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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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법령” : 산상설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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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8월호>

산상설교의 위대함은 그것이 왕국의 법령이라는 데에서 나타난다. 영광중에 임하시는 메시야 왕, 그의 통치를 받는 영토에서 시행될 규범들, 이것들은 매우 강력하고도 엄격하게 제시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엄격한 의를 제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될 청중들, 즉 유대인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들에게는 이 의로운 왕국에 들어가기 이전에 당해야 할 엄청난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왕국에서의 법령뿐 아니라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상황 속에서 행해야 할 일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 고난의 때에 제시되는 일들을 행해야만 이 왕국에 참여할 수가 있다. 물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도우실 것이다.

6:1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자선을 베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리라.』

5장에서 연속되는 규례들이 6장과 7장에서도 상세하게 제시되는 가운데, 6장은 자선과 기도에 관한 규례로 시작한다. 그리고 자선과 기도에 관한 규례에서는 누구든지 “드러내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규례들에서 좀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5장에서 연구했듯이 이 규례들은 교리적으로 교회에 관한 규례들이 아니라 왕국에 관한 규례들이라는 것이다(「마태복음 연구-7」 28호 참조).
먼저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주목하자.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라는 표현은 39번 나오는데, 매 규례마다 항상 강조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중요한 것은 이때 모인 청중들이 십자가 이전 상황 속에서 왕국을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너희”를 교회시대의 성도들로 생각하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자신들에게 적용하여 영적으로 푸는 설교자들이 많지만, 여기서 제시되는 “너희”는 분명히 메시야 왕으로부터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이었다.
산상설교에서 “너희”가 유대인이라는 또하나의 이유는 “너희”가 항상 이교도나 이방인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6:7에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되풀이하지 말라.』 하였고, 6:32은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너희”는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유대인이다. 어떤 이는 “성도들은 곧 영적인 유대인이고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들은 불신자들을 말한다.”라고 생각하여,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달리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이러이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나, 그리스도인은 결코 유대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지 않는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마10:5).
그렇다면 같은 구제에 관한 규례, 같은 기도에 관한 규례라도 교회에게 주는 말씀이 다르고 유대인들에게 주는 말씀이 다르다는 것인데, 본문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6:1-4은 구제에 관한 규례이고,
6:5-15은 기도에 관한 규례이다. 주목할 만한 단어는 “은밀한 가운데”(4,6절)와 “드러나게”(4,6절)인데, 예수님께서는 청중들에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구제하며, 또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위선자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이러한 일들을 드러나게 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선한 일을 은밀하게 행하는 것이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미덕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교리적으로 봐야 한다. 본문에서는 이들이 은밀하게 행한다면 “드러나게”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러나게” 보상을 받는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가서야 비로소 보상을 받게 되는데(고전3:8-14, 눅14; 12-14), 그리스도인들이 생애중에 보상받는다는 것은 약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왕국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서 생애 중에 “드러나게”(공개적으로) 보상을 받는다.
특별히 여기에서 책망받는 공중기도는 구약적 유대인의 기도에 관한 것이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공개적으로 기도한다(딤전2:8, 행27:35).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2:8에서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은밀하게 선을 행하는 것이 미덕임은 분명하지만, 그 행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보상받는다는 것은 약속받은 적이 없다.
기도에 관해서 좀더 살펴보자. 9-13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주기도문”이 제시된다. 이 “주기도문”은 거의 모든 교회에서 공적인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과 더불어 암송된다. 각종 크리스챤 모임에서 목사의 “축도”가 없을 때에는 “주기도문”이 자동적으로 폐회를 위한 암송 기도문이 되곤 한다. 그러나 이 기도가 그렇게 사용되는 것이 합당한가?
우리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기 이전에 7절을 봐야 한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되풀이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로 생각함이라.』 많은 은사주의 집회에 가보면 “유창하게” 방언하는 전단계로 “할렐루야” 같은 단순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헛된 반복”(개역성경 용어로는 “중언부언”)이다.
이교도들은 가능한한 말을 많이 하고, 헛되게 반복하여 기도한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에 가까운데,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불교신자 중에 자기가 외우는 “천수경”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천주교 신자 중에 항상 반복해서 기도하는 “로사리오 기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기독교인들 중에 매주 암송하는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의 참 뜻을 알고 외우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만약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단지 의식적(儀式的)으로 마냥 “반복”만 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금지하신 “헛된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기도문”의 의미를 알기 위해 설교와 책들을 통해서 공부를 한다. 그리고 이 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정성을 다해서”, “음미하면서”, “또박또박” 외운다.
그러나 이 “헛된 반복”이라는 말은 단지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말이 의미 있는 말일지라도 “헛되게” 반복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기도를 올바로 사용하지 않고 잘못 사용하는 가운데 계속 반복하는 행위를 지적하는 것이다.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역시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의 “너희”는 유대인, 즉 임할 왕국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유대인이다. 예수님은 한번도 이 기도대로 기도하지 않으셨다. 이 기도를 청중들에게 가르치시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기도문에 나오는 “우리” 역시 유대인임이 명확하다. 그래서 이 기도문은 “주기도문”이 아니라 오히려 “제기도문”(제자들의 기도)이라고 불리워야 합당할 것이다.

