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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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을 헛되이 반복하는 이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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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5월호>

“불순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행하지 않는 것”과 “행하지 말라고 금지하신 명령”을 제멋대로 어기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행하라고 시키시지도 않은 것”을 임의로 행하다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본래 뜻과 전체 사역을 “그르치는 것” 역시 “불순종”이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 왕”을 원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삼상 8:4-9) 보좌에 오른 “불법적인 왕” 사울이 “통치 초기,” 곧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지 2년여 만에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온전히 행하지 않았으면서도 주님께서 명령하시지도 않은 것은 제멋대로 행하여 일을 그르침으로써 “불순종의 죄”를 범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유 불문하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주께서 번제와 희생제를 주의 음성에 복종하는 것만큼 크게 기뻐하시나이까?』(삼상 15:22 a) 이것은 사울이 지니고 있던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보소서, 복종하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경청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나이다』(삼상 15:22 b). 사울은 사무엘상 13장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운 “믹마스 전투”에서도 조급한 마음에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임의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기에 급급했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는 것”보다 “번제와 희생제를 드리는 일”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마땅히 따라야 할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을 두려워하기보다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을 더 의식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백성이 불안해 하여,) 토굴과 가시나무 숲과 바위와 요새와 구덩이에 숨었으며, 또 히브리인 중 얼마는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갔더라. 그러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었고, 모든 백성은 떨면서 그를 따르더라. 그가 사무엘이 정해 준 때를 따라 칠 일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않자 백성이 그로부터 흩어지더라』(6-8절). 사울은 이런 백성들의 모습을 의식했고, 결국 번제를 드리고 말았다(9,10절).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신뢰하면서 주님께 기도하고 인내로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을 이렇게 책망했다. 『왕이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왕이 주 왕의 하나님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리하였더라면 주께서 이제 이스라엘 위에 왕의 왕국을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니이다』(13절).

“아말렉인들과의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그의 고질적인 문제는 또다시 드러나고 말았는데, 하나님보다 백성들을 더 두려워한 사울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만 급급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데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정녕 내가 주의 음성에 복종하여 주께서 나를 보내신 길로 갔으며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인들을 완전히 멸하였나이다. 그러나 백성이 완전히 멸했어야만 했던 탈취물 중에서 주 당신의 하나님께 길갈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양들과 소들을 취하였나이다.” 하더라』(삼상 15:20,2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었다. 굳이 명령하시지도 않은 일들을 사울이 애써 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욕심,” “자기 사랑,” “자기 과시” 때문이다. 백성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고 성경적으로 보이도록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할 성도들은 주님께서 “지시하신 것”만 잘하면 된다. 불필요하게 “지시하지도 않은 것”까지 하려다가 일을 그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시간 낭비”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가 된다.


오늘날 마지막 교회 시대의 “배교한 교회들”이 지닌 “문제의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다.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제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시키시지도 않은 것”만 골라 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는 것이다. 일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성도”에게만(행 8:37, 변개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에는 이 구절이 통째로 삭제되어 있음)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면(마 3:16, 행 8:39), 그 명령만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실행하면 되지, 왜 제멋대로 물 뿌리는 세례를 주고, 또 시키지도 않은 “유아 세례”까지 만들어 아기들에게 물을 뿌리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인가? 또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크리스마스, 사순절, 부활절 등의 “절기들”을 지키라고 지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탄생 날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신 적도 없고,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는데, 굳이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욱이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진짜 탄생일도 아니고, 바빌론의 태양신 생일이지 않은가? “부활절” 역시 이교도들의 절기인 “이스터”(Easter, 행 12:4)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주님께서는 부활절을 지키고 기념하라고 지시하신 적이 없다. “고난 주간”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금식하라는 명령을 주신 적도 없다. 또 언제 주님께서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하라고 하셨는가? 더군다나 “주기도문”은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교회의 휴거 이후 “환란 시대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또 언제 “사도신경”을 반복해서 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마 6:7)라고 경고하셨는데, 굳이 주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제멋대로 고집스럽게 “헛되이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라는 명령에 따르면,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헛되이 반복하는 자들은 명백한 “이단들”이며, 또 “이교도들”이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왜 이 나라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도 않은 것들을 굳이 만들어 내어 지키려 하는 것인가? “자기의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의”를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인간적인 의”를 가리켜 『더러운 걸레』(사 64:6) 같다고 말씀한다. 그런 “종교적인 의”를 과시하려는 자들은 “카인과 사울의 후예들”이다. 도대체 성경에도 없는 여자 목사, 여자 집사, 권사, 전도사, 강도사 등의 직분을 만들라고 명령한 자가 누구인가? “특별새벽집회”를 하라고 지시한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교단”을 만들라고 명령한 자는 또 누구인가? “기독당”을 만들어 정치에 관여하라고 지시한 자가 누구인가? 언제 하나님께서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 주라고 하셨는가? 언제 변태 성욕자들인 동성연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라고 명령하셨는가? 성경 어디에 그런 명령이 주어졌는가? “열린 예배,” “영화 예배,” “카페 예배”는 또 무엇인가? 극동방송의 “전파 선교사”는 또 무엇인가? 복음과 진리를 전파해야 “선교사”라는 명칭을 붙여 줄 수 있는 것인데, 돈을 후원해 준다는 것만으로 “선교사”라는 호칭을 붙여 준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돈으로 선교사라는 직분을 사고파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에 반해 성경침례교회에서 실행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 KBBS”는 극동방송처럼 돈을 구걸하지 않는다! 설령 후원금을 받았다 해서 그 사람을 “선교사”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방송 프로그램이나 채널 어디에도 후원할 수 있는 “은행 계좌”를 표시해 놓지도 않았다.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누구라도 언제든지 들어와서 성경적인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바른 성경과 진리의 지식으로 올바르게 성장하라는 취지에서 그렇게 했다.

