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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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성별의 표본 프랭크 노리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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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7월호>

성경적 성별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적 성별>의 저자 “어네스트 피커링”이 잘 말했듯이, 성별은 “거룩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참된 신약 교회사는 “순수한 교회를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순수한 교리와 실행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이로 인해 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특히 “교리적인 성별”을 지키기 위해 순교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피 흘린 발자취”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랭크 노리스 목사는 하나님과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항상 정면으로 맞섰고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죽고 나면 묘비에 이렇게 새겨 주십시오. ‘싸움의 날에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어떤 대적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한 남자가 여기에 잠들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성경적인 진리를 수호하다가 마귀의 공격들을 수십 차례 받았다. 성경에서도 이미 말씀하고 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딤후 3:12) 받는 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해를 받을 때 물러서지도, 낙심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데, 박해가 왔다고 해서 주춤하거나 머뭇거리고, 특히 타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더 담대하고 용기 있게 선으로 악을, 진리의 말씀으로 적의 공격을 맞받아쳐야 한다.

노리스 목사는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자신을 이렇게 변호했다. “각 교파의 ‘하만’ 같은 자들이 비성경적인 것들을 요구하며 나섰을 때 내가 그들에게 굴복했다면, 아무런 말썽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수들 일곱 명을 사퇴시키기 위해 베일러대학교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말썽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내가 여기저기 얻어맞고 발길질당하면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기만 했다면, 나를 향한 수많은 악의 어린 비방들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들의 공격을 되받아쳤고, 더욱이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사과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프랭크 노리스 목사를 “박해하고 공격한 사례들”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남침례교총회”에서 노리스 목사를 파문했고, 다음 세 가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가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제일침례교회”를 제적했다. 첫째, 베일러대학교 안에서 진화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둘째, 7,500만 달러를 모금하는 운동에 20만 달러를 기부하지 않았으며, 셋째, 총회에서 사용하는 주일학교 교재를 쓰지 않고 “케케묵은” 영어 <킹제임스성경>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과 그에 편승한 배교한 교회들은 “바른 성경과 진리를 지키는 일”을 범죄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범죄라고 경고하신다.

한편 저속한 책들을 출간하는 출판사들, 주류업체들, 유대교 랍비들, 로마카톨릭 콜럼버스 기사단, 남침례교신학원 교수들 등이 그를 반대하고 공격했다. 퍼시픽코스트침례성경신학교는 <킹제임스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믿는 침례교회 소속 학생들의 입학을 전면 금지했고, 또 그렇게 믿는 교회들과 연계된 기독교 학교들에는 교사들을 부임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마귀 짓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에 노리스 목사는 B.H. 캐롤 목사와 협력하여 1939년에 “성경침례신학원”을 세워 오직 <킹제임스성경>만을 가르쳤다. 또한 노리스 목사를 비방하는 문건들도 많이 나돌았는데, 이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대적들은 내가 사역하는 방식들을 공격했고, 나의 설교들에 반대했으며, 나를 향해 인기를 노리는 자라고 비난했다. 나를 선동가이자, 평화의 교란자로 불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트워스의 “반(反)노리스파들”은 “총잡이” 한 명을 고용하여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노리스 목사를 쏘게 했고, 또 교회를 불태우게 하고는 “노리스 목사의 소행”이라고 고소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순전히 “보험금”을 타 먹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를 향한 음모와 암살 계획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특히 두 번의 “저격 사건”이 더 일어났으니, 한 번은 “동행했던 성도”의 도움으로, 다른 한 번은 “정당방위”로 살아남았다. 이 중 후자의 경우는 실제로 살해 위협을 느낀 노리스 목사가 제대로 맞대응한 “정당방위”였다. 당시 포트워스의 “메참” 시장을 “진리의 말씀”으로 비평한 노리스 목사에게 앙심을 품은 “칩스”(시장의 친구)가 불쑥 사무실을 찾아와 그에게 시비를 걸었는데, 그 친구가 문을 나가면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고, 이 “불미스러운 행동”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노리스 목사는 권총으로 대응 사격했다. 결국 칩스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며, 이로 인해 살인죄로 기소된 노리스 목사는 텍사스주 오스틴의 한 법정에서 전국적으로 보도되는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첫 공판에서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고, 노리스 목사는 무죄 방면되었다. 사건 정황상 그가 칩스에게 총을 쏜 것은 전혀 계획된 것이 아니었고, 악의도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노리스 목사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위축되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쉽게 낙심하거나 좌절했을 것이다. 노리스 목사가 그렇게 주저앉았다면 “사탄의 종들”만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어떤 “상황” 또는 마귀들이 위협하기 위해 조장하는 어떤 “분위기” 자체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를 가지려면 죄와 거짓 교리로부터 성별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귀의 정죄”를 피할 방법이 없고, “성별을 위한 용기”를 낼 수도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어떤 공격에도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는 강하고 용기 있는 일꾼들을 원하신다. 성별을 위한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요, “거룩한 전쟁”(Holy War)임을 다시 한 번 유념하길 바란다!

