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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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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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0월호>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이다. 구원받으면 영원한 복을 누리지만, 구원받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가? “죄와 상”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짓더라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잃어버리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요 5:14; 8:11)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상”을 받는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은 세상의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값진 것이다. 바울은 『너희도 상을 얻게 되도록 달리라.』(고전 9:24)라고 말했다. “상”은 천년왕국에서의 통치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죄”와 “상”에 관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달리자.

■ 죄 ■

『내가 몹시 지쳤기에 부탁하노니 그 붉은 죽을 나로 먹게 하라』(창 25:30). 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이 결정을 내렸을 때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이것은 죄의 전형적인 수법으로서 그 당사자가 연약해진 상태를 이용하여 그를 넘어뜨린다. 죄는 우리가 취약해져서 위태로워지는 시점을 잘 알고 있으며 먹잇감을 덮치는 포식자처럼 항상 준비되어 있다. 카인은 시기심에 사로잡혔을 때 동생 아벨을 죽였다(창 4:5-8). 다윗은 나태하고 방심했을 때 죄에 빠졌고, 그 결과 자신과 우리야의 집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했다(삼하 11:2-5,17). 베드로가 불을 쬐다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도 바로 그런 순간이었고(막 14:66-72), 아나니아와 삽피라가 주님의 사역을 위해 드리는 돈에 대해 위선을 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행 5:1-10).

무엇보다도 그렇게 약해져 있는 순간은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기도 한데, 바로 그때 그 사람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또 마음속 깊숙한 곳에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가혹하게 여길 일이 아니고,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사슬의 견고함이 가장 “약한 고리”에 달려 있고, 전쟁의 승패도 가장 “취약한 전선”이 뚫리는지 아닌지로 좌우되지 않던가! 그래서 연약해졌을 때 패배한 것을 두고, 그저 불리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군인의 진정한 역량은 열병식에서 행진할 때가 아니라 전장의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드러난다. “전장”은 상황일 뿐 그 자체가 결정적 요인은 아니며,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최초의 인류가 죄를 지은 장소는 다름 아닌 “낙원”이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환경을 주셨는데 그곳에서 죄를 지은 것이다. 한편 “퍼가모 교회”가 처한 상황은 이러했다. 『내가 너의 행위와 네가 거하는 곳을 아노니, 곧 그곳은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나의 이름을 굳게 붙들어서 심지어는 나의 신실한 순교자 안티파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그 날들에도 나의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사탄의 자리가 두 번이나 언급되고 있음을 눈여겨보라. 퍼가모에서는 모든 환경이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실한 증인들로 남았다. 이렇듯 성도는 낙원에 있으면서도 낙원을 잃을 수 있고, 반대로 사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주변 상황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식의 변명과 책임 회피는 단칼에 베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주위의 어떤 상황도 위대하신 구주와의 교제에서 우리를 강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 큰 힘을 얻게 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의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로 “불리한 상황”을 손꼽지만, 사실 이것은 자기들이 전해야 할 때 입을 다물고 있었거나 아예 복음 전하기를 포기해 버린 마음의 결과일 뿐이다. 상대방이 “길가”처럼 단단한 밭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자신의 신실하지 못함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승리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패배가 가득한 연약한 순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없었던 때는 단 한 번도 없었고(히 11장)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들은 더 많이 열리기도 한다. 『이는 내게 크고도 효과적인 문이 열렸으며 또 대적하는 자들도 많기 때문이라』(고전 16:9). 크고 효과적인 문과 많은 대적들 간의 상관관계는 매우 밀접하므로, 복음을 극도로 증오하는 모습과 복음의 풍성한 열매는 교회사에서 자주 함께 나타났다. 따라서 더 유능한 복음 전파자가 되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될 것이기에, 우리 역시 앞선 믿음의 성도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전문 웅변가들”이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고후 4:5)를 향한 열정을 가지고 온전히 헌신하는 성도들이다. “복음 전파자들”은 비록 세상이 대적한다 해도 패배하지 않고, 믿기를 거부해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으며, 사람들에 의해서 죽음에 넘겨지더라도 항상 부활의 생명이 가득하고, 심지어 죽어 묻히더라도 다시 살아난다!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가 나약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 승리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순간이 될 수 있도록(눅 15:7) 그와 같은 생각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이다!

