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사도행전 주석 분류

사도행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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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0월호>

1:1-5 『오 데오빌로여, 내가 쓴 첫 번째 글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주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계명들을 주신 후 들려올라 가신 그 날까지의 모든 일을 기록하였노라. 주께서 고난을 당하신 후 자신이 살아계심을 그들에게 여러 가지 무오한 증거들로 보여 주시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느니라. 또 사도들과 함께 모이셨을 때에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야 한다고 명하셨으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너희가 내게서 들은 바니라. 요한은 정녕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하시더라.』

『오 데오빌로여... 첫 번째 글에서...』(1절)

이 표현은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썼던 “첫 번째(former) 글”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더군다나 누가는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 끝까지 바울과 함께 있었으며(딤후4:11), 사도행전의 기록자는 바울과 함께 배에도 승선했었다(행27:2-4).

『...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1절).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은 누가복음에 있다. 이 진술은 미래의 행함과 가르침을 암시한다. 뒤이어 나오는 것(행1:2-5 참고)은 말씀을 확증해 준다. 주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신 후에도 ‘행하시고’ ‘가르치시기’를 계속하셨다.
『주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계명을 주신...』(2절).

이 계명들은 요한복음 5:12과 요한일서 2:3처럼 부가적인 계명들이다. 이것들은 안식교도들, 음행하는 자들, 유괴하는 자들, 거짓말쟁이들이(딤전1:10 참고) 오늘날에도 교리로 붙잡고 있는 “십”계명을 한 차원 넘어서는 계명들이다. 더구나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나라’(3절)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도덕적 의의 영적 상태(롬14:17)를 나타낸다. 이 왕국은 천국과 같지 않지만(The Sure Word of Prophecy 참고) 이 두 왕국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지상에 임하였다. 물리적이고 영적인 왕국이 창세기 18:1-2과 누가복음 24:12-49에 임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눈에 보이고 물리적인 유대 신정국가의 회복과 더불어(눅1:30-33)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게’(눅19:11) 될 때인 천년왕국의 전조이다. 로마서 14:17에 언급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몸(엡3:1-6)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도행전 9장 이후까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형성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사도행전 1:3의 하나님의 나라는 천년왕국에 적용되어야 한다.
『... 자신이 살아계심을 그들에게 여러가지 무오한 증거들로 보여 주시고...』(3절).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들이 “무오”하다는 진술이 나온다. 이 “무오한”이라는 단어는 어떤 대학에서도 결코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다. 아직까지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카톨릭뿐이지만, 그들은 성경 대신 로마 카톨릭 교회 혹은 교황에게 그 단어를 사용한다.
‘무오한’이라는 말은 ‘어떤 오류도 없음’을 뜻한다. 오늘날 근본주의자들은 권위역본인 <킹 제임스 성경>을 공격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원본”,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말씀”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의 모든 파괴적인 허튼 소리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믿음의 근본사항”에 대해 말할 때 여전히 오만한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근본 사항 중에서도 근본적인 것 중의 하나인 몸의 부활에 대한 “많은 무오한 증거들”을 정작 그러한 학자들이 변개시켰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지지한다고 자부하는 학자들이 어떻게 “무오한”이라는 단어를 변개시켰는지 살펴보자.

1. 새미국표준역본(NASV) - “많은 확실한(convincing) 증거들”.
2. 무디성경연구원들과 웨스트 박사(Wuest) - “의심의 여지 없는 많은 증거들”. 이 단어는 “무오한”이라는 단어에 비해 얼마나 복잡한 용어인가?
3. 캔터키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 신학교와 지금까지 미국이 배출해 낸 가장 위대한 헬라어 학자라고 하는 로버트슨(Robertson) - “많은 증거들”.
4. 제미에슨, 퍼셋, 브라운(래드 박사를 포함해서) 등의 학자들은 모두 이 부분에 대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5. F.F.브루스 - “많은 증거들”
6. 카터, 얼 - “많은 증거들”

<영어 개역본, RV>에도 “...증거들”로 되어 있다. 신실하고 경건한 학자들이 몸의 부활에 대한 근본적 진리에 관한 자세가 것이 이와 같은데,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NCC의 자유주의자들은 어떠할까? RSV와 <공동성서, Common Bible>는 루이스빌 신학교의 A.T.로버트슨 박사와 마찬가지로 “많은 증거들”이라고 말한다. 과 도 모두 본문을 변개시켰다.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을 믿는 근본주의자나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자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무오한 증거’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테크메리온’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리시아스는 어떤 것의 확실하고 분명하고 실증적인 증거를 말할 때 그 단어를 사용했다. ‘무오한’이라는 단어를 반대하는 자들은 1560년 제네바 성경을 거부했던 프로테스탄트들과 카톨릭뿐이다. 1582년의 공식적인 로마 카톨릭 성경(예수회의 <림즈 성경>)에는 “많은 논쟁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 절에 대한 모든 연막과 대기 오염은 독자가 정신을 반쯤만 차려도 깨끗이 사라진다. 본문에 언급된 분의 영광을 위해 헌신된 사람이라면 모든 본문의 문제점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1. 거짓말이나 망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확신”(convinced, NASV)할 수는 있다.
2. “많은 증거들”도 여전히 거짓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진화론 같은 경우이다.
3. 많은 변호사들이 해왔던 것처럼,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되고서도 여전히 실수일 수 있다.
4. 어떤 것이 “제시되어”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틀릴 수가 있다.