한편 주님께서는 노리스 목사를 공격한 대적들을 가만두지 않으시고 “의로우신 심판”으로 그들에게 갚아 주셨는데(살후 1:5-8), 이것은 노리스 목사의 믿음과 실행이 지극히 성경적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일례로 술 판매의 핵심 인물이었던 어떤 지방 검사는 사건을 조작하여 노리스 목사를 거짓으로 기소했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했고, 포트워스의 한 갑부는 법정에서 노리스 목사에 대해 거짓으로 증언했던 날, 철로 근처를 걸어오다가 화물 열차에 치어 즉사했다. 노리스 목사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쓰겠노라고 호언장담했던 한 은행장은 완전히 파산했으며, 어떤 은행가는 노리스 목사를 향한 음모에 가담했다가 부도가 나서 결국 권총으로 자살했다. 또 다른 은행장은 주류 제조업자들과 판매 회사들로부터 거금을 모아 노리스 목사를 음해하려 했는데, 그 사람 역시 부도가 나는 바람에 사냥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서 자살했고, 포트워스의 한 유력 인사는 노리스 목사를 음해하려다가 파산한 뒤 자살했다. 또한 포트워스 시장은 3천 명의 시민이 모인 자리에서 “포트워스에서 ‘붉은 피’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다면, 해가 지기 전에 노리스 목사를 전봇대에 목매달아야 한다.”며 노리스를 비방하는 연설을 했는데, 결국 그는 “시장직”에서 쫓겨났고 다음 날 밤 교회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 노리스 목사의 기소를 조작했던 어떤 변호사는 평생을 술주정뱅이로 살았고, 그 기소를 집행하러 왔던 보안관 대리는 열차 충돌 사고로 즉사했다. 한번은 노리스 목사를 포트워스시에서 추방시키자는 결의를 모으고자 156명의 사람들이 한 호텔에 모인 적도 있었는데, 그 회의의 주모자는 6일 후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로 죽고 말았다.

프랭크 노리스 목사는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설교하는 대로 살았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실패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헌신하지 않고, 성경대로 섬기지도 않는다. 지식은 있는데, 좀처럼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성별의 중요성은 알아도 실제로는 성별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고 설교하고 실행했던 노리스 목사는 “직설적인 설교”로 유명하다. 직설적으로 설교했다는 말은, 오직 성경대로 판단하고, 성경대로 책망하고, 성경대로 권면했다는 의미이다.

노리스 목사는 “도박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한번은 은행원이었던 한 청년이 경마에 손을 댔다가 많은 돈을 잃고 공금 횡령까지 저질러서 감옥에 가야 할 신세가 되었는데, “감옥에 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그가 자살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그의 어머니가 노리스 목사에게 보내온 적이 있었다. 이에 노리스 목사는 신문 전면에 “댈러스 노름박람회에서 벌이는 경마는 지옥이다!”라는 글로 그 사실을 폭로했다. 그 결과 경마를 중지하는 법안이 발의되었고, 이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이 경마 도박을 지속시키려고 끝까지 발악하며 노리스 목사를 공격했지만, 결국 이 싸움은 “댈러스의 도박”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노리스 목사는 “술과의 전쟁”도 선포했다. 이에 술장수들과 술 제조업자들, 이들에게 투자하는 은행장들과 자본가들이 투표를 통해 노리스 목사에게 30일 안에 포트워스를 떠나라고 협박했지만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여러분은 성별을 위해 어떤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그 싸움은 “교리적인 성별”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도덕적인 성별”을 위한 것인가? 어떤 형태로든지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은 성별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한편 노리스 목사는 자유주의에 물들어 버린 기독교 대학 및 신학교들을 향해 이렇게 비평했다. “기계 또는 톱니바퀴 같은 신학교들을 조립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이다. 이 기계들 안에는 너무 많은 ‘비성경적인 프로그램들’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리스 목사의 설교는 “샘 존스”나 “빌리 선데이”처럼 매우 솔직하고 무뚝뚝하고 거칠었다. 너무 강렬해서 강단에서 고함치기 일쑤였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청중들의 감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심지어 “원숭이”를 강단 위로 데리고 와서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인 자들의 친척이라고 회중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텍사스주의 한 유명한 “자유주의 목사”를 향해서는 “귀가 축 처지고 날계란이나 빨아먹는 사냥개”라고 꾸짖었다. 또한 로마카톨릭과 공산주의를 강력하게 규탄했고, 전 생애에 걸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폐해를 성경적으로 비평했다.