■ 상 ■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상”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상”은 신실하게 싸워야 받을 수 있기에 “당연히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 안 된다. “의”는 믿음을 통해 누구나 거저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누릴 “영광”의 비중은 믿음의 경주에서 보인 각자의 헌신과 꾸준함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경기의 심판관이신 『의로운 재판관』(딤후 4:8)께서는 상을 주시는 자리에서 시험을 견뎌 내지 못한 성도를 향해 “실격”을 선언하실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전 9:27). 우리는 이런 위험성과 관련하여 아주 심각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둘째, 상을 통해 주어지는 영광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별개의 문제이며, 그 정도도 다양하다. 비록 결산의 자리에서 실격당할 수 있다는 심각한 위험이 남아 있지만, 장자권은 잃었어도 아들로서의 관계는 남아 있었던 에서처럼 거듭난 성도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전 생애를 통해 드린 섬김이 불에 타는 손해와 수치를(요일 2:28) 당하여 “불에 의해서인 것”과 같은 구원을 받는다 해도(고전 3:13,15), 말 그대로 구원받은 사실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은혜”와 “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조화롭게 반대되는 속성이 있다. 마치 자석의 양극이 서로 상극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음과 같다. 구원을 받는 것과 영광을 받는 것, 거듭나는 것과 완전하게 되는 것, 은혜를 받는 것과 면류관을 받는 것, 처음에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지막 순간에 상을 받는 것, 이들 각각의 관계가 모두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상”은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는 능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육신적인 노력은 모두 무가치하고, 우리의 어떤 훌륭한 면모도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최선의 노력으로도 목표에 이를 수 없다. 모든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이루실 수 있는 일이기에 모든 경주자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죄를 이기는 승리, 거룩한 삶, 믿음의 경주에서 나타나는 모든 진전 등 이 모두를 하나님께서 주신다. 우리에게서 비롯된 성취가 절대 아니다. 최종 목적지까지 오는 동안 믿음으로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였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주시는 것이다. 경주 내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드렸다고,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은가! 설령 우리의 헌신이 전제된다 해도 결승점에서 우리가 받을 상은 전적으로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런던 탑 지하실 금고에는 아주 진귀한 보석들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그곳에는 화려한 왕관들이 있는데 모두 대영 제국에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지상의 왕관들은, 하나님께서 참된 승자에게 주실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계 2:10, 약 1:12),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 9:25,26), 영광의 면류관(벧전 5:3,4) 앞에서 완전히 빛을 잃는다! 지상에서 최고로 값지고 아름다운 왕관이라 해도 주님으로부터 받을 영원한 면류관에 견주어 보면 지극히 볼품없는 고철덩이처럼 보인다! 이 땅에서의 영광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과 비교하면 꼭 그와 같이 보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경주에서 이긴 승리자가 무수한 특권과 함께 받았던 월계관, 올리브나무 가지들, 종려나무 가지들 등도 완전히 시들어서 사라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리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광스러운 면류관들은 영원하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린다면, 영원히 썩지 않는(벧전 1:4) 풍성한 유업, 영원토록 경배하는 제사장 직분, 왕으로서의 영원한 위엄과 통치(계 22:5) 등도 누리게 될 것이다.

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점검하라. 육신과 죄와 세상을 향해 “안 돼!”라고 답하지 않으면, 주님께 진정으로 “예!”라고 답할 수 없다. 여전히 어떤 죄나 나쁜 습관을 붙들고 있고, 과거의 죄들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갈등 관계에 있는 어떤 성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라. 지금 당장 실행하고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한 번 미루기 시작하면 계속 미룰 것이고 끝내 해결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믿고 사랑의 섬김을 맡기셨으니 전심으로 그 일을 행하라. 시간과 돈이 들더라도 그렇게 하라. 예수님을 전파할 기회를 얻게 되면 기쁨으로 입을 열라. 조롱, 불이익, 손해를 당할지라도 그렇게 하라. 대관식에서 빛나고 영광스러운 상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부인”이라는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마 16:24,25).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이라는 가장 강력한 원수를 이기신 “위대한 승자”를 바라보라! 모든 전투에서 실제적인 승리를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최후의 승자가 되게 하실 위대한 정복자를 바라보라!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