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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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쉬운 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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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5월호>

여기에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할”(딤후 2:15) 줄 모르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쉽게 풀지 못하는 “난제”가 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게 되었다면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3). 『오 허황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그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 2:20,21) 이 나라에서 두 본문 간에 나타나는 “차이”가 “모순”이 아니라고 성경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목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사실 이 나라에는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것은 물론 “거듭나지도” 않은 목사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거듭났는지”에 관한 “구원 간증”조차 할 줄 모른다. 한번은 광화문역 근처에서 구령을 하다가 두 명의 중년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중 한 명에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자,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침묵을 지켰고, 옆에 있던 사람이 대신해서 “아, 이분은 목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입을 다물고 있던 그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구원받았습니까?” 그러자 또다시 옆에 있던 사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이분은 목사라니까요!” 질문을 받은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부릅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던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구원받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자 또다시 옆에 있던 사람이 “그냥 갑시다!”라고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 사람은 보다 더 크게 눈을 부릅뜨면서 나를 한 대 칠 기세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때 대신 말해 주던 사람이 말리더니 “그냥 갑시다!”라고 하면서 즉시 자리를 떠났다. 결국 “목사”라 불리던 그 남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끝까지 침묵했다. 무슨 어려운 질문을 했는가? 그것이 그렇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는가? “구원받았습니다!”라는 이 “한마디 말”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는가? 이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채 교회에만 왔다 갔다 하는 “종교적인 위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목사”라고 해서 무조건 거듭난 사람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지 않았으면서도 얼마든지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하셨을 때, 이 “거듭남”에 관한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것인가?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서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관원”이요(요 3:1), “이스라엘의 선생”인(요 3:10) “니코데모”였다. 스코틀랜드의 “토머스 찰머스” 박사는 거듭나지 않은 채 10년간 설교했고, “하슬람” 목사는 자신의 설교로 거듭났다. “머레이 맥체인”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거듭나지 않은 설교자가 죽은 죄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목사는 모두 가짜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후 13:5).

성경은 “7천 년간의 인류 역사”를 “일곱 개의 경륜”으로 구분하는데, 곧 “무죄 시대의 경륜”(B.C. 4004), “양심 시대의 경륜”(B.C. 4004-2348), “인간 정부 시대의 경륜”(B.C. 2348-1920), “약속(족장) 시대의 경륜”(B.C. 1920-1491), “율법 시대의 경륜”(B.C. 1491- A.D. 30), “교회 시대의 경륜”(A.D. 30-2022 ?), [과도기적인 경륜인 “환란 시대”(A.D. 2022 ? - 2029 ?)], “천년왕국 시대의 경륜”(A.D. 2029 ? - 3029 ?)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구원받는 방법”이 경륜마다 항상 똑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원 방법”을 성경적으로 올바로 나눌 줄 아는 목사라면 서두에 언급한 “난제”를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죄 시대의 경륜”[재창조(창 1장)에서 인류의 타락까지(창 3장)]에서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았다. 이것은 굳이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이 경륜에서는 “구원의 개념”이 무의미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죄를 가진” 불완전한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영적인 존재들”로 완벽하게 창조되었듯이, 최초의 인류는 “육체적인 존재들”로 완벽하게 창조되었다. 죄가 세상으로 들어온 것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고 타락했을 때였다(롬 5:12). 그러므로 “무죄 시대의 경륜” 안에서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필요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는데, 당시 최초의 인류에게는 한 가지 “금지 명령,” 곧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행위”에 근거하는 명령이었다. 말하자면 “무죄 시대의 경륜” 속에서는 구원의 개념이 불필요했다 해도, 그들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복과 생명을 계속 유지하면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이 금지 명령을 끝까지 지켜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 “구원”의 개념을 적용하면, 당시 그들의 구원은 “행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믿음”도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cf. 고후 5:7).

인류가 죄를 지어 타락한 이후로는 “양심 시대의 경륜”[타락에서(창 3장) 노아의 대홍수까지(창 8장)]을 시작으로 “인간 정부 시대의 경륜”[대홍수에서(창 8장) 바벨탑 사건 이후 아브라함의 등장까지(창 11장)]을 지나 “약속 시대의 경륜”[아브라함의 등장에서(창 11장) 출애굽 사건까지(출 12장)]까지 이어지는데, 이 “세 가지 경륜”의 경우 “왕국”의 관점으로 볼 때는 시대와 경륜이 구분되지만, “구원받는 방법”에 있어서는 관점이 서로 동일하다. 곧 인간 안에 있는 “양심”과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어떤 특정한 “빛과 명령” 속에서 “믿음과 행위”를 통해 구원받은 것이다. “양심”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생겨났는데, 이 양심에 심긴 하나님의 법이 행위의 옳고 그름과 심판의 기준 및 판단 근거가 되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대의 어떤 누군가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계속해서 “올바른 삶”을 살았을 경우 그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갚아 주셨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시고 다투고 진리에 복종하지 아니하며 불의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분개와 진노로 하시리라』(롬 2:7,8).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음과 동시에 그들의 “행위들”을 통해(히 11:4-22) 그들에게 올바른 종류의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약 2:21-24). 그래서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고 두려움으로 “행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써 자기 집안을 구원하고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히 11:7). “아브라함” 역시 “믿음을 통해” 의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창 15장),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창 22장)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었다(히 11:17).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그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믿음이 어떻게 그 행함과 더불어 작용하였으며,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음을 네가 보느냐?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는 성경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약 2:21-24).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된 것”(창 22장)은 그가 “씨의 번성”에 관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전가받은 의”(창 15장)가 온전케 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는 성경이 이루어졌고』(약 2:23).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의로 여겨진 것”(창 15:6)과 “의롭게 된 것”(약 2:21) 사이에는 무려 30여 년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씨의 번성에 관한 약속이 이삭 안에서 성취될 것을 믿고,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를 죽여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히 11:17-19), 아브라함은 그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었고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 이에 반해 “교회 시대의 경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그 믿음이 의로 여겨짐과 동시에 의롭게 된다.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것”과 “의롭게 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30여 년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이삭을 통한 씨의 번성”(창 15:5,6)이었고, 우리가 믿은 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고전 15:1-5)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더욱더 우리가 그를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리라』(롬 5:9). 바로 이 지점에서 “모순”처럼 보이던 “난제”가 쉽게 풀리게 된다!

