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경기장에서 분류

최후 승자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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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4월호>

믿음의 경주는 “장거리 경주”이기에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조금만 더 참고 힘을 내야 하건만, 많은 성도들이 그 한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데마처럼 포기하기 일쑤다. 이에 바울은 히브리서 12:1,2을 통해 달려갈 길을 기쁨으로 끝마쳐야 할 성도가 마지막까지 승자로 남기 위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네 가지 대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2절)

믿음의 경주와 믿음의 선한 싸움은 우리의 선두 주자요 정복자이신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이루신 승리로부터 시작된다. 주님께서는 이 승리를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부요함의 근원을 마련해 주셨고, 이로 인해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주부들은 적은 배급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고단함에 매우 지쳐 있었다. 한번은 북부 지역에 살던 한 주부가 난생처음 바다를 보게 되었는데, 그 장관에 압도된 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물을 보며 이렇게 외쳤다. “배급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바다여!” 물론 이 광경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 하늘의 자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마음껏 쓸 수 있도록 열어 두신 하늘의 보고를 보라!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엡 3:8)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선물』(고후 9:15), 곧 넘쳐흐르는 하늘의 선물의 풍성함은 측정 자체가 불가하다. 하나님께서는 후하게 베푸시는 “왕”이시며, 그분의 자녀들은 그 풍성한 복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 “왕의 자녀들”인 것이다.

한번은 어떤 설교자가 에베소서 3:16(『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따라』)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거지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백만장자에게 만 원을 구걸했고, 그 백만장자는 거지에게 만 원을 줬다고 생각해 보자. 그 선물이 백만장자에게서 나오긴 했지만, 이를 두고 그의 풍요함을 따라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풍요함을 따라 나왔다면 다른 선물들도 더 많이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그저 조금씩, 승리를 약간씩 나눠 주시는 분이 아니다. 찔끔찔끔 도와주시거나 어쩌다가 한 번씩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 아닌 것이다. 주님께서는 겨우 찰랑거릴 정도가 아니라, 흘러넘치도록 공급해 주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런데도 수많은 성도들이 이 거대한 원천에서 홀짝대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비참하고 가난한 거지가 비통한 마음으로 애원은 하면서도, 넉넉하게 주시는 분께서 이미 내밀고 계신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금 당장 믿음의 팔을 뻗어 그 풍성한 선물을 받으라!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돌리면, 즉시로 그분의 부요함은 공급이 중단된다. 결국 땅의 것들을 추구하고, 만족은 사라지며, 조바심이 평안을 잠식한다. 그러나 겸손히 주님께로 나아가 시선을 그분께 집중하면,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모든 행복과 만족과 평안이 회복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의 구원이시고 도움이시며 힘이신 것이다.



2. 함께 경주했던 증인들(1절)

시대와 지역, 성별과 지위, 처한 상황 등이 저마다 달랐어도, 살아 있는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실제적으로 입증해 왔다. 구약 성도들이 인내로 참아 내며 싸워서 승리했다면 우리 역시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역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믿음을 지킨 승자들은 항상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무슨 내세울 만한 핑곗거리가 없다.

믿음의 전장에서 승리했던 용사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으면 짙은 구름(1절)에 비유했을까! 그처럼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둘러싸고 있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와 격려를 얻을 수 있다. 말하자면 참된 믿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이 확고하게 둘러서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 증인들은 그저 관람이나 하는 구경꾼들이 아니며, 우리가 달려갈 길을 끝마칠 때까지 그들의 승리의 간증을 통해 우리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3. 방해하는 대적들(1절)

승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대적들보다 더 위대하시지만, 결코 대적들의 방해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① 우선 “육신”이 있는데, 이 육신과의 전쟁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육신은 결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다(롬 8:7). 오히려 용수철과 같아서 언제라도 그 법을 거슬러(갈 5:17) 튀어 오를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이다.

② 두 번째 대적인 “세상”은 초림 당시 예수님을 증오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다. 당연히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도 미워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지 세상과 친구가 되면, 참다운 경주자가 될 수 없고, 목표에 도달할 수 없으며, 면류관을 받지도 못한다(딤후 2:5).

③ “죄” 역시 우리들의 경주를 방해한다. 죄는 놀잇감이 아니기에 초전에 싹을 잘라 내야 한다. 죄가 우리 안에 짐을 풀고 자리를 잡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며, 죄를 인식하는 즉시 “안 돼!” 하면서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죄는 항상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둘러싸면서 집중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달려갈 길에 다양한 장애물을 설치하는 솜씨도 능수능란한데, 특히 “관대한 친구”인 척하면서 은밀히 접근해 오는 것이다. 이득이 될지언정 손해는 보지 않는다고 속이거나, 최소한 난관은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농간한다. 위장 전술에도 능하여 때때로 자신의 주인인 사탄의 존재마저 부인하는 체한다. “지옥의 입구는 화려한 화관으로 장식되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죄에 속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죄는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속여서 용기와 소망을 강탈해 간 다음, 우리를 세상 종노릇하며 살도록 압제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둘러싸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는 나의 은신처시니 주께서 고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며 구원의 노래들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시 32:7). 비록 강력한 죄의 힘이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히고 연약한 우리를 압박하며 괴롭힌다 해도,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약속에 따라 사방에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④ 마지막으로 “무거운 짐”이 있는데, 걱정거리는 우리가 어리석게 만들어 낸 장애물로서 우리의 영적 힘을 고갈시키고, 잘못된 가치관은 우리의 섬김을 절뚝거리게 만든다. 건강, 시간, 돈, 명예, 편리한 문명 등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지만, 믿음의 경주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무거운 짐들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쫓아갈 『그 푯대』(빌 3:14)와 무관한 것이라면 과감히 그 짐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4. 목표(2절)

경주자는 목표에 시선을 집중해야 승리할 수 있다. 사람은 “과거”(가문, 가족, 교육), “현재”(주변 환경, 직업)뿐만 아니라 “미래”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예수님과 같이 되리라는 소망을 가진 성도가 항상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일 3:2,3).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에서 고난을 당하셨을 때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2절)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셨다. 간증을 지키려다가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거룩하게 살기 위해 죄가 주는 즐거움을 단념할 때, 혹은 복음과 진리의 지식을 전하고자 헌신할 때는, 곧 있으면 받게 될 면류관을 바라보며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남을 것으로 보상해 주실 바로 그 목표를 위해 기꺼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은 결코 아깝지 않은 투자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 또한』이라는 말씀으로 히브리서 12장을 시작한다. 즉 구약 성도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드린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고난과 시험을 이겨 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들은 목표를 주시함에 있어서 귀감이 되는 용기와 인내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특히 우리의 구주께서는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도 승리가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해 주셨고, 인내로 견디시면서 자신의 거룩함과 소망을 끝까지 견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나 또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 길이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길이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