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해외기사 분류

죽음의 물결이 에워쌀 때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9월호>

『죽음의 물결이 나를 에워쌌을 때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홍수가 나를 무섭게 하였도다』(삼하 22:5).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이 쓴 마지막 시들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죽음"을 "물결"에 빗대고 있는데, 이것이 환란 성도들에게는 문자적 또는 교리적으로 적용된다(계 12:15,16).

본글에서는 죽음이 물결과 같다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하려고 한다. 로마서 9:23, 고린도후서 4:7, 디모데후서 2:2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몸을 "그릇들"(Vessels)에 비유한다. 물론 "Vessel"이란 단어가 솥이나 냄비 같은 용기를 가리키지만, 배 또는 선박을 말할 때도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 단어가 오목하게 들어간 안쪽 부분에 물건을 넣어서 외부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파도와 친하게 지낸 편이었다. 물론 해군에서 복무한 적은 없다. 해군들은 18미터에 육박하는 엄청난 파도가 배를 덮치는 일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밀려오는 파도들을 친구 삼아 즐겁게 놀았던 소싯적의 기억만 남아 있다.

우선적으로 죽음과 파도는 결코 그치지 않고 다가온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파도는 계속 해안을 때리면서 밀려오기를 결코 그치지 않는다. 파도가 그치지 않는 것처럼 죽음도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침에도 죽고 정오와 자정에도 죽는다. 죽는 모양도 가지각색인데, 파도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다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내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산속에서 살기보다는 바닷가에서 사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산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바다처럼 그렇게 변화무쌍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다는 계속 움직이고 변화한다.

이처럼 쉼 없이 변화하는 바다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해변으로 가서 파도들이 해변으로 밀려와 닿으며 부서지는 모습을 보곤 한다. 누군가 그 소리를 녹음해서 밤에 듣는다면 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는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죽음이 지속된다는 것 또한 하나의 위로가 될 수 있다. 이는 죽음이 인생살이의 모든 것은 한시적이고 임시적이므로 그것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모든 악한 일들에서 우리를 구해 내기도 하고, 어떤 필요들에 대해 지나친 염려를 하지 않게 하며,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시달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기도 한다. 죽음의 물결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또한 파도는 "화강암"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침식시킨다. 그래서 죽음을 정복하려면 "반석"(Rock) 위에 집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옛날 찬송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내 소망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의라네. 굳건한 반석, 그리스도 위에만 서리. 다른 기초는 무너지는 모래일 뿐이라네.』 수년 전만 해도 미국 서해안에 살던 이들은 해변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라 불릴 만한 집들을 지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계속되는 침식으로 해안선이 점차 사라져 가자 이곳에 지어진 가옥들도 붕괴되고 파도에 쓸려가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죽음도 거의 모든 것을 쓸어 가지 않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영원히 정복하신 유일한 분이다. 에녹은 죽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죽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에녹은 살아서 휴거될 신약 성도들의 예표가 된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휴거되었지만 앞으로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죽게 될 것이다(계 11:3-7). 모세는 죽었고,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키셨다(유 1:9, 마 17:3). 하지만 그는 또다시 죽을 것이다(계 11:3-7). 예수님만이 죽음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죽지 않으신 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신 것이다.

세상에서 소위 위대하다는 자들이 얼마나 가련하게 죽어 갔는지 보라. 언론에서 "어떤 사람이 마지막까지 죽음과 사투를 벌였다!"라고 떠들어 대도, 죽음을 이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영화배우 존 웨인도 "나는 암을 이겼다!"라고 말했지만, 그 승리는 잠시일 뿐 결과적으로는 죽음이 승리했다. 오직 한 분만이 죽음과 대결하여 이기셨다. 죽음은 결코 인간이 홀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다.

파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잔잔히 길게 밀려오는 파도가 있는가 하면, 강력하게 내리치는 높은 파도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살다가 평온하게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죽음이 들이닥쳐서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브렌트침례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 "체이버스"라는 성도가 있었는데, 죽기 전 그는 한가로이 낮잠을 자다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난 정말 행복해. 내 생애에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잠들었고 아주 평화롭게 주님께로 간 것이다. 그렇게 죽을 수만 있다면 실로 아름다운 죽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죽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는데, 존 F. 케네디는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두개골에 총을 맞아 죽었고, 여배우 제인 맨스필드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반면에 기나긴 고통 속에서 힘들게 죽어 가는 사람도 있다. 암으로 네다섯 달씩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그러한데, 다 나은 것 같다가도 암이 다시 재발하여 또다시 수개월을 고생하다가 죽는 것이다. 나는 이런 죽음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젊은이들의 죽음은 깨끗하고 신속하게 끝나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짠 맛의 파도는 정결하게 하는 성질이 있다. 죽음 역시 정결케 해 주는데, 곧 죽음을 통해 죄 짓는 삶이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롬 6:23). 인간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죄인에 불과하고, 무언가를 잘 한다 해도 충분히 선하지 못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는 것이다. 땅에 묻히고 나면 죄를 지을까봐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죄의 유혹으로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된다. 죄 때문에 슬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오물들은 하수구를 통해 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는데, 바다의 소금물이 그 더러운 것들을 정화시킨다. 바다에 그처럼 방대한 양의 소금이 들어 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쌓인 수많은 오염 물질은 결코 해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살인마 "잭 더 리퍼," 변태성욕자 작가였던 마르키 드 사드, 아돌프 히틀러, 연쇄 살인범 알버트 피쉬, 스페인 종교재판소장 또르께마다, 마호메트, 네로 등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 것 같은가? 그만큼 "죽음"은 이런 죄인들의 악행을 중단시키고 정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파도는 배들을 파괴할 수 있다. 옛날에 이런 노래가 있었다. "깊은 심연은 용감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삼켜서 잠재워 버렸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정말이지 저 해저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배들이 잠겨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수천 척의 배들이 잠겨 있을 것이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파선했을 때, 그로부터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SS캘리포니언"이라는 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선박에 무선 통신이 막 도입되던 시절이어서 무선 통신사가 24시간 대기하지 않았었다. 10시 32분경 캘리포니언호의 무선 통신사는 빙하에 대한 경보를 발령하고 난 후 근무 시간이 끝난 관계로 잠을 자러 갔다. 그런데 타이타닉호의 무선 통신사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11시 39분경에 타이타닉호는 빙하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것과 관련해서 "만약 이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타이타닉호의 무선 통신사가 그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제대로 반응했다면, 혹은 캘리포니언호의 무선 통신사가 잠을 자러 가지 않았다면, 그 배는 타이타닉호의 1,500여 명의 희생자를 무사히 구조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여, 그래서 당신도 사람들이 죽음의 바다에 수장되려는 이 중요한 순간에 "잠을 자고 있어서는 안 된다!"

