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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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와 옛 곡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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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3월호>

『그들이 그 땅의 옛 곡식을 먹은 이튿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 카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수 5:12).

“보급 부대”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수십만 명의 군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자, 여기에 그보다 몇 배나 더한 대군이 광야를 가로질러 행군 중이다. 그런데 보급품을 지원하는 “보급 부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곧 그들은 전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발과 옷을 만지셔서 태풍이나 세월에도 끄떡없게 해 주신 결과, 40년을 신고 입었어도 “새것”과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신선하고 깨끗하며 그 맛이 일품인 빵도 땅에 내려 주셨다. 마치 하늘나라에서 잔치를 준비하여 절반은 왕의 식탁에서 먹는 사람들을 위해, 절반은 광야에서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듯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카나안 땅에 도착해서 그곳의 “옛 곡식”을 먹기 시작하자, 더 이상 만나를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위 말씀을 묵상하면서 위기 상황에서 주시는 “특별한 음식”과 일상생활에서 주시는 “평범한 음식”에 관하여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 위로의 빵 만나 ■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늘나라의 빵 공장에서 빵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라! 먼저 아이들부터 떼죽음을 당했을 테고, 아이들이 다 묻히기도 전에 여자들의 시체가 너부러져 늑대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며, 남자들의 시신은 묻어 줄 사람들조차 없어 여기저기에 더욱더 즐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계 역사에는 이집트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카나안으로 향하던 대군이 황량한 광야에서 괴멸당했다는 희대의 기록만 남았으리라. 카나안 땅에 곡식이 풍성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풀 한 포기조차 보기 힘든 광야, 바로 그곳에서 “음식”이 필요했다! 위급한 상황에 맞는 “특별한 인도하심”이 절실했던 것이다!

가쁜 숨, 맥없는 목소리, 창백한 안색... 당신은 지금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는가? 사별의 슬픔을 눈앞에 두고 있는가? 배우자나 자녀를 먼저 보내고는 “주님, 제가 견뎌 낼 수 있을까요?”라면서 울부짖고 있는가? 아니면 지난 시절의 쓰라림이 지금도 생생한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가족이 그리워 목이 메는가? 둘도 없이 가까웠던 친구가 남긴 빈자리를 볼 때마다 여전히 쓸쓸함이 밀려오는가? 슬픔의 무게에 가려 눈이 부신 태양 빛도, 활짝 핀 꽃도 보이지 않는가? 심지어 왜 더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에 대해 자신에게 묻고 있는가? 오, 비통에 잠겨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는 혼이여, 오, 입맛을 잃어버려 초췌해진 혼이여, 이스라엘 진영에 뿌려 주신 만나처럼 당신에게 주시는 “특별한 위로”를 풍성히 누리라. 『그분께서는 너와 함께 가실 주 너의 하나님이시니... 너를 단념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리라』(신 31:6).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주께서도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여인이 자기의 젖먹는 아이를 잊을 수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에게 동정하지 않겠느냐? 정녕,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 당신의 찢긴 혼을 어루만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라! 성경 어디에서 당신에게 “위로의 만나”를 내려 주실지 모르지만, 흔치 않은 괴로움에는 반드시 흔치 않은 위안을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히 12:6). 『그의 진노는 한순간이어도 그의 은총은 평생임이라. 밤새도록 울음이 지속될지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하나님께서 신선한 도우심을 날마다 진영에 부어 주시는데,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이나 찾아보겠다고 자신의 보따리나 뒤적이고 있지는 않은가! 새로 난 상처에는 “새로운 연고”를 발라야 한다!

■ 평범하지만 위대한 옛 곡식 ■

“일곱째 날”을 빼고 세어 보면 만나는 약 12,520일을 연속해서 내리다가 그쳤고, 이제는 “옛 곡식”으로 음식이 바뀌었다. 당시 “곡식밭”을 처음 본 백성들의 수가 꽤 됐을 터라 그들에게는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서로 비비면서 내는 소리나, 물결치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밭 풍경이 낯설고도 어색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백성들은 옛 곡식으로 각자의 식성에 맞게 매일 음식을 만들어 먹고 힘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복음의 옛 곡식”이 조랑조랑 실하게 열려 있는 밭에 서 있으니,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자!

누군가는 “에이, 음식이 너무 평범하잖아요.”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특식은 쉬이 질리는 법이다. 내가 프랑스 파리에 방문했을 때, 단단히 마음먹고 접하기 어려운 음식만 며칠 동안 먹어 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나라, 내 집 음식이 얼마나 그리워졌는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름도 생소한 갖가지 양념으로 흐드러지게 꾸며서 내놓은 음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알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는 않는 신학자들의 이론을 몇 번 대하고 나면 으레 이렇게 외칠 것이다. “아, 소박해도 좋으니, 복음의 옛 곡식으로 만든 빵을 주세요!” 그렇다! 구원받은 혼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만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다.