1935년 1월, 노리스 목사는 템플침례교회에서 고린도후서 6:14-18을 본문으로 “성별”을 강조하며 이렇게 설교했다. “배가 물 위에 있는 것은 괜찮지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면 당신은 반드시 ‘배’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 거하고 있다 해도, 절대로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에 노리스 목사는 남침례교총회로부터 분리하여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들이 총회가 지고 있는 빚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지역 교회의 자치권”을 묵살했고, 또 “자유주의”에 의해 노략질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총회는 빚을 갚고 다양한 사역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소위 “7,500만 달러 모금 운동”을 벌였고 이를 위해 각 지역 교회에 일정 금액을 내라고 강요했는데, 노리스 목사는 그러한 캠페인이 지역 교회의 자치적인 운영을 간섭하는 “독재적이고 비성경적인 운동”이라고 비평하면서 교회에 할당된 20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다. 특히 그 자금이 자유주의를 가르치는 베일러대학교로 흘러 들어가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남침례교총회가 자유주의 성향의 북침례교총회와 연합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혹평했다. 또한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치는 베일러대학교의 “조셉 도슨” 교수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 사람은 어느 침례교회의 목사이자 <뱁티스트 스탠다드>의 편집장으로서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을 부인하는 자였다.

한편 어떤 형태로든지 “분열”을 원치 않았던 목사들 대부분은 노리스 목사의 이런 태도에 대해 “고집불통에 독단적이고 극단적인 태도”라고 비난했다. 사실 이런 비난은 “성별”에 관한 논쟁이 대두될 때마다 불거지는 현상이다. 남침례교총회 안에 자유주의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그대로 남아 개혁 아닌 개혁을 추구하려 했던 그들은 “평화와 연합, 교단 간 연대, 사랑과 이해”를 “순수한 복음, 성경적 교리, 진리를 향한 충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노리스 목사같이 성경적 성별을 외치는 사람들을 “연합을 파괴하는 범죄자”로 낙인찍어 버렸다. 하지만 “찰스 스펄전”이 이런 문제들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 준 적이 있는데, 한때 그는 영국의 침례교연합이 현대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변질되어 가고, 심지어 성경의 영감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왜곡되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탈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성경적으로 전수된 믿음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 버린 자들과 어디까지 교제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이제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이 없어서는 안 되겠고, 또한 분열은 무거운 죄악이기에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진리에서 떠난 자들과 어디까지 연합해야 한단 말입니까? 치명적인 과오임을 뻔히 알면서도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프랭크 노리스 목사는 신실한 사역을 통해 “제일침례교회”를 1909년 1,200명에서 1928년에는 12,000명으로 성장시켰고, “템플침례교회”는 1934년 800명에서 1943년에는 8,597명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1946년에는 두 교회의 회원 모두 합해서 25,000명으로 성장했다. 그가 남침례교총회로부터 성별한 이후에 조직한 “전천년 근본주의 선교사 친교회” 안에는 약 3,000개의 교회들이 등록되어 있었다. 그는 교회가 두 번이나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계속 교회를 강성하게 세워 나갔다. “루이스 엔쯔밍거”와의 협력 사역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사용했던 주일학교 교재는 오직 “성경”이었다. 27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그의 설교를 미국 전역에 방송했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1924년 휴스턴의 한 집회에서는 2천 명의 죄인들이 구원받아 교회 안에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노리스 목사는 1939년에 교회 안에서 16명의 학생들과 한 명의 교수로 “성경침례신학원”을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성장하더니 통신 과정 3,500명을 포함하여 모두 5,500명의 학생이 등록해서 공부한 적도 있다.

세계 지도자들의 친구요, 연민이 많은 신실한 구령자이자, 성경 주석가인 노리스 목사는 1952년 8월 20일에 플로리다주 키스턴에서 사망했고, 나흘 뒤인 24일 토요일에는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묻혔다. 노리스 목사를 암살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큰 두 개의 교회를 세운 이후 1952년에 플로리다주에서 “자연사”했던 것이다. 소위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로 자처하면서 성경을 거부하고 성경을 뜯어고치며 성경을 증오하는 배교한 미국을 위해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 사람은 용기 있게 성경적으로 성별할 줄 아는 프랭크 노리스 목사 같은 사람이었다. 이렇듯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한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항상 성별된 위치에서 성별된 자세로 올바른 믿음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 3:2,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