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요한복음 주석 분류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6월호>

서론 요한복음, 1: 1-15


사복음서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 기록되었다. 사복음서의 차이점을 이해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으심, 부활, 승천에 관한 사실을 한 명의 저자에게만 기록하게 하실 수도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특별한 의도를 갖고 네 개의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다.
마태는 주 예수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위의 계승자, 유대인의 왕이신 메시야(그리스도)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주의 종, 하나님의 온전한 일꾼으로 묘사되며, 그분의 사역의 특징과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는 구세주의 인성을 주로 다루고 있으며, 그분을 죄 많은 인간과 대조되는 완전한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에 내려오신 거룩하신 분,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들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와 여러 가지 면에서 구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복음서 중 마태, 마가, 누가복음만 따로 묶어서 공관복음이라 칭하는데, 이것은 “함께 본다”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온 말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각기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지만, 유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조명한다.

요한복음의 특징

앞의 세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을 우선적으로 기록한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러한 사건들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네 복음서가 모두 5,000명을 먹이신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복음만이 “생명의 빵”에 대한 위대한 설교를 통해 이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앞의 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관계에서 고려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렇지 않다(요 8:58; 10:30; 14:9). 또한 앞의 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과의 깊은 관련을 보여 주고 있으며, 메시야의 왕국을 선포하다가 그 백성이 거부하자 중지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거부당하고 있다(요 1:11). 이 외에도 요한복음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쓴 다른 서신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으며,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인자’의 다시 오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 복음서에만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의 “위로자”(14:16)로 칭해지셨다는 사실과, 믿는 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성령님에 대해 읽을 수 있다(14:16).

요한복음의 주제

요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이 책에 나타나는 표적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한다(마태복음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증거한다). 이 표적들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진 것이며,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통하여 생명을 받게 하는 것이다(요 20:31). 기적의 형태로 나타나는 표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며, 또한 이러한 표적들은 그리스도께서 설교를 하시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전체적인 불신앙 가운데서도 우리는 제자들과, 니코데모, 사마리아 여인, 귀족과 그의 가족, 38년 된 병자, 소경 등 그리스도를 믿는 소수의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오늘날에도 전개되고 있다. “형식적인 기독교” 전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지만,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며 증거하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미래의 대환란 때 소수의 남은 자들의 모형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이름 “I AM”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는 ...이다”(I AM)라는 말로 표현하신 것이 여러 번 반복된다. 나는 “생명의 빵”(6:35,41,48,51), “세상의 빛”(8:12; 9:5), “양의 문”(10:7,9), “선한 목자”(10:11,14), “부활이요 생명”(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참 포도나무”(15:1,5)이다 라는 말을 계속 듣게 된다. 이러한 이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는 ...이다”(I AM)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출 3:14참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는 ...이다”(I am)로 표현하신 다른 경우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4:26; 8:28,58; 13:19; 18:5,6,8).

제1장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요 1:1-2).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태초로 되돌아가게 하며, 주 예수님께서 시작이 없으신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요한은 창세기의 사건에서 놀라운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1:1의 ‘시작’은 1:3의 ‘만물’을 지음에 선행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창조의 시작이요, 시간의 시작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을 뿐만 아니라 ‘태초에’ 계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2:13; 1:8,11; 2:8). 󰡔영원부터, 태초부터, 땅이 있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느니라󰡕(잠 8:23).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미 5:2). 󰡔이제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갖고 있던 그 영광으로, 친히 나를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요 17:5).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시므로 주 예수의 절대적인 신성은 확고하게 세워지게 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한 것은 주님의 독자적인 인격성을 말한 것이다. 만일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라고 하였으면 성령은 제외되는 것이다.
그분은 처음부터 말씀이셨고(1:1-2), 초림 때도 말씀이시고(1:14), 지금도 말씀이시고(요일 5:7,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 다시 오실 때도 그분의 이름은 말씀이시다(계 19:13). 사람의 말이 그의 생각과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보여주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 그 말씀은 또한 하나님이시다(사 9:6, 히 1:8, 요일 5:20).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요 1:3).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창 1장, 벧후 3:5), 본문은 이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엡 3:9)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들 가운데 이 “창조”만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도 드물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곳은 요한복음 1장, 골로새서 1장, 히브리서 1장으로 이 세 군데 모두 예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요 1:3, 골 1:16, 히 1:2).