그러나 “무오한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의 부활을 증거하는 500명의 증인들이 있고(고전5:6) 그 중 11명은 사십 일 동안이나 그 사람과 살면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눅24:38-44) 그를 손으로 만졌다면(요일1:1) 어떻게 하겠는가!

부활을 믿는 우리는 부할의 증거들이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 현재나 혹은 후에라도 - 반박할 수 없는 “무오한 증거들”임을 알고 있다. 이것을 믿는다면 왜 <킹 제임스 성경>의 본문에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가? (“무오한 증거들”은 “테크메리온”의 정확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증거들”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단순히 “독심”이기 때문이다.)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수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느니라』(3절).

<복음주의 주석>(존더반, 1959, p.5)은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와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1:1에서부터 계시록 22:21까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물질이 영원히 존속한다고 믿기 때문에 양자를 혼동하는 것이다. 하늘들은 물리적이고 눈에 보이는 영역이다. 하늘(heaven)은 육안과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문자적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 지역이다.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너희가 내게서 들은 바니라』(4절).

오순절 사건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오순절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오순절에 받은 “아버지의 약속”은 다음과 같다.

1. “침례”(5절)
2. “능력”의 부여(8절)
3. 성령“충만”(행2:4)
4. “유기체”의 시작(요17:21,23)
5. 한 “세대”의 시작(요14:16; 16:13)

오순절파는 1,2,5를 믿는다. 침례교는 1,2,4,5를 허용한다. 스템과 벌링거는 1,2,3만을 취한다. 스코필드는 1,3,4,5를 취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좋을 대로 취할 수 있다(여기는 자유국가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휘사전이나 단 하나의 헬라어 단어나 필사본에 의존하지 않고서 이 다섯 가지 모두를 믿는다. “원본”이 풀지 못하는 많은 문제점들을 믿음이 풀어준다.

『아버지의 약속』(4절)
이 약속은 누가복음 24:49에 있으며 그것이 성취되는 날짜는 다윗이 솔로몬을 낳기 전으로 되어 있다(레 23장). “약속”은 성령께서 “머리 위에”(overhead)라는 의미로 제자들(행1:8) “위”(upon)에(눅24:49) 오시는 것이다. 이것은 물 속에 잠기는 것과 일치하며, 결론적으로 그 행동이 침례인 요한의 행동에(마3:11 주석 참고) 비교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할 때 똑같은 것을 경험한다(눅1:35). 바울이 말한 “한 침례”(엡4:5)는 “성령침례”일 뿐만 아니라 (스템, 베이커, 벌링거, 오 헤어가 말한 대로 ‘두세 개’의 침례가) 아닌 “하나의” 침례이다. 고린도전서 12:13을 믿는다면, 바울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은 침례가 고린도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넣는 침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서 16:7의 바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이 “한 침례”가 사도행전 9:1-6 전에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사도행전 9장 이후에 시작되었다면 (혹 사도행전 29장 이후에) 3개의 침례가 있게 된다. 하나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위한 침례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을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13장 이후의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당혹스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스템과 베이커는 (웬트, 샤프, 라잇풋, 엘리코트 등과 같이) 헬라어로 달려가서 “-에 의해서”(by)와 “-으로”(with)가 같은 침례가 아님을 증명코자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비평할 것이다.)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5절).

어떻게 해서 누가는 마태복음 3:11의 “불”을 잊어버렸는가?(『그 분은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어떻게 해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11:16에서 그것을 다시 잊어버렸는가? (조 스네스와 모로니 주석, 행2:27을 참조)
누가와 베드로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우리의 오순절 친구들이 마태복음 3:11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거기서 “불”은 말라키 4:1,3과 데살로니가후서 1:8,9과 연결되는데, 이 두 문맥 모두 재림 때 죄인들의 멸망을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성령과 불침례”를 받고자 기도해 왔다면 앞의 것에 만족하고, 두번째 것을 경험하기 전에 두번째 탄원은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도행전 2:3은 분명히 “불같은 모양”이지 “불”은 아니다.) - 다음 호에 계속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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