6:10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여기서 아버지의 왕국은 이 땅에 세워질 “천국”이다(“천국”에 대해서는 94. 3월호 「마태복음 연구」를 참조하시오.) 그래서 이 기도문은 왕국을 기다리는 상황 속에서 드려지는 기도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왕국의 직전 상황, 곧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불리워지는 대환란 때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환란 때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물건을 매매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음식을 얻을 수 없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출애굽 때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매일 그날의 양식을 얻을 것이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중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기초 위에서 용서를 받는가?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 강해를 할 때 다른 부분은 그럴듯하게 넘어가면서도 이 구절에 와서 주춤거리다가 억지로 해석해버리는 이유는 이 기도문을 왕국의 관점 없이 해석하기 때문이다. 교회시대, 즉 은혜의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시대가 끝나면 구약처럼 행위가 따라야 하는 시대가 온다.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계12:17), 이때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있었던 구원과 지옥의 모습을 알려주는데(이 사건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의 사건이다), 여기서 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 이 진리는 마태복음 6:14,15에서 반복된다.

6:13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환란에 처한 유대인들에게 이 기도는 더 실제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의 절대보장을 받는다(롬8:38-39). 그러나 대환란 때의 사람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으며(히6:4-6),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히3:14, 마24:13). 그래서 그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은 절박하다.
마찬가지로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구체적인 악의 대상인 적그리스도로부터 구해 달라는 기도, 어떠한 악이라도 범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 이 기도가 환란시대보다 더 절박한 시기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말하는 “주기도문”은 교리적으로 이 시대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임할 왕국을 바라보며 대환란을 견디는 유대인들을 위한 기도이다. 비록 이 기도의 내용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적용할 만한 구절이 몇 있을지라도, 이 기도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매 예배 때마다 반복해 암송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7에서 금지하신 “헛된 반복”일 뿐이다.

6:19-21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두라...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

이 구절은 어느 시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교훈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두라는 말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저 하늘에 소망을 두라는 위대한 진리와 연결된다. 골로새서 3:1-4에서 바울 사도는 위의 것을 사모하라고 강조한다. 『위에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땅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골3:2). 또 바울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후4:18)고 성령의 영감으로 말한다. 우리의 집은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한다. 세상에서의 부귀를 생각하지 말고 그 부를 하늘에 쌓아두며, 세상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해야 한다(딤전6:8).
여기서 보물은 단지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치를 둘 만한 모든 것이라고 영적으로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재물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든 가치들을 다 포기해야 한다. 세상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은 세상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치를 세상에 둔다면 우리의 마음도 자연히 세상에 머물게 되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24절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어서 24-31절에서도 계속하여 땅의 것들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부분 역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줄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산상설교임을 잊지 말자. 이 부분 역시 왕국의 백성들을 향하여 주는 규범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하겠으나, 환란기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간절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들은 순간순간의 위험과 어려움을 당하며, 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6:25-32) 여러 규율에 대한 “약속”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엄한 율법을 주시더라도 반드시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분이시며,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보았듯이 왕국의 법은 매우 엄격하다. 구약 율법의 의보다 더 엄격하여, 떨어져 나갈 만한 위험이 종종 있지만 그 분께 의뢰하기만 하면 신실하게 지켜주신다.
이 시대에 우리 성도들의 적은 사탄과 세상과 육신이다(엡6:12).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사탄의 미혹을 받아서 짓기도 하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짓기도 한다(롬 7장). 우리는 그때마다 주님을 더 신뢰하고, 성령께 나를 맡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므로 죄에게서 완전히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죄들을 지을지라도 우리의 구원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왕국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바로 그 댓가를 받아야 한다. 너무나도 엄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사탄이라는 적이 없다. 왕국 1000년 동안 사탄은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갇혀있게 되기 때문이다(계20: 1-3). 그리고 그 때의 세상은 “의”로 회복된다(사11:1-9).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만 잘 다스리면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연약함으로 인한 위험들에게서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본문에서 주님은 적그리스도의 치하에서도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실한 주님께서는 왕국 때에도 의로운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를 의로 판단하며 세상의 온유한 자를 위해서는 정직으로 책망하실 것이다(사11:4). 그들은 단지 온전하게(마5:48) 믿음과 행위를 간직하면 된다.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이 구절은 산상설교의 절정이다. 주님께선 32절에서 청중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신 후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서 등장한다. 우리는 <마태복음 연구-3>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94.3월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공부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 달리 영적인 나라로서, “거듭나면” 들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공포되는 이 때에는 아무도 거듭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아무도 교회시대의 성도들처럼 영으로 태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왕국(천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인데, 이 영적인 상태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교회시대에는 이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거듭남으로 들어가지만, 이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이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행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주제가 “의”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벽한 상태의 나라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구해야 할 나라였다. 그래서 이 산상설교에는 완벽한 의가 요구되는 것이고, 이 “의”로 말미암아 이들은 천국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완전한 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 의를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 경고하신다. <다음 호에 계속>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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