이방인 창녀 “라합”이 구원받은 것도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방식과 유사하다. 『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다른 길로 그들을 보냈을 때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 2:24,25) 물론 라합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의로 여겨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 정탐꾼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보내 준 “행위”를 통해 그녀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믿음”이 표출되었고, 그 결과 의롭게 될 수 있었다. 어떤 믿음을 말하는가? 교회 시대에 구원받기 위해 가져야 할 그런 믿음인가? 아니다! 여호수아 2:11에서는 창녀 라합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주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심이라.』 다시 말해 라합은 『그분[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과 그분이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는 분이심을』(히 11:6) 믿었다. 바로 그 “믿음”이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약 2:26). 사실 “야고보서”는 “교회 시대의 경륜”에 해당하는 구원을 다루지 않고, 과도기적인 경륜인 “환란 시대의 경륜”에 해당하는 구원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는 그 서신의 수신자가 “로마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롬 1:1-7)이 아니라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 1:1), 곧 환란 시대에 “믿음과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율법 시대의 경륜”[출애굽에서(출 12장) 십자가 사건 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사건까지(행 2장)]에서는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았다. 그 이전 시대와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판단 기준의 차이”가 생겼다는 점이다. 우선 “유대인들”은 믿음과 행위의 기반이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민족에게만 특별하게 주신 구체적인 법령, 곧 “율법”에 있었다. 율법은 신정 통치 왕국인 이스라엘의 통치 기틀이 되는 법령임과 동시에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율례들이었다. 그 경륜에서는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해도 전체를 범한 것이 되었고(약 2:10),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수 있었기(갈 3:10)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 안에 “제사에 관한 법”을 제정해 두셔서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도 제시해 주셨으니, 곧 “동물의 피”를 통해 죄를 용서받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율법 시대의 경륜”에서 구원의 핵심은 “동물의 피를 통한 속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여전히 양심에 따른 믿음과 행위를 근거로 심판을 받았다(롬 2:14-16).

이후 우리가 속해 있는 현 “교회 시대의 경륜”[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사건에서(행 2장) 교회의 휴거 때까지(계 4장)]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행 15:11, 롬 3:28, 갈 2:16 등). 주의할 점은 여기서 “믿음”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나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죄인이 자신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시고 장사된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이 시대에는 구원에 관한 한 구약의 율법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떤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에 따라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고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

그러나 교회가 휴거되고 나면 구원에 있어서 다시 “행위”가 필요한 시대가 오는데, 곧 “환란 시대의 경륜”[휴거부터(계 4장)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계 19장)]이다. 이 땅에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직전 잠깐 동안 펼쳐질 이 “과도기적인 경륜”에서는 매우 독특한 구원 방법이 제시된다. “교회 시대의 경륜”이 끝났기 때문에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기회는 없어졌다. 그렇다고 십자가에서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무효화될 수도 없다. 그래서 환란 기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행위”도 필요한데, 이를 위해 “모세의 율법”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를 위한 경륜이 끝나고 유대인을 위한 경륜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율법에 따른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행위] 어린양의 피로[믿음]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행위] 예수의 믿음을[믿음]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더라』(계 14:12). 특히 이런 행위의 복음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에게는 “천국 복음”(왕국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인들”에게는 “영원한 복음”이 전파된다(계 14:6,7).

특히 “환란 시대의 경륜”에서는 인내의 행위로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마 24:13). 말하자면 구원에 있어서 “율법 시대의 경륜”보다 더 엄격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그래도 “율법 시대”에는 다시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써 죄로부터 돌이키고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환란 시대”에는 이미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이후의 시대이기에 다시 동물의 피를 흘려도 소용이 없고,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피를 다시 흘리실 수는 없기 때문에, 한번 구원을 잃어버리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주어지지 않는다.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히 6:6).

마지막으로 “천년왕국 시대의 경륜”[재림부터(계 19장) 곡과 마곡의 전쟁 이후 백보좌 심판 때까지(계 20장)]에서는 믿음은 필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기본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인데, 이 기간에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이 땅에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에 명시된 왕국의 법령들을 구약의 율법을 지키듯이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이나 발이 잘리고 눈이 뽑히고 지상의 불못에 던져지는 등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마 5:29,30).

이상 살펴보았듯이 “구원받는 방법”은 시대와 경륜마다 다르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에서 가장 쉬운 구절도 “난제”가 되어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자칫 그 경륜에 해당하는 복음과 전혀 “다른 복음”을 전파하다가 “저주”를 자초할 수도 있다(갈 1:8,9).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향해 질주하는 당신을 초청하신다. 『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더라. 듣는 자도 “오라.” 말하게 하고, 또 목마른 자도 오게 하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계 22:17).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몸값”(딤전 2:6)을 이미 지불하셨다. 그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모든 피를 다 쏟으신 것이다.

당신은 “값없이” 십자가 아래로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된다. 이것은 “공짜”이다! 값을 깎아 달라며 흥정할 필요가 없다. “외상”이나 “후불제”도 아니다. “차용증서”를 쓸 필요도 없다. 절대 “공짜”로 받을 수는 없다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값을 보탤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 어떤 다른 비용도 절대 사절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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