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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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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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3월호>

"노래들 중의 노래," 곧 지상의 그 어떤 노래들보다도 "최고의 노래"인 솔로몬의 노래 5:16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의 입은 지극히 달콤하니, 참으로 그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 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의 사랑하는 이는 이러하고 나의 친구는 이러하도다.』

이 구절은, 솔로몬의 노래 5:9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 『네가 사랑하는 이가 남이 사랑하는 자보다 무엇이 더 나으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부가 대답하면서(솔 5:10-16) 마지막으로 했던 말인데,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사랑하는 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뭐가 그렇게 특별한 분이시냐?"라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자신의 구주와 사랑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사랑하는 이』일 뿐 아니라 그녀의 『친구』이기도 하다. 나는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이 위대하신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 몇 가지 교훈적인 내용을 말하고자 한다. "진정한 우정은 영원하다!"

첫째로, 우정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분의 친구이기 이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영접하고(눅 15:2)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으로(마 11:19) 알려지셨다. 특히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도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10).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는데(요일 4:19),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도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요일 4:10). 찬송가에는 이 위대하신 친구에 대한 노래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들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들이라 부르시겠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옛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한 설교자가 무식한 카우보이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여기에 예수님의 친구가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질문을 몇 번 하고 나자, 이윽고 한 늙은 카우보이가 일어나더니만 자기의 카우보이모자에서 먼지를 털며 "나요!"라고 대답했다. 그 설교자는 '이제야 그리스도인 한 명을 찾았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다시 물었다. "정말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맞습니까?" 그러자 그 카우보이는 "사실 예수님이 뉘신지 모르겠지만, 그분에게 그렇게 친구가 없다면 나라도 친구가 되어 줘야겠다 싶어 일어났소!"라고 대답했다. 오늘날도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예수님께는 친구가 별로 없으신 것이다.

둘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러운 친구이시라는 점이다. 나는 교황, 뉴스 미디어,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는 나의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예수님과 나의 관계는 마치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와 같다. 『그가 자신의 혼을 사랑하듯 다윗을 사랑함이더라』(삼상 20:17).

흔히들 "럭크만은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진정한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나의 친구들은 정치적인 이익이나 혈연으로 연결된 친구가 아니다. 내가 그 친구들과 사귀게 된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며, 나 역시 예수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친구들도 <킹제임스성경>을 믿고, 나도 <킹제임스성경>을 믿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전에는 친구 관계였다가 내가 그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결정을 했다고 해서 나와의 우정을 저버린 친구들도 있다. 헌신짝처럼 나를 버린 것이다. 내가 그들과의 친구 관계를 먼저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결코 우정을 가볍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먼저 친구를 저버린 적이 없다. 나는 아들들에게도 "친구를 사귀라."라고 자주 조언했다. 왜냐하면 친구는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젊은이가 집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아버지, 저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시에서 돈도 없고 친구도 없이 살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버지는 이렇게 답장했다. "그래? 그렇다면 친구를 사귀려무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다(대하 20:7, 사 41:8, 약 2:23).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도 『친구』라고 부르셨다(마 26:49,50).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배신하지 않으셨지만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배신자에게조차 끝까지 친구가 되셨던 것이다.

사실 진정한 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실한 친구가 되어 주신다.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팔아먹었다.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반했으니, 가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오르파가 자기 시어머니에게 입맞춤하면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가(룻 1:9,10,14), 결국은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간 것과 같다(룻 1:15). 입으로 한 말과 속마음이 달랐던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로 칭찬하면서 아첨을 하면, 나는 속으로 "이 친구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이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진실한 친구이시다. 『사람이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나니』(요 15:13). 진정한 친구는 마치 "담쟁이덩굴"과 같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밀착하여 달라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진정한 친구이신 것이다.

1950년경 도시 전체가 나를 반대하고, 두 가정과 정신과 의사 한 명도 나를 대적하더니, 나를 "정신 병원"에 집어넣고 아이들을 빼앗아 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 마무리되고 난 후 앨라배마 주 앨버타에서 독일계 형제들 몇 명이 나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우리 집 앞뜰에 둥그렇게 의자들을 놓고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럭크만 목사,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이러이러한 얘기들을 들었는데, 우리는 당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듣고 싶습니다." 나는 내 입장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돌이켜 보면 내 친구들이 그 사람들을 보낸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돕도록 그들을 보내신 것이었다. 또 한번은 집을 사면서 은행으로부터 받은 대출금에 대해 월 납입금을 내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플로리다 주 세인트피터즈버그의 한 교회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과부인 어떤 자매의 집에 묵었었다. 집회가 끝난 뒤 그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낸 헌금을 내게 주었고, 그 과부도 내게 수표 한 장이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나중에 비행기 안에서 보니까 그 봉투 안에는 이런 내용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 그대로를 실천하는 설교자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의미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나는 그 돈으로 납입금을 낼 수 있었는데, 그 여인은 내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여러 친구를 가진 사람은 친절하게 보여야 하나니,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느니라』(잠 18:24).

