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해외기사 분류

예수님만을 바라보라!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2월호>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다. 헌금, 기도, 교회 출석, 찬송 등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히 11:27),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구절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명령한다. 옛날 찬송가에는 『네 눈을 들어 예수님을 보라.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아라. 주님의 영광과 은혜의 빛 가운데 지상의 모든 것들은 희미해지리라.』라는 가사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정말로 성경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면 바로 이런 내용일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20에서 『세상의 창조 때부터 그분에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졌고 심지어는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까지도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알려졌으므로 그들이 변명하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했다. 이처럼 성경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명령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라."라는 명령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필자가 첫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바라보아야 할 "당신의 구주"라는 진리이다. 당신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면, 주님은 당신 안에 거하시고 당신은 주님 안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다. 당신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마리아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마리아를 단 일분일초라도 바라보라든지, 혹은 그녀와 악수를 나누라든지 그런 명령을 찾아볼 수 없다. 결코 마리아를 바라보지 말라. 마리아에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카톨릭 교황이나 신부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신약에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벧전 2:5,9), 동시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오직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히 3:1)이시라고 천명하고 있다. "누가 당신의 죗값을 치러 주셨는가?" 부처, 마호메트, 마리아, 교황 또는 신부 등이 당신의 죗값을 치러 주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어떤 목사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환자를 세 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네 번째 방문 때 이 환자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저의 죄들을 없애 주세요. 죄들이 저를 억누르고 있어서 너무 힘들어요!" 그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만, 어떤 목사도 당신의 죄들을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죄들을 없애 줄 수 있는지 보여 드리죠!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라고 했습니다." 어떤 찬송가 가사에도 나오듯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보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누구든지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모세의 놋뱀이 장대에 매달렸던 것처럼(요 3:14)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분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땅에 장사되신 분으로 보아야 한다(마 12:40).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롬 4:25). 주님께서 직접 약속하셨듯이 장차 다시 오실 분으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요 14:3). 물론 필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땅에 묻히신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오늘날 지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주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요 20:29). 사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 때문에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셨음을 믿는(고전 15:3,4), 실제로 본 적이 없음에도 믿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이다. 우리는 보고 믿은 도마보다 더 복이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원한다면 마태복음 16:14을 보면 된다. 당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경에 나오는 "가장 거친 인물" 세 명 중 하나로 여긴다고 말씀드렸다. 즉 침례인 요한과 선지자들이었던 엘리야와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는 성전 밖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폭력과 약탈"을 부르짖었다(렘 20:8). 엘리야는 어떠했는가? 그는 다른 "종교인들"의 소위 예배에 끼어들어 그들이 하는 기도를 조롱했다(왕상 18:27). 침례인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 독사들아, 누가 너희에게 여기로 와서 회개하라고 그러더냐?"라고 호통을 쳤다(눅 3:7). 주님께서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버터같이 부드럽고 꿀을 떨어뜨릴 듯이 달콤한 말을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고, 마치 "사자 조련사" 같은 분이시다.

또한 주님 외에 다른 것들을 너무 오래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 위선자들이고 당신 자신만 구원받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당신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결국 당신 자신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자아 중심적인 인물이 되거나 광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다가도, 또 어떤 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타락한 죄성"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아서도 안 된다. 사랑하는 부모나 자식들도 당신을 실망시키거나 슬프게 하기 마련이다. 정부에 기대를 거는 태도는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정부가 무엇이든지 해결해 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사탄을 바라볼 수도 없다. 사탄은 이브에게 거짓말을 했듯이 당신에게도 거짓으로 말할 것이다. 욥을 비난했듯이 당신도 비난할 것이다. 사탄은 당신을 속일 것이며(계 12:9), 또한 방해를 할 것이다. 당신이 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려고 할 때 마귀는 당신을 증오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은 마치 당신이 그의 자식들을(요 8:44, 엡 2:1-3) "납치"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자녀를 납치해 간다면, 당신은 그를 곱게 봐주겠는가?