세상의 빛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생명’은 주 예수를 칭하는 거룩한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는 빛을 만드신 것이었는데, 이는 생명이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일컬어졌다. 3절에서는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 불려졌다. 4절에서는 ‘생명’으로, 그리고 이제 5절에서는 ‘빛’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요한일서 1:5과 어울린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빛으로 칭하셨다(요 8:12; 9:5; 12:36,46).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오신다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바 있다. 󰡔...내가 또한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니, 네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되리라󰡕(사 49: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인으로 왔으니, 빛에 관하여 증거하려 함이며,모든 사람이 그를 통하여 믿게 하려 함이더라. 그 사람은 그 빛이 아니었고, 그 빛에 관하여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더라󰡕(요 1:6-8).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며, ‘빛’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해 왔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요한을 보내셨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빛’은 눈을 뜨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임에도, 요한은 소경들에게 ‘빛’에 대해 증거해야 했던 것이다.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참 빛이 있었으니,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더라󰡕(요 1:9-10).
요한은 그 빛이 아니라, 잠시 “불타며 빛나는 빛”이었다(요 5:35). 예수님은 바로 “참 빛”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참 빛이시며, 모든 빛의 근원인 원래의 빛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빛(하나님, 영원한 생명)과 어두움(사탄, 영원한 죽음)간의 투쟁을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 4:3-6은 구원을 죄인의 어두운 마음에 빛이 비치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33년 간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다.

거부당한 메시야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 1:11-13).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려 온 백성이 그 메시야가 왔을 때 거부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요 3:19). “자기 백성”은 분명히 유대인을 말한다(마 1:21, 눅 1:68).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유대인)에게 거부당하셨던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 곧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바에 대해 말해 준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을 통하여, 즉 ‘그 이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주어진다. 구원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할 때에 받게 되는 값없는 선물이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같은 일이다.
본문은 또한 하나님의 측면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의 측면은 “새로운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 일어나는 것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유전의 문제가 아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1:14)라는 말씀의 명백한 의미는 거룩한 구주께서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다는 것이다(딤전 3:16, 경건의 신비).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라는 표현은 단지 외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신 분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지칭하는 독특한 용어이다(요 1:18; 3:16,18, 요일 4:9).

광야의 성막 - 초림, 솔로몬의 성전 - 재림

베들레헴에서 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말씀이셨다.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단어는 “성막”과 동일한 단어이다. 성막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며, 성육신하시는 아들 하나님을 예표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장소였던 광야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막은 초림 때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솔로몬의 성전은 재림 때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초림 때의 예수님처럼 광야의 성막은 외견상으로는 초라하고 남루하며 시선을 끌 만한 것이 못되었으며, 주님의 거룩한 위엄은 성막의 휘장 안 지성소에 감추어져 있었다. 성막은 선지자 모세에 의해 세워졌으며(그것은 초림 때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직분이었다), 광야에서 사용되어졌다(초림 때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말한다). 또한 성막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숫자는 다섯이었는데, 다섯은 죽음을 말하며, 죽음은 예수님께서 초림하신 목적이기도 했다.
반대로 솔로몬의 성전은 외적인 웅장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이 성전은 “위대한 왕의 도성”(마 5:35)인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 이는 재림 때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이 계실 장소를 암시한다. 또한 성전에서의 주도적인 숫자는 통치를 나타내는 열 둘이다. 재림 때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초림과 재림에서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거하는 것”, 즉 장막절과 관련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막에서 하나님께서는 속죄소 위에 보좌를 정하셨으며, 그 증거로 ‘구름’으로 불려진 ‘주의 영광’이 나타났다(출 40:34). 열왕기상 8:10-11에서 ‘구름’과 ‘영광’은 분명히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 때 주의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뚜렷한 징표였다(겔 11:23).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는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해내신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다시 나타나셨다는 증거였다.
14절은 사실상 1절에 대한 해설이자 부연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태초에 계셨던 그분께서 인간 생활을 시작하셨음을 말한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분께서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한다.

󰡔요한이 그에 관하여 증거하며 외쳐 말하기를 “이분이 내가 말한 그분이라. 내 뒤에 오시는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고 하니라󰡕(요 1:15).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먼저 계셨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분의 영원한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곧 그분의 신성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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