■ 속이는 음식, 과학과 철학 ■

은행 예금액이나 투자 수익이 큰 상품에 몰두하면서 자신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정부가 지원하는 보장책, 유명세, 심지어 잡지나 신문 조각을 양식으로 삼아 혼을 만족시키려고도 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수천 달러를 벌어들였을 때나 황홀한 기분을 느꼈지 그 후로는 그저 그렇지 않던가? 세간의 이목을 처음 끌었을 때나 마음이 들떴지 그 뒤로는 영 그때 같지가 않은 것이다! 기분이 왜 그런지 원인을 찾지 못하는 그들에게 내가 답을 주겠다. 복음의 옛 곡식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기근” 때문에 영원을 감지하는 눈은 퀭하게 꺼지고, 온몸은 점점 야위다가 아예 완전히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요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과학자들이 전에 없던 음식을 차려 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그쪽 분야의 사람들을 꽤 많이 아는데,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라는 목적지에 1,000km 앞이라도 가까이 와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망원경, 용융 도가니, 세포 원형질 등을 주식으로 먹으며 우리에게 위선을 퍼붓는다. 정말이지 도저히 참기 어려운 거짓말들을 쏟아 내는 것이다.

종교를 불신한 철학자로서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던 “존 스튜어트 밀”도 자신을 위해 새로운 음식, 즉 “공리주의” 철학을 마련했지만, 막상 죽으면서는 자신이 사별을 당했을 때 그 철학이 어떤 위로도 주지 못했노라고 시인했다. 간접적으로 자신의 삶이 실패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학자들이 다 그렇다. 긍정적인 철학, 절대성, 위대하게 되는 것, 영원한 부정, 더 고결한 일치, 잠재성, 광대함 등 끊임없이 속임수를 쏟아 내는 것이다. 그들이 쓴 글들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곱십어 보고 그들이 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건대, 그들의 목적은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데 있었다! 얼마 전에도 그들이 만든 “과자”를 조금 맛본 후에 그러한 것들은 영양분, 건강, 생명 등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오래 참으시는 주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아직도 기회를 주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과학과 철학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 ■

“좋은 곡식”이라도 탈곡해서 빻고 구워야 어디에라도 쓸 수 있지 않겠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복음의 곡식은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쳤음을 밝히는 바다. 갈보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인간들의 조롱에 짓밟혔고, 사탄의 분노의 채찍이 타작하듯 주님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맷돌에서 예수님께서 갈리시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옥의 불길에서 구워지시기까지 했다! 예수님 편에서는 용서도, 화평도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가? “아, 또 그 케케묵은 복음을 말하는 건가요?” 당신은 새로운 개념들을 복잡하게 뒤섞어 놓아야 종교답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해서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단순함이 능력의 원천이다. 당신이 아직 구원받지 않았다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빵,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진리를 먹으라!

환자라면 모든 음식을 다 먹지는 못한다. 가리지 않고 먹었다가는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다. 하지만 병이 깊더라도 웬만하면 빵은 먹을 수 있다. 죄로 병든 혼이여, 여기에 당신에게 딱 맞는 음식이 있다. 바로 복음의 옛 곡식이다. 빵의 또 다른 특징은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먹기 시작해서 일흔 살, 여든 살이 되어서도 먹지 않던가? 복음도 이와 같다. 봄의 싱그러운 아침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소리, 혹은 아이들이 주는 기쁨이 식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식욕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현관문을 나서는 만용을 부리지 말라. 정오도 되기 전에 당신의 몸, 혼, 영이 크게 타격을 당할 위험에 놓일 것이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기도할 수 있었다면, 기도가 불가능한 곳은 없다고 하겠다. 고단하다고 해서 식사를 거르지 않듯이, 일과를 마치고 지친 당신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주님과의 교제”다.

어떤 설교자들은 잡식을 좋아해서인지 복음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제시하지 않고 인본주의, 영지주의 등을 섞어서 아주 복잡하고 신비스럽게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만세 반석이 아니라 모래에 집을 지으려는 자들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복음은 빵으로서 단순하다. 인간의 “추측의 늪”에나 안개가 자욱하지, 이 생명의 강은 항상 쾌청하다. 빵은 빵일 뿐이기에, 빵을 보는 순간 그것이 빵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안다. 그 누구라도 하늘의 빵을 한 번이라도 맛봤다면 그것을 바로 알아차릴 것이며,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와 곡식을 구분할 줄도 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요 6:35). 그런데도 당신은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니! 곡식은 넘쳐 나는데 벨 낫도, 갈 맷돌도, 땔 불도, 게다가 식욕까지 없다니! 당신은 황금색으로 물든 밭에서 풍작을 눈앞에 둔 채 굶어 죽으려 하는가!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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