또한 과거의 승리나 실패를 바라보아서도 안 된다. 바울이 권고한 다음의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쫓아갈 뿐이라』(빌 3:13,14).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명사수 중의 한 사람이었던 미국 텍사스 출신의 아돌프 토퍼웨인은 1906년 당시 하루에 5시간씩, 매 5초마다 7.5센티미터 크기의 표적을 맞췄었는데, 이런 기이한 행동을 12일 동안 하면서 37,200발 중 단 15발만 명중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바라보아야 할 그 표적에서 문자 그대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주님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필자의 집에는 셰퍼드 개 세 마리가 있다. 어떨 때는 내 얼굴 표정이 바뀌기만 해도 내 개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또한 내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에도 저쪽 문 근처에서 나를 물끄러미 계속 쳐다본다. 내가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주인님이 뭔가 필요한 게 있는가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도 이런 개들처럼 하나님 한 분만을 충직하게 섬기고 싶다. 밤에 신학원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걸어 들어갈 때면,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문을 열려고 한다. 그런데 앞뜰로 몇 발자국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개들은 내가 왔다는 사실을 기가 막히게 미리 알고서 나를 맞이한다. 말하자면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이런 정도로 민감할 수 있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것이다.

이미 이룩한 승리에 대해서도 잊어버리라.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이룰 수도 없는 승리를 조작해 내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좋은 결과가 예상되지 못할 경우 지금까지 하던 일을 이내 중단하고 만다. 자신의 실패를 보고 완전히 절망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매번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푯대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잭 하일스는 자기 자녀들에게 "결코 실패를 받아들이지 말라."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항상 이길 수 있어. 너는 항상 승리할 수 있다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조언이었고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승리자가 될 수 있지만, 실패에 대해 올바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사람이다.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는 당대에 "홈런왕"이었지만, 동시에 "삼진 아웃"도 많이 당한 선수였다. 투수가 던지는 공마다 방망이를 휘둘러 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홈런을 치려다가 삼진 아웃을 당했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승리도, 패배도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리차드 움브란트와 하랄란 포포프 목사는 모두 10년 이상 투옥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둘 다 오늘날 배교한 교회들처럼 "대형 교회"를 세우거나 "버스 사역"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직 감옥에 갇혀 엄청난 고문을 당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들은 "패배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둘 다 그 끔찍한 시간들을 견뎌 냈고, 이후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는 전 세계에서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사역을 했다. 그들은 흔히들 패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것이다. 분명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될 때라든지, 더 이상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될 때가 있을 것이다. 앞을 내다봐도 답은 없고, 옛날 과거로 돌아가자니 그럴 수도 없다. 또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옥뿐인데, 구원받은 사람은 지옥에 갈 수 없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것만 보일 테니, 거기에도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를 보아야 한다! 그렇다!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4:30에서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한 것도 그가 바람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으로 하여금 바다 위를 걷게 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주위에서 더욱 거세지는 바람을 보고 겁을 먹었다.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고 폭풍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토록 매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 찾아와도 주님만을 바라보라! 인생을 사는 동안 주님만 바라본 성도는 죽을 때도 주님만 바라볼 수 있다. 죽을 때는 자기 자신은 물론,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도, 종교 경력도 의지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사 45:22)라고 말씀하셨다. 찰스 스펄전은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 한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바로 이 말씀이 전파되는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았다.

당신의 경험 또는 당신의 믿음이 돈독하다는 사실 그 자체도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못 된다. 잘못된 것을 믿는 믿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무엇인가가 아니라 "한 인격체"를 신뢰해야 한다. 어떤 종교, 단체, 업적, 선행 등이 아니라 "한 인격체"를 믿고 영접하여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요일 5:12,13).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마 1:21). 당신의 믿음 자체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기 때문이다(히 12:2). 우리는 인생을 사는 내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데, 죽을 때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너희가 그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지금도 그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나니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벧전 1:8,9). "오, 주님을 보고, 그 얼굴을 뵙고 싶어라."라는 찬송가 가사가 있다. 언젠가 나는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후 5:7)라고 하신 말씀대로 믿음의 행보를 내디뎌야 한다.

성도들이여, 지혜와 구속과 거룩하게 됨과 성결과 능력과 영생의 비결은 모두 "한 인격체" 안에 있으니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이 모든 것들을 주신 주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BB

전체 279 / 7 페이지
RSS
번호
제목