파도는 우리가 바다로 더 멀리 나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죽음의 물결"은 당신이 인생 여행을 더 많이 즐기는 것을 막아 준다. 어떤 젊은이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위대한 일들을 이룰 것이라고 야심차게 시작하지만, 죽음의 물결은 그가 해변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를 강타할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배 한 척이 해안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폭풍을 만나 물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해안에 있던 구조대원들은 구명정을 띄우려고 했지만 거센 폭풍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구명부표에 도르래를 달아 밧줄로 구조하는 장비를 쏘아서 선원들을 구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구조 장비를 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어떤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자 결국 대원들은 밧줄을 다시 끌어당겼다. 그때 배는 완전히 부서져 버렸고, 그 밧줄에 달린 부표에는 선실에서 잡일하는 한 초보 선원이 의식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구조대원들에게 물었다. "배는 어떻게 되었어요?" "가라앉았소!" "그럼, 선장님은요?" "배와 함께 가 버렸소." "항해사는요?" "배랑 같이 갔소." "선원들 중에 구조된 다른 사람은 없나요?" "당신만 구조되었소!" 그 말을 듣자 그 젊은이는 모랫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하시더니..." 이처럼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기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항해하던 배를 수도 없이 멈춰 세우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물결"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은 그 파도가 성도들을 해안으로 안내해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를 주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미지의 어두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성도들을 하늘의 본향으로 데려간다. "우리 모두 그 아름다운 해변에서 노래를 부르리. 하나님의 복으로, 즐거운 곡조로 노래를 부르리. 우리 마음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며, 안식의 복으로 한숨도 쉬지 않으리라!"

바다에는 바닷물이 많은 만큼 죽는 일도 많다. 죽음의 물결이 밀려오면 그 물결은 해안에 닿으며 부서지고 또 부서진다. 조만간 그 물결은 당신의 배도 해안으로 데려갈 것이며, 당신은 저편 항구에서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땅에 묻히기를 바라지 않으며, 저 위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될 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언젠가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내가 속해 있는 주님께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이니 죽음을 걱정해야 할 무슨 까닭이 있겠는가!

언젠가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읽은 적이 있는데, "퍼스호"라는 이름의 구축함에 승선했던 한 영국 군인의 이야기이다. 1941년 퍼스호는 또 다른 구축함 한 척과 함께 자바해와 인도양을 잇는 순다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일본군이 이 두 배를 격침시켰는데, "길란"이라는 이름의 이 군인만이 살아남았다. 이 사람이 가라앉고 있던 구축함에서 어떻게 살아 나왔는가에 대해 들어 보면 정말 놀랍다. 그는 보일러실에서 근무하던 중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세 명의 동료들과 함께 물이 다 차오르기 전에 갑판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배는 완전히 옆으로 기울었고 전등도 나가 버렸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갑판 개구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 앞으로 계속 가야 했고, 결국 그 동료들은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 배가 옆으로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배 안의 계단은 큰 구렁처럼 되어 있었고, 길란과 동료들은 1.5미터 너비의 그 구렁을 뛰어넘어 주갑판으로 건너가야 했다. 먼저 뛰어넘으려 했던 한 동료는 맞은편에 손이 닿지 않아 비명을 지르며 어두운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길란과 남은 두 명만이 겨우 건너갈 수 있었다. 이후 두 명의 동료는 갑판으로 통하는 맨홀 뚜껑으로 먼저 빠져나갔다. 하지만 배는 길란이 나가기도 전에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그때 그는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배에서 뿜어져 올라가는 물줄기에 몸을 맡기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몸에 힘을 빼고 물줄기에 몸을 맡기자 얼마 후에 곧장 해수면 위로 올라갔고, 5센티미터의 두께로 깔려 있는 기름막을 뚫고 나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다. 막상 나와 보니 자신이 배의 프로펠러에서 3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음을 알았다. 길란은 배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계속 기도했으며, 탈출하자마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좌초하여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당신을 구해 주신 것을 알았다면, 당신은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감사를 표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기 위해 통과하는 문인 것이다.

만약 자신의 배가 죽음의 물결 아래로 이제 막 가라앉고 있는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라. 우선 배를 조종하는 "키"에서 자신의 손을 떼라. 구원의 대장이신 주님께(히 2:10) 그 키를 넘겨 드려라. 그러면 주님께서 거센 물결을 헤치고 안전한 항구로 당신을 데려가시어 배를 정박시키실 것이다. 이생의 모래톱과 바위들 사이에는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없이 세상의 명예와 지혜를 의지하며 살다가 파선한 배들의 파편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시온의 배"는 뱃고동을 울리면서 전속력으로 항해하여 선객들 모두를 영원한 항구로 안전하게 데려간다! BB

전체 279 / 7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