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경기장에서 분류

참된 믿음을 지닌 성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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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0월호>

참된 믿음을 지닌 성도는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완전히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대적들을 쓰시는데, 이때 그들의 목적은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지만, 주님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에게 영광과 유익과 화평한 의의 열매를 주시는 데 있다.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계획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계획하시어서』(창 50:20). 하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드러나지 않게 일하시기에,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주님께서는 우주의 역사뿐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사까지도 놓치시지 않는다. 이렇듯 모든 상황을 시기와 장소, 관련된 인물과 사건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그물망 속에서 완벽히 통제하시기 때문에 "고난"은 겉보기와 달리 심오한 깊이를 갖게 된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행동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이라고 믿는다. 경기의 주관자시요 전능한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가장 효과적인 장애물을 우리 앞에 두셨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지닌 성도는 놀라우리만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변화들을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안다. "요셉"이 이에 관한 좋은 사례인데, 그는 형들이 자신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창 45:4), 하나님께서 그를 그곳으로 보내셨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창 45:5,8; 50:20).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참된 믿음을 통해 어려움, 손해, 부당한 대우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한다. 『주께서 행하신 일이 아니고서야 성읍에 재앙이 있겠느냐?』(암 3:6)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세세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승인을 거친 것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지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다. 즉 그 뜻에 따라 우리를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롬 8:29) 하시는 최고의 결말을 이루시려고 "최악의 상황"까지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 한해서만 그렇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들어 있음을 기억하라. 또한 그것은 "잠깐"일 뿐이고 영원이라는 사슬의 한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하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현재 어둡고 위험한 인생길을 지나가고 있다 해도 결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사랑이 풍성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참된 믿음을 지닌 성도는 이해할 수 없는 역경에 처했을 때조차 왕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지 않고 순종한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존중하였거늘 영들의 아버지께는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히 12:9)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해서 취하시는 모든 조치들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러한 것들을 복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영원에 거하시는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판단하시는 데 있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시야가 좁고 경험이 일천한 우리보다 더 서투르시겠는가?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높다!(사 55:8,9)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경주자"가 달려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가장 필요하고 유익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구성하셔서 그 경주자 "앞에"(히 12:1) 놓아두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겸손히 인정하고 어떠한 불평도 없이 모든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 결코 투덜대지 말라! 우리를 바로잡으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해 시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처사는 항상 옳으시다! 그런데도 불평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그분과 다투려 하는 것인가? 온갖 의문투성이의 상황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출구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참된 믿음을 소유한 성도라면 인내로 기다릴 수 있다. 하나님의 책은 특이하게도 끝에서부터 처음으로, 뒤에서부터 앞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다 이뤄진 뒤에 되돌아보면 지나왔던 모든 어두움들이 밝게 빛나는 빛들로 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을 지닌 성도는 하나님의 훈련 학교에서 고난이라는 필수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참여자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한 고난을 소중히 여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때로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방법을 쓰기도 하신다. 사람은 큰 시련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기 마련인데, 성경에 나오는 탕자 역시 극심한 배고픔으로 고통받던 중에 『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눅 15:18)라고 고백했다. 그 후 상황이 어떻게 역전되었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탕자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래서 그를 돌이키려고 애를 쓰신다. 인생에서 만나는 역경과 좌절은, 죄에 속아서 땅에 있는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사는 탕자를 일깨우시는 아버지의 손길이다. 헛된 기대에서 빠져나와 영원한 것들을 열망하게 하시고, 그 인격과 행동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일치하게 하시려고 탕자를 이리저리 흔드시는 것이다.

참된 믿음을 지닌 성도는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고 찬란한 목적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한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슬픈 것 같으나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물론 시련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잘 아시기에 성도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책망하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절대적인 어려움을 어려움이 아닌 것처럼, 극심한 괴로움을 괴로움이 아닌 것처럼 무시하라고까지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시련을 통해 얻는 효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셨는데 고통스럽지 않다면 과연 우리가 죄를 버리겠는가? 그것이 아프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욥"은 『주신 분도 주시요, 빼앗아 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을 송축하나이다.』(욥 1:21)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 전에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어서(욥 1:20) 자신의 깊은 슬픔과 고통을 드러냈다. 찌르는 듯한 아픔으로 성도의 영적인 눈이 잠시 침침해지거나 흐릿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히 4:15). 하나님께서는 출구도 없는 캄캄한 동굴이나 끝이 없는 지하실 미로로 우리를 데려가셔서 "절망"이 우리를 영원히 삼켜 버리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좁디좁고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내리막길이 한참 동안 이어질지라도, 『후에』(히 12:11)라는 말씀에 걸맞은 "반대쪽"이 존재하는 터널, 곧 눈부시고 영광스러운 빛을 다시 볼 수 있는 터널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이다.

화평한 의의 열매는 고난이라는 거칠고 비뚤어져 보이는 나무에서 열리기 마련이다. 지금은 고난이 믿음을 망가뜨리는 방해물처럼 보여도 종국에는 믿음을 진전시키고 단단하게 만든다. 고난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선함의 표시이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그분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면서 살아야 한다(히 12:9).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고 주님의 시신이 사라져 버렸음을 알고서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 울고 있었다. 하지만 빈 무덤은 부활과 승리를 의미한다! 만약 마리아가 그 상황을 처음부터 바르게 이해했더라면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결국은 그 『후에』(히 12:11) 애통이 큰 환희로 바뀌게 되었으니(마 28:8), 『랍보니』(요 20:16)라는 말에는 실로 큰 희열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빈 무덤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을 때 확신에 차서 "부활의 주님"을 능력 있게 전파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면 오직 상실감만 밀려온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커다란 유익을 얻는다. 보이는 대로만 보면 죽음과 무덤, 지난날의 행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밖에 남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생명과 부활, 앞으로 얻게 될 영광을 고대할 수 있게 된다.

자, 이제 진정으로 『후에』라는 말씀에 부합하는 그날이 오고 있다. 믿음의 경기장에서 힘써 달린 "후에" 맞게 될 면류관과 상급을 받을 그날에, 곧 지극히 큰 사랑과 지혜로 믿음의 경기장 곳곳에 어려움과 고난을 의도적으로 설정해 두셨던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그날에, 우리는 믿음의 경주자를 집어삼킬 기세로 몰려왔던 그 많은 방해물들이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목적들을 얼마나 다양하게 이루었는지 낱낱이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누리면서 기뻐하게 될 성도들이여, 이제 그 눈물을 닦고 신실하신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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