RSV는 이 부분을 “간질병”(epileptic)으로 바꾸었다. 로마 카톨릭은 간질병이 마귀들린 병이라고 가르치는데, RSV는 이렇게 바꿈으로써 단순한 육체적인 질병과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을 혼합시키고 카톨릭의 교리를 지지하고 있다. 실제로 A.D. 500-1500년에 이르는 중세기간 동안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마귀들렸다고 간주하여 지하감옥에 가두거나 사슬에 채워 놓는 일이 빈번했다. RSV는 믿음에 관한 문제 뿐 아니라 의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권위가 될 수 없다.
마귀들린 자의 특징 중에 하나는 뜨거운 곳과 젖은 곳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마귀들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8:28-32를 설명할 때 마가복음 5:1-25와 비교하여 자세히 다루었다.

2. 믿음이 없는 세대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17절)

믿음이 부족함을 꾸짖으시는 것은 보통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이다(마8:26; 14:31).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력히 꾸짖고 계시는 것은 단순히 제자들만이 아니라 믿지 못했던 군중들도 포함된다(마 6:30). “세대”라는 말을 통해 볼 때 마귀를 쫓지 못한 것이 전적으로 제자들만의 잘못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은 항상 더 자세한 사건의 상황을 진술하는데, 마가복음 9:22-24에서 믿음이 없었던 사람은 서기관들과(막9:14)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17절)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허락한다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고통을 느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참고 견디시면서 그들을 고쳐주시며,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영적인 교훈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와 복을 받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이 없음으로 담대하게 주님께 구하지 못하거나,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위대한 창조주이시며 승리자(요16:33)이신 주님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담대히 수행해야 한다. 일을 맡기신 주인은 종에게 필요한 물질과, 또 그 일을 해 낼 만한 능력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우리들은 주님의 뜻을 져버릴 때가 종종 있다. 그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는데, 그때 주님은 우리를 “참아” 주시는 것이다.
참는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허용이다. 주님은 친히 시험과 고난을 모두 당하셔서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2:18; 4:15).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없으므로 다시 한번 주님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아 “참으시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도와주셨듯이(마14:31), 우리에게도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꾸짖으시면서도 우리를 참아주시며 항상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또한 우리의 헌신의 결단을 촉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3. 기도와 금식
17:21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이 부분은 <개역한글판성경>에서 빠져 있으며, 모든 변개된 성서들도 네슬 원문을 따라 삭제되어 있다. 마가복음 9:29도 똑같은 문맥인데, 거기서는 “금식”을 빼버리고 “기도 외에는”이라고 바꾸었다. 그것으로 환란시대의 금식의 교리에 대해서 감추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개된 성경을 쓰는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붙잡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기도와 금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고치기 위해 기도와 금식이 필수적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표적은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 표적 중에 중요한 것은 병고침과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마4:23,24; 8:16). 특별히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천국이 임하기 전에 유대인들이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관계된다(마6:33; 12:2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으시면서 이스라엘을 회심시키시는 것이다.
여기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들린 자를 고치신 것은 마귀들린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모형이 된다. 특별히 14장부터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이 상황은 환란시대를 보여준다.
왕국복음은 제자들에게 위임되었다. 왕국복음의 표적인 병고침과 마귀를 쫓는 능력도 제자들에게 위임되었다(마10:8). 그러나 그들은 17:6에서 그 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들이 모든 능력을 상실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아이가 갖고 있던 질병이 특별한 경우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는 단순히 마귀를 쫓으라는 위임 이상의 것, 즉 “기도와 금식”이 조건으로 주어진다. 이것은 환란 시대에 특별하게 적용되는 교리로 보여진다. (십자가 이전 상황은 “마지막 날들”이라는 관점에서 환란시대와 같은 상황이다. 히1:2)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능력은 마귀들린 자의 치유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금식도 하면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마태복음 17:21을 교리화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하며, 마귀들린 자와 일반적인 정신병을 구별하여 함부로 처방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져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니라.』(20절)

이 구절에 대해서도 실제적인 믿음의 적용을 할 수 있다. 때때로 기도와 금식은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 필요하다. 또 작은 믿음이 큰 일을 이루기도 한다. 불신은 기도를 방해하는 주된 요인이다(히11:6). 많은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전혀 없다(창18:14를 보라). 때때로 산은 지진으로 옮겨질 수도 있고, 폭탄이나 공사로 없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누군가의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17:22-23 『그들이 갈릴리에 머무는 동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곧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니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나 그가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지리라.”고 하시니 그들이 매우 슬퍼하더라.』

예수님께서는 16:21에서 하신 말씀을 여기서 다시 말씀하시며, 이 말은 다시 20:17,18에서 반복된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시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처형되실 그 때는 그의 공생애 중 네 번째 맞으시는 유월절이다.


● 왕의 자손들

17:24-27 『그들이 카퍼나움에 왔을 때에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말하기를 “너희 선생은 세금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내신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서 그가 집에 들어오니 예수께서 그보다 앞서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의 왕들이 누구에게서 관세와 정세를 걷느냐? 그들의 자손들에게서냐, 아니면 타인들에게서냐?”고 하시니...』

실수가 많던 베드로도 이때 만큼은 확실하게 그려진다. 그는 양자택일의 질문에서 정확히 대답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은 항상 그렇듯이 애매하지 않고 확실하다. 단지 주님의 대적들에게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양자택일의 질문을 종종 하셨다.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마21:25) “그 말이 네 스스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해 준 말이냐?”(요18:34) “그러므로 그들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7:42)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그들이 말을 흐렸듯이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양자택일의 문제에 있어서 여러가지 복잡한 말과 철학적인 사고를 동원하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분명한 구분을 지으신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다만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처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의 왕들이 누구에게서 관세와 정세를 걷느냐? 그들의 자손들에게서냐, 아니면 타인들에게서냐?』(25절) 이에 베드로는 정확히 대답했다. 『타인들에게서니이다』(26절).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처럼 “자손들에게서라 하면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내가 그의 자손이 아님을 입증할 것이요, 타인들에게서라 하면 나에게 지불하라고 하실 것이다.”라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대답했다. 『타인들에게서니이다.』

『그러면 그 자손들은 진정 면세니라』(26절).

예수님은 그 왕국의 왕이시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분의 자손들이다(마9:15; 18:3,5,6). 그러므로 그들은 카이사가 다스리는 왕국에 세금을 내야 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 내야 한다면 회심하지 않아 왕의 가족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비록 “지금은” 주님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요18:36), 주님의 왕국이 될 이 나라에서 그 왕국의 자녀들이 갖는 특권을 설명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내셨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실족케 해서는 아니되니』(27절)

여기에 바울서신에 내타난 신약적인 진리가 발견된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이나 저주 아래 있지 않기에(갈3:13, 롬6:14,15) 모든 일에 자유롭지만(고전6:12; 10:23),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실족시켜서는 안된다(롬13:8-10).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은 오순절 이전에 제시된, 신약 교리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말씀이다.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올라오는 첫 번째 물고기를 잡으라. 그 입을 열면 동전 한 개를 찾으리니』(27절)

자연에 대한 절대적 권위는 우리 주님의 신성을 더욱 느끼게 한다. 갈릴리 바다에 있는 수천마리의 물고기 중에 누군가가 빠뜨린 동전을 삼킨 물고기를 첫번째 잡히게 하셨다. 불신자들에게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로 보인다. 이러한 그 분의 절대적인 능력은 그 분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 외에 설명할 수 없다(요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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