복음과 진리를 전하라는 명령은 제대로 수행하지도 않으면서, 왜 굳이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것들을 만들어 쓸데없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것인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 땅의 8만여 개의 교회들이여, 이 명령이나 제대로 수행하라!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온 교회가 이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 성경침례교회의 모든 사역의 초점은 철저하게 이 명령에 맞춰져 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오히려 너희를 부르신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벧전 1: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2:15,16).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5).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여러분의 교회는 이러한 명령들에 철저하게 복종하고 있는가?


이런 명령들도 실행하지 않으면서 새벽부터 교회에 나가 1부 예배, 2부 예배, 3부, 4부, 5부, 6부, 7부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이런 기본적인 명령도 실행하지 않으면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하고, 야밤에 기도원으로 올라가고, 밥을 굶어 가며 고난 주간을 지키는 것인가? 그런 “사울” 같은 교회들과 교인들과 목사들을 향해 사무엘은 이렇게 꾸짖는다. 『주께서 번제와 희생제를 주의 음성에 복종하는 것만큼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복종하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경청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나이다. 이는 거역함은 마법하는 죄와 같고 완고함은 행악과 우상 숭배와 같음이니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거역하였기에, 주께서도 왕을 거절하여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마법하는 죄”와 같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완고함은 행악과 우상 숭배와 같다. “율법”에서 “마법하는 죄”를 저지른 자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알고 있는가?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부리는 영을 지니거나 마법사인 남자나 여자는 반드시 죽이되 돌로 그들을 칠지니,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으리라』(레 20:27).


이 땅의 “이단 감별사들”의 주장대로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가 이단이 아니라, 매주 그것을 쓸데없이 반복하는 교회들이 “이단”이다! 그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그런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헛된 반복”으로 시간을 때우려 한다. 그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요 4:23,24)를 드리지 않고, 개역성경에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도대체 “신령”은 무엇이고, “진정”은 또 무엇인가? “진정한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사도신경”을 암송하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아 주신단 말인가? 어림없는 소리다! 또한 그들은 기도도 할 줄 모르기에 “주기도문”을 헛되이 반복하는 것인데, 이는 구원받지 않은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리라 생각』(마 6:7)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을 헛되이 반복하는 것은 일종의 “주문”(呪文)이며, “말 못하는 아기들의 옹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틴데일성경>의 번역자 “윌리엄 틴데일”은 로마카톨릭의 “묵주 기도” 따위를 “옹알이하는 것”이라고 빈정대며 조소했다.

1. “사도신경”은 “열두 사도”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4세기경에 활동한 “루피누스 티란니우스”(Rufinus Tyrannius, 345-410)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전 세계로 흩어져 복음을 전해야 할 열두 사도들이 서로 떨어져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관계로, 서로 다른 교리를 전할 위험성을 막기 위해 성령의 영감으로 각각 한 사람씩 하나의 조항을 말한 것을 모은 것이 사도신경이다.”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사도신경이 12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추한 단순한 추측일 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거짓말”이다.

2. “사도신경”은 “로마카톨릭 신조”로서, 로마카톨릭이 자신들의 신조에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여러 교회들에 확산시키기 위한 술책으로 꾸며 낸 명칭이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성경을 거부하는 창녀, 곧 로마카톨릭 ‘정신의 산물’이자 ‘생산품’이다.” 한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변화 없이 입술로만 고백할 수 있게 만든 “신조”나 “교리 문답서” 따위를 만들지 않았고, 또 그런 것들을 만들어 달달 외우게 하고 예배 때마다 반복하게 함으로써 교회 회원이 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 짓을 하여 “거짓 신자들”을 “가짜 교회”로 유입시킨 집단은 로마카톨릭인데, 이들은 소위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고백”을 외워서 답변하거나 앵무새처럼 따라서 말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자기들 교회의 일원이 되게 했다. 개신교회들 역시 그런 방식을 따르고 있다.

3. “사도신경”은 전혀 “사도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 우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에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성경적 진리”(행 2:27 -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를 전혀 믿지 못하는 이 나라 무지한 교회들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를 그들의 사도신경에서 삭제해 버렸다. 두 번째, 「거룩한 공회[Catholic Church]」에서 보듯이, 사도신경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에』(계 17:6) 취한 살인자 집단이자 가짜 교회인 로마카톨릭을 “거룩하다”고 지칭하고 있고, 또 로마카톨릭만을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 제811항에서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로마카톨릭]로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이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유일한 교회임을 고백한다.」라고 되어 있다. 세 번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도 심각한 누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죽은 성도들과의 교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 제1689항에서는 「교회는 성체를 통해 죽은 자와의 효과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라고 되어 있다.

왜 굳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계 18:2)인 로마카톨릭을 따라 비성경적인 “사도신경”을 헛되이 반복하는 “이단”이 되려 하는 것인가? 성경은 “지상 최대의 이단 그룹”인 로마카톨릭, 곧 창녀의 치마폭에서 지금 당장 나오라고 경고하신다.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도 받지 말라』(계 18: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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