당신에게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한 분" 계신다. 1987년에 매우 어려운 일이 생겨서 어렵사리 구입한 집을 팔아 비용을 마련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텍사스 주의 작은 도시에 사는 두어 명의 친구가 나를 도와주었는데, 누가 그렇게 시켰겠는가? 당연히 나의 친구이신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만약 내가 하나님께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브렌트침례교회에서 사역했을 때 "존 보셔"라는 이름의 성도가 있었다. 과거에 로마카톨릭교도였던 그는 구원받은 이후 곧바로 미 육군에 입대하여 독일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이 친구는 군대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해 크게 걱정을 했었다. 나는 그와 기도하고 나서 "이제는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주님의 손안에 있으니까."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물론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펼쳐서 『그의 손은 녹보석이 박힌 금고리들 같으며』(솔 5:14)라는 말씀을 보여 주고는 이렇게 권면했다. "자네는 주님의 손안에 있는 거야. 성경에서 우리가 읽는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그 손가락으로 별들을 만드신 분이지(시 8:3). 주님의 손이 금고리들 같고 그 손가락으로 별들을 만드셨다면, 주님께서 그 손으로 좋은 친구 몇 명쯤 못 골라 보내 주시겠는가?" 당연히 주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친구이신가? 당신도 예수님의 친구인가? 진짜 예수님의 친구라면 마리아를 예수님과 동급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진짜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라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예수님께서 음행했다거나 일부다처주의자라는 모독적인 거짓말도 믿지 않는다. 또한 예수님을 동성연애자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그중 80%는 거짓말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진짜 예수님의 친구라면 그분을 음행과 살인을 일삼는 간질병 환자 마호메트나 부처 같은 게으름뱅이 등과 비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친구는 그런 짓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런 짓을 하는 소위 신학자나 교수 및 작가들을 만난다면,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아님을 분명히 알라!

셋째로, 어떤 친구를 사귈지 주의해야 한다. 혹자가 "나는 네 친구야. 나만 따라와."라고 해서, 그를 따라갔더니 온갖 쾌락이 난무한 곳으로 나를 인도해 간다. 그러고는 황량한 사막, 늪과 뱀들이 우글거리는 음습한 진창으로 계속 끌고 가는 것이다. 급기야 갑자기 땅바닥이 꺼지더니만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때 당신이 그 친구에게 말한다. "이봐, 나를 속인 거였지!" 그러자 그가 깔깔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유황이나 실컷 들이켜 마시라고. 영원한 절망의 장소로 온 것에 대해 축배를 들어야지!" 처음에는 쾌락으로 좋은 듯했지만, 결국은 마귀를 친구로 삼아서 망하게 된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분이 "나는 네 친구니라. 내가 이끄는 대로 여행을 하자. 나와 함께 가겠니?"라고 하신다. 그분은 가장 먼저 당신을 짓눌렀던 큰 짐을 당신의 등에서 끊어 버리신다. 그리고 어둑어둑한 방이나 열기로 후끈후끈한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곳을 통해서만 내가 너를 데리고 가려는 곳으로 갈 수 있단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계속 함께 있을 테니까." 그 불을 통과한 후에는 당신과 어깨동무를 하시면서, 환한 빛과 상쾌한 공기에 식탁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는 좋은 의자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어 당신을 잠시 쉬게 하신다. 그런 다음 다시 일어나시더니 "여행을 좀 더 해야지!"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그분과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태양이 점점 더 밝게 빛난다. 그러더니 주님께서는 "이제 거의 다 왔구나!"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가파른 마지막 길을 함께 올라갔더니, 순전한 금으로 꾸며진 평방 2,400km의 찬란한 도성이 그 정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분을 친구로 삼았다면 친구를 제대로 고른 것이다. 당신도 이런 친구를 알고 있는가? "당연히 알죠! 예수님을 모를 리가 있겠어요?"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예수님"인가? 바울은 그가 사역하던 당시에 거짓 일꾼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다른 예수』를 전파했다고(고후 11:4) 적시해 놓았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온갖 "가짜 예수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내 생애에서 그 어떤 때보다도 지금의 나는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신 주님을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존 뉴턴이 작사한 옛날 찬송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나의 주여, 정녕 내가 주님의 것이요, 주께서는 나의 태양과 나의 노래이실진대, 어찌하여 내가 슬퍼하며 기진하고 있나이까? 어찌하여 내 겨울이 이처럼 긴지요! 내게서 검은 구름들을 거두어 주소서. 주님의 임재를 회복하시어 내 혼을 소생케 하소서. 나를 저 높은 곳, 겨울도 구름도 더 이상 없는 곳으로 인도해 주소서.』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께서 통과하게 하신 환경들로 인해 쓴 뿌리를 품거나 주님께 반항하기도 한다. "정말로 주님께서 나의 친구이시라면, 왜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하시는 것인가?"라고 투덜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친구가 주는 상처는 신실한 것이나, 원수의 입맞춤은 속이는 것이니라』(잠 27:6).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이 처한 그 험난한 역경들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 주시라고 주님께 기도하라.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그 역경들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역경을 통과하는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더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셔서 능히 통과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임도 잊지 말라. 당신이 주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 그 어떤 역경과 환난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견뎌 낼 수 없다. 누군가가 잘 말했듯이, "주여, 주님의 미소와 함께라면 어떤 것이든 받겠나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찡그리시면 나는 어떤 것도 이길 수 없나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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