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사도행전 주석 분류

아들 VS.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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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7월호>

[행 3:12-18]
12 / 그것을 보던 베드로가 그 백성에게 대답하기를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히 여기느냐? 마치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어찌하여 우리를 주시하느냐?
13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심하였는데 너희가 빌라도의 면전에서 그를 부인하였으니
14 / 너희가 거룩하신 분이며 의로우신 이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자를 놓아주기를 구하였도다.
15 / 너희가 생명의 창시자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들이라.
16 /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너희가 지금 보고 아는 이 사람을 강건케 하였느니라. 정녕, 그를 통하여 나온 믿음이 이 사람을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온전하게 치유한 것이라.
17 / 이제 형제들아, 너희가 너희 관원들이 그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지하여 그렇게 행한 줄을 내가 아노라.
18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고 미리 선포하신 것들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12절).
12절의 내용은 많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이 되었다. 그는 나이 40이 넘은 불구자를 치유해 준 공로를 차지하기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한편 이 부분의 문맥은 2:22과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유대 민족을 향해 또 한 번 연설을 한다. 여기서부터 3장 끝까지 죄인 개개인의 죄들에 대한 피의 속죄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13절).(행 2:39의 “우리 하나님”과 비교) 『그의 아들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절).
이것은 누가복음 7:39, 24:26과 계시록 5:12에서 언급된 영광이다. 이것을 “그의 영광의 보좌”(마 25:31)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 보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때(막 8:38),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광(마 25:31)으로 오실 때 앉으실 보좌이다. 시몬 베드로가 말하는 “지극히 큰 영광”(벧후 1:17)은 한 장소로, 골로새서 3:4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이 장소는 그 표현이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의 장소이거나 하나의 사건이거나 하나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일”을 말하기도 한다(요 12:27,28 참조). 로마서 9:4과 마태복음 4:8에서는 또다른 뜻으로 쓰였다. 이렇게 다양한 뜻을 가진 말을 가지고서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를 신봉하는 성경 거부자들은 하늘의 보좌(행 2:35)와 다윗의 보좌(행 2:30)를 혼합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재 위치는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도, “그의 영광의 보좌에 계신 것”도 아니다. 그분의 현재 위치는 계시록 1:14-17과 마태복음 17:2에서처럼 영화롭게 된 상태이다.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심하였는데...』(13절).
예수님을 놓아주기로 했던 빌라도의 결심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박해받으시는 이유를 알았다는 사실(막 15:10)과, 그리스도께서 무죄하심을 세 번이나 선언한(요 18:38; 19:4,6)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그의 인격적 결함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만다(막 6:26에서 헤롯이 겪는 딜레마를 참고할 것). 세상과의 우정을 유지하고자 애쓰면서(요 9:12) 그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뜻에 넘겨준 것이다. 빌라도는 이중인격자이다. 가시적인 기사와 표적을 증거해 주는 양심은 헤롯이나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심하게 화인맞은 탓에 진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빌라도, 헤롯, 사울, 펠리스, 아합, 아그리파 등은 모두 진리를 직면했고, 진리로 찔림을 받았고, 진리로 동요하기까지 했음에도 진리에 복종하지 않은 대표적인 예들이다.
『...거룩하신 분이며 의로우신 이를... 생명의 창시자』(14,15절).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통쾌한 설교를 한다. “너희가 그를 넘겨 주었고”(13절), “너희가...그를 부인하였으니”(13절), “너희가 거룩하신 분...을 부인하고”(14절), “너희가...살인자를 놓아주기를 구하였도다”(14절), “너희가 생명의 창시자를 죽였으나”(15절)... 사람들이 놓아주기를 원했던 살인자는 바라바였다. 그들은 생명을 앗아간 자를 정당화시키고 오히려 생명을 주시는 분을 정죄했다(잠 29:27).

『...정녕, 그를 통하여 나온 믿음이 이 사람을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온전하게 치유한 것이라』(16절).
그 사람이 그 이름(16절)을 믿었던 믿음은 그가 믿은 분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2:20과 에베소서 2:8,9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이 세 구절 모두가 명백하게 일치하는데도, 보수주의 학자들은 그 구절들을 가지고 온갖 오류를 만들어 낸다.

