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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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을 틈타 슬며시 고개드는 ‘레노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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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11월호>

한국 기독교계의 외형적 성장의 부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적 영성을 강조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동원 목사(지구촌 교회)와 이철신 목사(영락교회)를 공동대회장으로 한 ‘2007 영성부흥 레노바레국제컨퍼런스’(10월 14-17일)가 그것이다. ‘묵상·성결·사회정의·카리스마·복음전도·성육신’의 6대 레노바레 영성을 통해 균형잡힌 교회와 신앙인을 만들어 보고자 개최한 이번 컨퍼런스에는 레노바레운동의 원조인 리차드 포스터 등이 내한했고,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강준민 목사(동양선교교회), 최일도 목사(다일교회), 이윤재 목사(한신교회) 등이 주강사로 참여하여 그동안 교회 성장에만 귀를 기울여온 한국 교계가 갖춰야 할 내면의 영성을 소개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 레노바레 움직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레노바레운동의 창시자인 리차드 포스터이다. 그는 흔히 복음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복음과는 무관한 퀘이커교도이다. 퀘이커교는 그것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가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고 진리(?)를 깨달으면서 시작된 신비주의 종교이다. 퀘이커교의 기본 교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씨앗,’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또는 ‘내면의 빛’이라고 부르는데, 세상 모든 죄인들 안에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반성경적인 뉴에이지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퀘이커교는 성경의 진리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이교도 신비주의로서, 그들 가운데는 교회도, 목사도, 집사도 없고 가장 중요한 복음도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성경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 그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복음인데, 퀘이커교는 이 세상 모든 죄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마귀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퀘이커교도인 리차드 포스터는 ‘레노바레’라는 것을 만들어 기독교 내에 ‘관상기도’라는 신비주의 독소를 뿜어왔다. 성령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시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마귀와의 교제로 문을 여는 관상기도는 이동원 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한국 교계에 소개되었다가, 여러 반발에 부딪혀 그간 잠잠해 있었다. 그러나 아프간 피랍사태와 같은 혼란스런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고, 이에 교계 내부에서도 외적 성장 전략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때는 이 때다 싶은 듯 레노바레운동이 슬며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노바레운동은 한국 교계의 비정상적인 외형적 성장주의에 대한 바른 대안이 될 수 없다. 레노바레 자체도 많은 비성경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면의 영성 수련’이라는 미명하에 도입한다면 한국 교계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영적 혼란과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목사들이 바른 성경과 그것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이교도의 신비주의 운동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이 나라 기독교계가 지향해야 할 푯대를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경을 알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이가 과연 있는 것인가? 영적 분별력 없이 온갖 것을 다 수용하여 현실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치료약을 구하는 자가 약 성분을 읽을 줄 몰라서 독약을 골라든 것과 같은 것이다.
레노바레 ‘신비주의’에 대한 당치않은 변명
‘2007 레노바레 영성부흥 국제컨퍼런스’를 인도하기 위해 내한한 리차드 포스터는 컨퍼런스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레노바레 영성운동이 신비주의로 치우치는 것같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는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신비주의라는 말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같다. 나는 다만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를 상황에 맞게 활용할 뿐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리차드 포스터는 질문의 본질을 깨달을 만한 명철이 없는 듯하다. 레노바레 영성운동이 신비주의로 치우는 것같다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고작 한다는 답변이 “나는 신비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였기 때문이다. 양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길로 넘어들어 가는 도둑이 “나는 도둑이 아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도둑이 아니며(요 10:1), 양보다는 돈에 관심이 있기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려두고 도망치는 삯꾼이 “나는 삯꾼이 아니다.”라고 한다 해서 삯꾼이 아닌 것인가?(요 10:12,13) “나는 신비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르치는 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은 초등학생이라도 반박할 수 있는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답변인 것이다. 도둑과 삯꾼을 정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들을 판단하는 잣대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다.
과거에 리차드 포스터는 서울신학대학교 등에서 영성훈련세미나를 인도할 때에 어떤 중년 남성에 대해서 “이 사람은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남성에게는 “지혜의 영이 함께함을 느낀다”고 했으며, 다른 남성에게는 “삼손 같은 힘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치 자신에게 인간의 속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우리는 “도(道)”를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해 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영매들도 점을 보러 오는 이들에게 이와 유사한 말들을 던지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에 대해 리차드 포스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를 상황에 맞게 활용한다.”고 했다. 리차드 포스터의 그 교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사람들을 관찰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일을 하라고 명령하는 구절이 없다. 최종권위인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교리나 실행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리차드 포스터의 그런 실행은 ‘악령이 주는 강박관념(demonic obsession)’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자신을 사로잡는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여기고 그것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신약 교회 시대에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은 기록된 성경 말씀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악령이 주는 강박관념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은사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리차드 포스터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리차드 포스터나 은사주의자들이나 모두 다 ‘신비주의자’이다.
참고로 고린도전서 2:13은 영적인 일들은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로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한다고 말씀한다.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로 영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속칭 영성의 대가나 신학자들, 목사들이 듣는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구도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없다. 누가 옳은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래서 결국 상대주의가 인간 문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되어 너도 옳고 나도 옳기에 비진리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 말씀은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 즉 “성경 말씀”을 서로 비교하여 말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종권위는 성경이기에 오로지 그것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이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신비주의적 실행을 신비주의라 했다면, 그 판단은 옳은 것이다.
“나는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결코 그의 신비주의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어거스틴이나 프란시스 같은 이교도 카톨릭 수도승들을 최고의 영성 신학자라며 그들을 닮고 싶다고 고백한 리차드 포스터는 그 수도승들만큼이나 신비주의자이다. 카톨릭의 영성을 개신교계에 소개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레노바레 영성운동은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카톨릭 영성운동과 그 신비주의의 아류임이 분명하다. 리차드 포스터를 초청하여 한국 기독교계를 오염시키고 있는 “내로라하는” 목사들 역시 기독교를 가장한 신비주의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목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인가? 그들은 그런 일들을 하면서 어떻게 ‘나는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출회할 것이라. 참으로 그 때가 오면 너희를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생각하리라』(요 16:2).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