『너희가... 무지하여 그렇게 행한 줄을 내가 아노라』(17절).
누가복음 23:48과 고린도전서 2:8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눅 23:34)가 응답되었으며,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가복음 1장과 마태복음 4:17에서 이스라엘에게 제시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 이스라엘에게 제시되고 있음을 뜻한다. 사도행전 13:27에서 바울은 이 “무지”가 성경을 모르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다(마 12:3,5; 21:16,42 등). 성경에 대한 무지는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이다.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역자주)을 모르는 것과 같다. 양자 모두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으며, 둘 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증오받는다. 둘 다 영원히 살며 둘 다 죄인에게 새로운 탄생을 준다. 이스라엘은 정치적 왕국을 고대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놓쳐 버렸다. 이방인들은 영적 왕국을 고대하다가 그의 재림을 놓칠 것이다(롬 11:20-34). 신약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구약은 성경을 거부하는 이방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고 미리 선포하신 것들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8절).
시몬 베드로는 구약 구절들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 영화롭게되심에 제한시킨다. 그는 여기서 다니엘의 칠십째 주, 다니엘의 “작은 뿔”, 재림, 팔레스타인 땅의 회복,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 휴거(시 50편, 솔 2장, 사 26장 등) 등을 다루는 구절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비추지 않는다. 마태복음 24:35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일점 일획이 없어지기 전에 하늘과 땅이 없어지리라고 말씀한다. 그 예언은 사도행전이 기록된 때에 성취되지 않았으며, 그 증거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100페이지는 필요할 것이다. 시몬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 3:13의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의 고난과 다가올 영광”(벧전 1:11)이다. 이같은 설명에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있다면 베드로의 메시지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라. 그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을 언급하며 그것들이 “만물이 회복될 때”(21절) 성취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구절을 살펴보기 전에 근본주의 학계의 오류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밥 존스 대학에서 추천하는 변개되고 배교한 번역본(즉 NASV)은 ASV(1901)와 NCCC의 RSV(1952) 본문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했다. 헬라어 ‘파이다’라는 단어가 “아들” 대신 “종”으로 번역된 것이다. [틴데일, 제네바, 비숍 성경에도 <킹제임스성경>과 마찬가지로 “아들”로 되어 있다. 그 단어는 1881-1884년에(RV) 필립 샤프, 엘리콧, 라잇풋, 샌데이, 웨스트코트, 홀트에 의해 바뀐 것이다.]
‘파이다’는 사도행전 4:27과 4:30에서 또다시 잘못 번역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공격당한 것이다(로크만 재단에서 출판한 NASV에서). 성경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이 “근본주의” 타락자들의 왜곡된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첫 번째 변명은 ‘파이다’라는 단어가 <킹제임스성경>에서 열 번이나 “종”으로 번역되었으므로 여기서도 “종”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변명은 칠십인역이 이사야 42:1과 52:13에서 “종”의 의미로 ‘파이다’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여기서도 “종”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변명은 이사야가 메시야를 칭할 때 항상 “종”이라고 했기 때문에 “종”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모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바이다. 이것을 유니온 신학교, 콜게이트 로체스터 신학교, 시카고 대학, 하버드, 예일에서 받아들이며, 휘튼, 달라스, 무디, 린치버그, 미드웨스턴, 사우스이스턴, 풀러, 그리고 ASV(1901)를 지지하는 모든 신학교에서 위의 변명들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믿었던 것을 믿는 사람들은(행 27:25) ASV(1901) 개정 위원회 위원들, 필립 샤프, A.T. 로버트슨, 모울튼, 알포드, 바틀레트, 그레고리, 사우더, C.H. 돗, 라잇풋, 메쯔거, 홀트, 네슬, 알란드, 파라, 렌돌, 선데이, 알브라이트, 노울링, F.F. 브루스처럼 성경을 혼잡스럽게 하는 이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 없이 성경에 귀기울이는 것이 현명하다.
1. ‘파이스’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사용되었을 때는 열 번 중 단 한 번도 “종”으로 번역된 적이 없다. 그 단어가 “종”으로 된 열 번의 경우는 모두 “이스라엘”이나, “다니엘”이나 “고용된 종”을 언급하는 것이다(마 8:6,8,13; 12:18; 14:2, 눅 1:54,69; 7:2; 15:26, 행 4:25).
2. 오리겐, 필로, 심마쿠스, 아퀼라, 데오도티언 등이 이사야에서 “종”을 번역할 때 올바른 헬라어 단어를 택한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들은 70인역을 만들 때 책상에 <킹제임스성경>의 헬라어 본문을 가지고 있었다(행 4:27; 4:30). 그들은 사도행전 4:27, 3:13에서 ‘파이스’를 읽은 후에 이사야 42장과 52장에 ‘파이스’를 썼던 것이다. 미혹된 서기관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종”을 의미한 것처럼 보이도록 구약을 날조한 것뿐이다.
[이사야 42장과 52장의 “종”은 사도행전 3:13이나 사도행전 4:27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다. 시몬 베드로는 이사야에서 한 구절도 인용하고 있지 않다.]
3. 어째서 ‘휘오스’만이 “아들”로 번역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마태복음 21:28에서 로크만 재단은 ‘테크논’(“아이”를 뜻하는 헬라어)을 “아들”로 번역하지 않았는가? 그리고는 누가복음 2:48에서는 “아들”로 번역하지 않았다. NEB, RV, ASV, RSV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이 만든 규칙을 자신도 지킬 수 없는데 누가 그 규칙들로 경기를 하겠는가? 성령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
4. 이사야는 같은 책에서 “아들”(사 7:14)과 “아이”(사 7:16; 9:6)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어째서 베드로가 메시야를 칭할 때 “종”이라고 해야 했겠는가? 만약 베드로가 이사야를 인용한 것이라면(물론 그는 이사야를 인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이사야 9:6의 “아들”과 “아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로마서 1:3,4를 보라!
사도행전 3:13의 문맥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15절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부활로써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로 선포되셨다. 그러므로 브루스, 래드, 로버트슨, 노울링, 렌돌, 빈센트, 극단적 세대주의자들, 윌리엄, 벌링거가 제시한 대체물은 비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이다. 여러분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신학자들과 성경 해석의 한계는 벌써 1881-1884년에 그어졌으며, 학자 연맹이 한 일은 각 세대의 그리스도인 일꾼들에게 죽은 정통주의 법령을 전해준 것뿐이었다. 라잇풋(1888)에서 존 R.라이스(1998)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도 A.D. 190-230년 이후로 성경에 대한 깊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서로를 흉내낼 뿐이다. 그것이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웨스트코트와 홀트는 학자들이다.” “ASV는 최고의 번역본이다.” “A.T. 로버트슨은 권위있는 학자다.” “<킹제임스성경> 본문을 고쳐야 한다.” 이것이 그들이 늘 하는 말이다.
사도행전 3:13에서는 “아들”이 올바른 번역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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